무응답이라는 응답

by 조모비

모비는 생각했다. 왜 아무도 나에게 미안해하지 않을까? 1년 내내 모비를 갉아먹은 그 학생도, 그 동료도, 남자의 아버지도, 진성도. 그러나 왜 모비는 용서하고 싶을까? 미안하다고 하면 바로 용서해 줄 건데. 용서를 구하지도 않는 잘못을 또 혼자 용서할 힘은 이제 없는데.




아빠. 내가 아빠라면 엄마한테 고마울 거야. 어쨌든 그 어린 나이에 애 둘 데리고 살았잖아. 이만큼 키워줬잖아. 나랑 동생이 그 어떤 사촌들보다 잘 컸어. 그거 엄마 덕이야.


아빠 인생도 안쓰럽지만 아빠잖아. 아빠가 선택해서 우리 낳았잖아. 더 이상 아빠가 연락 끊는다는 협박에 두려워하는 어린애가 아니야. 나도 이제 부모잖아. 연락 끊기면 아쉬운 건 부모라는 거, 나도 알아버렸어. 아빠가 엄마한테 돈을 얼마큼 보태줬는지 모르겠는데, 나 아빠가 사준 집에 살아본 적 없어. 아빠가 처음으로 집을 샀는데 생판 모르는 아줌마랑 같이 살잖아. 그 호강 엄마랑 동생이 누렸으면 좋겠어. 그래서 내가 그 아줌마 조금 미워하는 게 뭐가 그렇게 서운해?


내가 우리 딸한테 그 아줌마 욕을 했다고? 아빠, 나 내 딸은 이혼이란 글자도 모르고 살게 하고 싶었어. 근데 그 똑똑한 여우 같은 것이 금세 할머니 할아버지 따로 사는 거 보고 이혼을 배워서 맨날 무서워했어. 자기 부모도 이혼할까 봐. 그런데 내가 그런 딸 앞에서 아줌마 얘기 했겠어? 외할아버지가 웬 다른 여자랑 찍은 사진을 핸드폰에 도배했는데 외할머니가 세상에서 제일 좋은 아이가 어떻게 호의적이겠어. 딸한테도 안 듣던 싫은 소리, 끔찍이 아끼던 손녀에게 들으니까 서운해?


마음이 병들고 나니까 이제 무서운 게 없어. 아빠 미워. 아빠가 나한테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해. 일부러 나에게 상처 준 건 아니지만 미안해했으면 좋겠어.





모비는 두려운 것이 없어졌다. 진성을 버릴 각오를 했기 때문이다. 손잡이가 없는 칼자루를 쥐고 진성을 찔렀다. 힘껏 찌를수록 칼을 쥔 모비의 손에도 피가 흘렀다. 그래도 끝까지 찔렀다. 이제 혼자서는 주체할 수 없는 미움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진성이 미안하다고만 해주면 깨끗이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비는 용서할 준비가 항상 되어 있었다. 그러나 진성은 아무 말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모비가 무응답이 응답이라는 것을 확실히 안 것은 이번 추석이었다. 진성이 광주에 내려왔지만 모비와 모비의 딸에게 연락하지 않고 다시 올라갔기 때문이다. 모비는 진성에게 아무 기대가 없었는 데에도 그 소식을 듣고 심란해졌다. 진성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것이다. 모비는 또다시 깊은 잠을 잤다.




꿈속에 모비는 영정사진 앞에 서 있다. 그러게, 살아 계실 때 잘해야지. 모두가 모비에게 한 소리씩 한다. 아빠가 너를 얼마나 끔찍이 생각했는데. 네 연락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모비가 진성을 버린 시간을 후회한다. 비밀을 끝내 전하지 못한 것을 괴로워한다. 그 후회를, 그 괴로움을 견딜 자신이 없어서 진성을 버리지 못한다. 당장이라도 아무 일 없던 듯 아빠라고 부르면 진성은 딱딱하게 굴다가 다시 다정해질 것이다. 그러나 모비는 사실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다시 아빠를 부르기엔 너무 쇄약 해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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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꿈을 꾼다.




영정사진 속 주인공이 바뀐다. 모비의 장례식장이다. 진성이 그 앞에 앉아 운다. 아무 말이 없다. 후회할까? 미안할까? 부모 앞선 자식이라 괘씸할까?






모비는 두 번째 꿈이 더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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