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아시안이 섞여 사는 곳. 공식 언어가 말레이어, 영어, 중국어, 타밀어인 나라. 화교들의 주도로 말레이시아에서 독립한 작지만 강한 국가. 이것은 모두 싱가포르를 설명하는 문장들이다.
하지만 실제 싱가포르는 어떤 곳일까? 필자는 아직 싱가포르에 가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오늘 소개할 두 편의 영화를 통해 싱가포르의 햇살과 습기를 느꼈다고 단언한다.
중국계 싱가포르인 가족과 필리핀 가정부의 이야기를 담은 <일로 일로>. 그리고 말레이시아 출신의 결혼이주민 여교사와 제자의 관계를 다룬 <웻 시즌>이 그 주인공이다.
※주의※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성장의 거름이 된 사람들, <일로 일로>
출처: 다음 영화
어느 가족이 있다. 15년간 영업직에 종사한 베테랑 비즈니스맨 아버지와 회사에서 인사직을 맡아 오랜 세월 근무한 어머니. 그리고 그런 부모의 사랑이 고픈 사고뭉치 아들 '자러'.
자러의 취미는 다마고치 게임과 신문지 로또 결과를 스크랩하는 것이다. 반면 학교 수업에는 집중하지 못하고 친구들과의 싸움이 잦아, 엄마는 학교로 호출되기 일쑤다. 곧 둘째를 출산할 예정인 엄마는 하루가 다르게 반항적으로 변하는 아들이 점점 힘에 부친다. 결국 아들을 돌봐주고 집안일도 도울 외국인 가정부를 고용하기로 결정한다.
출처: 다음 영화
그렇게 자러와 함께 생활하게 된 필리핀인 '테레사'(이하 테리). 그녀는 한 살배기 아들을 고향에 남겨두고 돈을 벌기 위해 떠나왔다. 처음 테리를 만났을 때 자러는 아주 격렬하게 그녀를 거부했다. 호통치고 무시하고 곤경에 빠트리는 둥, 보는 이로 하여금 아이의 순수성마저 의심케 한다.
그러나 얼마 후 자러는 집안의 그 누구보다 테리를 따르기 시작한다. 부모가 부재한 자리를 테리의 존재로 채운 것이다. 둘은 사이좋게 등하교를 하고 같이 음악을 듣기도 한다. 아이는 은연중에 외국인 노동자인 테리를 무시하는 어른들과 달리, 그녀를 살갑게 챙기며 진심으로 대한다.
출처: 다음 영화
테리를 엄마처럼 따르는 자러를 보는 진짜 '엄마'의 마음은 편치 않다. 직접 만들어준 죽이 맛없다면서 "테리 아줌마 밥이 더 맛있다"라는 아이의 짧은 한 마디로 그녀의 마음은 흔들린다. 그리고 자러의 생일날, 자신보다 가정부와 찍는 사진에 공들이는 아들의 모습에 엄마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닫는다.
일에 치이고 삶에 치여서 신경 써주지 못했을 뿐, 아이에게 부족한 건 없다고 부모는 생각해왔다. 그러는 동안 아이는 '나 여기 있어요. 바로 여기에...!'라고 온몸으로 외치고 있었다. 그들도 기억한다.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의 자러는 이러지 않았다는 걸 말이다.
집착적으로 로또 결과를 오려 붙이는 자러의 행동 역시 여기서 비롯되었다. 무의식적으로 '만약 로또에 당첨돼서 우리 집이 좀 더 여유로워진다면, 엄마 아빠가 나를 돌아봐주지 않을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상황은 아이의 바람과 정반대로 흘러간다. 아빠의 실직과 주식실패로 인해 테리를 해고할 수밖에 없었다. 슬픔에 빠진 자러는 로또 가게로 향하고, 우여곡절 끝에 로또를 손에 쥔다. 그 한 장에 마지막 기대를 걸어보았으나 결과는 참담하다.
테리를 공항에 데려다주는 아침. 아이는 그녀를 바라보지도 작별을 고하지도 않는다. 그저 테리의 흔적을 하나라도 간직하고 싶어서 한바탕 사고를 칠 뿐이다. 자러는 아직 엄마와 함께 잠들고 싶고, 자길 껴안아주는 사람의 머리칼 내음을 좋아하는 어린애였다. 그런 아이가 또다시 혼자 남겨진다.
오늘날 아시아 국가들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경제력을 지닌 싱가포르. 1965년 독립 이후 엄청난 발전을 이뤘지만, 90년대 말 아시아 외환위기를 피할 순 없었다. <일로 일로>는 '자러 가족과 테리'의 이야기를 통해 1998년 경제 위기 당시의 위태로운 현실을 그려낸다.
여기서 우리는 싱가포르나 한국처럼 작은 국가들이 무엇을 양분 삼아 성장할 수 있었는지 고민해 봐야 한다.
이 영화는 그 부분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국가 발전의 동력이 된 것은 다름 아닌 '사람'이었다. 나라의 거름으로 쓰인 어른들과 쉼 없이 일하는 부모의 등만 바라봐야 했던 아이들이, 발전이라는 과업 뒤편에 서있었다.
더욱 열심히 일하려고 가정부를 고용한 그때의 사람들. 그리고 값싼 노동력을 대가로 그들의 아이를 돌보는 피고용인. 누군가의 희생을 위해 또 다른 희생이 요구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과거 싱가포르에 유입되었던 외국인 노동자들 또한 싱가포르의 밑거름으로서 이바지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 이주민 여성의 부서진현실, <웻 시즌>
출처: 다음 영화
우기로 접어든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출신의 중국어 교사 링은, 오늘도 출근길 차 안에서 불임치료를 위한 주사를 아랫배에 놓는다. 8년간 이어진 불임치료는 부부 사이를 거의 파탄 냈다. 남편은 이제 무신경하게 밖으로 나돌기만 하는데, 링은 묵묵히 산부인과 치료를 견디고 아픈 시아버지를 모실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링은 한 학생을 만나게 된다. 입시와 상관없는 과목이라며 모두가 등한시하는 중국어 보충수업에 열심히 참여하는 '궈웨이런'이 그녀의 눈에 띈 것이다. 혼자 보충수업에 남은 궈웨이런의 공부를 봐주고 집에 데려다준 걸 계기로 둘은 급격히 가까워진다.
출처: 다음 영화
접점이 늘어가는 두 사람. 궈웨이런은 종종 링의 집에 와서 공부를 하고, 링은 궈웨이런이 출전한 우슈 대회를 구경하러 가고, 교실에서 두리안을 나누어 먹기도 한다. 단순히 친밀한 사제관계로 남을 수도 있었겠지만 이들 사이에는 그보다 더 끈끈한 유대감이 쌓이게 된다.
실패한 수정란 소식을 듣고 눈물을 쏟는 링과, 매일같이 아무도 없는 집에 홀로 들어가는 궈웨이런. 그들은 쓸쓸한 삶을 계속해서 살아내는 상대방의 모습을 눈에 아로새겼다. 그것이 어쩌면 서로에게 위안처럼 다가왔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거기서 한발 더 내디뎌버렸다.
출처: 다음 영화
버스에서 남몰래 손을 맞잡는 두 사람은 어떤 변명을 해야 할까. 그들은 분명 학생과 선생님 사이에서 지켜야 할 선을 넘었다. 하지만 이 장소, 이 시간, 지금의 그들이 아니었다면 이 관계는 과연 잘못이었을까? 감히 생각해 본다. 잘못은 그들을 벼랑 끝으로 내몬 사람들에게 있다고.
발목 부상으로 혼자서 치료를 받는 궈웨이런을 우연히 같은 병원에 다니던 링이 목격하며 둘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우슈 대회에서 1등을 해도, 아이가 코피를 쏟을 정도로 부실하게 챙겨 먹어도 나타나지 않았던 궈웨이런의 부모님. 소년이 돌아온 집 냉장고에는 먹을 만한 거라곤 콜라 한 병이 전부였다.
그런 제자에게 선생님의 눈길이 향한 것은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링이 불임치료를 지속함에도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외면하는 남편. 시아버지의 장례식 날, 그는 끝내 불륜 상대와 그녀의 아들을 데려온다. 평소와 다르게 따듯한 남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링은 체념한 듯이 말을 건넨다. "당신이 딸을 원하는 줄 알았어." 수많은 감정이 그녀의 눈동자 위로 스쳐 지나간다.
가장 가까워야 할 사람들에 의해 상처 입은 둘의 유대관계는 걷잡을 수없이 깊어진다. 결국 링은 궈웨이런을 떼어내려는데, 소년은 오열하며 마지막 바람을 내뱉는다. "이별은 처음이에요. 선생님을 그냥 껴안고 싶어요." 쏟아지는 빗속에서 둘은 아주 오랫동안 부둥켜안는다. 기꺼이 나와 함께 비를 맞아주는 존재로 기억될 그들의 관계는 끝나가는 우기처럼 그렇게 저물었다.
중국계 싱가포르인과 결혼한 링의 상황은 싱가포르의 역사를 보여준다. 과거 말레이시아 영토에 속했던 싱가포르. 현재 인구 대부분(70~80%)을 중국계가 차지하고 있으며, 말레이시아계와 인도계가 나머지를 구성한다. 따지고 보면 화교들이 본토 토착민의 숫자를 뛰어넘은 것이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화교들의 반발로 독립한 싱가포르의 시초부터 예견된 것일지 모르겠다.
앞서 밝혔듯 싱가포르는 공식적인 언어가 4개 국어인 나라이다. 하지만 취업이나 직장 생활과 같은 공적인 언어는 영어로 통용된다. 그래서 아무리 공교육 차원에서 모든 모국어를 교육하더라도, 젊은 세대는 영어를 중시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한다.
중국어 교사인 링과 중국 전통무술 '우슈'선수인 궈웨이런은 서양문물 뒤로 밀려나는 그들의 근본을 대변하는 동시에, 가정이라는 기초집단 안에서 방치당하는 둘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특히 결혼이주민 여성인 링에게 있어서 '불임'은 정말이지 거대한 문제였을 것이다. 그녀의 어머니마저 불안정한 말레이시아의 정치 상황을 언급하며 무슨 일이 있어도 싱가포르 국적을 따야 한다고 압박을 해왔다. 이 같은 압박 속에서 링은 십 년 가까이 살았다. 이주민 여성의 삶이란 어딜 가든 퍽퍽하기 그지없다.
안소니 첸 감독
오늘 소개한 두 작품은 싱가포르 출신의 '안소니 첸'이 감독했다. 그는 2013년 데뷔작 <일로 일로>로 뛰어난 신인감독에게 주어지는 '칸 영화제 황금카메라 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뤘다.
실제 자신의 어릴 적 경험을 바탕으로 제작한 <일로 일로>는 다큐에 가까운 이야기 흐름으로, 아시아 국가가 공유한 경제 위기의 절망감을 밀도 있게 연출했다.
그리고 지난 2019년, 이주민 여성의 삶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웻 시즌>을 통해 오늘날 싱가포르의 맨 얼굴을 비춘다. <일로 일로>에 비하면 훨씬 극적인 설정을 많이 포함했으나, 아시아 외환위기에 이어 '결혼이주민 여성'이라는 주요한 공감대를 다뤘다.
본인이 바라본 싱가포르를 가감 없이 카메라에 담는 안소니 첸 감독의 시선은 정말 "주목할 만" 하다. 앞으로 그의 시선을 따라가면 무엇을 만나게 될지 궁금해진다. 싱가포르 사회에 관해 알고 싶다면 안소니 첸의 영화를 눈여겨보시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