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University of Minnesota MBA에 다녀온 지 어언 12년이 지났습니다. 세월이 지나고 나이를 먹은 만큼 제 주변에서 MBA 진학을 고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저와 일하는 젊은 직원의 지인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생각해보는 주제인 것 같습니다.
MBA가는 방법이나 가서 무엇을 배우고, 어떻게 성장하는지 등에 대해서는 이미 온라인상에 관련 글들이 대단히 많으니 첨언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저는 이 글을 통해 근본적 고민인 “MBA가면 내가 뭘 얻을 수 있을까?”에 대해 다뤄볼까 합니다. 12년이나 지났으니 이 즈음이면 대충 MBA 투자에 대한 손익계산서를 충분히 만들 수 있을 것 같으니까요.
MBA를 일종의 자격증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납니다. 마치 의사나 변호사 자격증처럼 MBA 를 다녀오면 보다 좋은 직업을 가질 기회를 갖고, 남들이 우대해주고, 보다 높은 급여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요약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MBA는 석사학위일 뿐입니다. 경영에 대해 학부에서 배우는 것과는 절대 비교할 수 없는 높은 수준의 ‘경영자 되는 법’을 배우게 되지만 그걸 배우는 것 자체로 내게 새로운 커리어가 시작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경영학 교수들은 모두 대기업 임원보다 잘 벌어야 하지 않겠어요?
MBA에서 배우는 내용을 줄여서 말하자면 ‘주주’와 ‘투자자’의 시각에서 기업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고, 이들의 요구에 맞추기 위해 기업을 어떻게 경영할 것인가입니다. “주주자본주의”를 실현하는 경영자를 키우는 게 목적인 과정이지 그 자체로 경영자가 될 기회를 주거나, 될 자격을 주는 과정은 전혀 아닙니다.
MBA를 졸업한 뒤에 정말 유명한 글로벌 회사 본사에 취업했다거나 맥킨지 같은 컨설팅 회사에 갔다거나, 투자은행에 취업했다는 이야기는 많습니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MBA가 없었어도 그런 회사에 취업할 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교육 과정 동안 이미 기존에 있던 능력을 조금 더 갈고닦은 것이거나, 이들 업종으로 가기 위해 필요했던 약간의 인적 네트워크를 추가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좀 더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봅시다. 학비와 졸업 후 연봉에 대해서 말입니다.
회사에서 스폰서로 보내주는 경우거나 국내 MBA라면 해당 없지만, 자비로 가는 해외 MBA라면 아무리 적게 들어도 2억 원 정도는 들어갑니다. 물론 물가가 저렴한 지역의 MBA를 가거나 1학년 여름방학에 해외에서 인턴과 파트타임을 한다면 조금 낫겠지만 대부분은 이 정도 돈을 쓰게 됩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MBA 인턴들의 몸값은 국내 대기업 과차장보다 높습니다. 다만 기간이 짧아서 문제죠.)
이 정도 투자를 단기간에 회수하려면 페이가 엄청난 아주 소수의 직업군에 들어가야 합니다. 맥킨지 등의 글로벌 컨설팅업체, 투자은행, 구글 같은 글로벌 업체에 관리자 급으로 들어간다면 아마도 4~5년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투자비 회수를 하겠지요. 국내 기업 같은 경우에는 삼성전자 같은 곳에서 운이 좋아 PS 대박 맞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것도 사실 쉽지 않습니다.
아무튼 위에 언급할 회사에 가려면 글로벌 top 10에 나오는 학교들 정도의 MBA에, 학부도 SKY나 카이스트 수준 정도로 좋아야 하고, 영어도 대단히 잘해야 하고, 부지런히 커리어를 만들어줄 회사를 찾아야 합니다. 미국 애들 말로 ‘네트워크’를 정말 열심히 만들어야죠. 미국의 네트워크와 한국의 지연, 혈연, 학연의 차이는 큽니다. 미국식 네트워크는 개인의 노력에 따라 대다수가 만들어집니다. 또한 아무리 지인 추천이어도 면접 등 전형 과정이 정말 빡빡합니다. 어찌 되었건 서구 사회의 좋은 관리직 직업들은 대부분 ‘지인 추천, 즉 referral’이 없으면 지원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개발자나 디자이너는 다른 루트가 있으니 직접적인 비교는 힘들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렵게 좋은 기업에 취업한다고 해도 생각보다 남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미국 실리콘밸리 같은 곳에 취업해서 연봉 15만 불, 20만 불씩 받아도 각종 세금, 보험료, 월세 등등을 내고 나면 남는 건 3~4천만 원도 안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매년 3천씩 남겨도 꼬박 7년은 지나야 2억 원의 투자금이 회수된다는 뜻입니다.
현지 취업을 못하고 국내로 돌아오면 어떻게 될까요? 집이 금수저면 별문제가 없겠지만, 한국 대기업에서 MBA 입학전 경력 4~5년이면 아무리 높게 경력을 인정 해줘봐야 과장 1년 차입니다. 연봉 5~7천 정도일 텐데 집값, 생활비 등을 고려하면 투자비 회수는 언감생심이죠.
MBA를 간다는 뜻은 ‘경영자’가 되는 과정을 배우러 가는 것입니다. 개발자나 디자이너처럼 자기 영역이 분명한 직군도 아니고, 의사나 변호사처럼 자격증이 있는 직군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회사가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성공하지만 막상 내가 회사를 하나 만들어서 성공시키려면 죽도록 힘든 것처럼, MBA 나와서 좋은 회사를 가거나 성공적인 Career를 간 사람은 많지만 막상 내가 그 길에서 성공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분명 MBA는 입학 전에 내가 알지 못했던 산업, 경험해보지 못한 직군을 알게 해줍니다. 그저 책으로만 봤던 직업군과 회사와 경영자들에게서 직접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참 좋은 기회이기도 하죠. 하지만 배움은 배움이고, 내가 졸업한다고 그 사람들처럼 커리어 기회를 갖는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벌써 12년이 흘러서 이제 기억도 가물가물하지만, 제가 1학년 때 여름 인턴을 잡으려고 쓴 이력서는 수백 장이 넘습니다. 1장 이력서를 수백 가지 버전으로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동기들만큼 영어도 완벽하지 않은 토종 한국인인 제가 여름 인턴을 미국에서 하려고 지원한 회사가 100개가 넘고, 면접도 40~50번은 봤습니다. 학과 공부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이력서 교정과 면접 준비에 투입한 셈이지요.
그리고 겨우겨우 하나 운 좋게 걸려서 인턴을 했습니다. 풀타임 지원은 더 빡빡했죠. (고백 하자면.. 그때는 생활비가 너무 간당간당했습니다. 현지 인턴이 아니면 땡전 한 푼 없었을 지경이었으니 무조건 붙어야만 했습니다. 왜 굳이 현지 인턴이어야 했냐면, 당시 한국에서는 인턴 월급이 고작 100만 원이던 시절이었거든요..)
저와 동일한 시점에 MBA를 준비했던 한국 분들 중에는 마이크로소프트 본사에 취업한 분도 계시고, DHL 독일 본사로 가신 분도 계시고, 3M 본사에 취업했던 분도 계십니다. 그분들은 아마도 저보다 더 많이 준비를 했었을 겁니다. 그렇게 죽도록 준비해야 얻을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요. 반면 MBA에 자비로 왔지만 그저 골프 치며 즐기다가 졸업한 후에 한국으로 돌아와 자기 아버지 회사에 들어간 사람도 있습니다.
MBA는 점프대 같은 곳입니다. 그곳의 힘을 빌어 더 높이 올라가 볼 수도 있습니다만, 점프대를 활용해 뛰어오르는 힘은 개개인들에 따라 아주아주 다릅니다. 누구는 솟구쳐 오르고, 누구는 거기서 발이 걸려 넘어지기도 합니다.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보니 제가 너무 단점만 나열한 것 같습니다. 겁을 주려는 의도는 결코 아닙니다. 고생담을 과시하려는 것도 아니고요. 다만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것과는 다를 수 있고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를 간과하지 말라는 뜻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럼 MBA를 다녀오면 좋은 점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MBA를 졸업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입니다.
“여행은 살아보는 거야.”라는 Airbnb 광고 카피처럼, MBA는 현지에서 산전수전 다 겪는 경험입니다. 요즘 여행지에 가서 한 달 살기처럼 그곳의 생활 속으로 들어가 보는게 유행이라던데 MBA는 그 경험을 무려 2년이나 하는 것입니다.
생활하는 경험은 물론, 그곳에서 내로라하는 사람들과 매일매일 부딪히면서 토론하고, 논쟁하고, 갈등하고, 협업하는 기회까지 있는 하나의 총체적인 경험입니다.
우리가 큰 return 을 기대하지 않고도 해외에서 한 달 살기에 도전하는 것처럼 큰돈과 긴 시간이 들어가지만 그 경험 자체를 위해서는 충분히 해볼 만한 일입니다. 단, 이 경우엔 return 을 기대하는 투자가 아니라 경험을 사기 위해 투입하는 소모성 경비 같은 거죠.
사람이 성장하려면 ‘다른 맥락’의 사회에서 ‘생활인’으로 살아봐야 한다고 하죠. 자기의 Comfort zone을 벗어나 새로운 사회에서 이방인으로 살아보는 경험은 확실히 내 삶과 사람과 사회에 대한 새로운 조망을 줍니다. 이걸 원한다면 충분히 값을 하는 경험입니다. MBA는 확실히 여러분의 시야를 넓혀줄 것입니다.
이제까지의 설명만 보면 실질적인 투자금 회수는 어렵고, 그저 장기간 해외에서 살아보기 정도의 경험이라면 차라리 그 돈 들여서 한 1년 해외여행하는 게 낫지 않냐는 분도 계실 것 같습니다. 하지만 커리어에 정말 도움이 되는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능력자들과의 협업, 그리고 경쟁’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미 아주 좋은 회사에 계신 분들은 느끼시고 계시겠지만, 세상엔 머리 좋은 사람이 정말 많고 능력 있는 사람도 정말 많습니다. 이런 똑똑한 사람들, 특히 기업 경영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내로라하는 능력자들을 한곳에 모아 놓는 곳이 MBA입니다. 이들과 협업하고 경쟁하는 그 경험은 졸업 이후에 조금씩 조금씩 나의 내공으로 쌓입니다.
이런 내공은 졸업 직후에는 도움이 안 되지만, 중간관리자를 거쳐 경영자로 성장해가는 과정에서 본격적으로 힘을 발휘합니다. 내가 나의 팀을 조직하기 시작했을 때 인력을 어떻게 구성하고, 누굴 뽑을 것이며, 어떻게 일을 시키고, 동기부여하고, 헌신하게 할 것인가 같은 문제를 아주 뛰어난 인력들에게 실험해볼 수 있는 것이죠.
MBA는 단순히 경영학 이론을 배우는 곳이 아니고 그렇다고 경영 Case study만 하는 곳도 아닙니다.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책을 찾고, 그 해결책이 효과를 발휘할 수 있도록 사람을 조직화 해내고, 설득해내고, 의사결정을 하는 과정 전체를 배우는 곳이죠.
그리고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나에게 충분한 도전을 제공해 주는 사람들입니다. 리더가 될 것인지, 스페셜리스트가 될 것인지, 기업에 취업할 것인지 창업할 것이지 같은 커리어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답을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들과 부딪히며 찾아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이걸 기대한다면 MBA는 분명 도전할 가치가 있는 곳입니다.
이미 느끼고 계시겠지만 이런 경험은 글로벌 수준에서 경쟁하는 MBA에서만 가능합니다. 해외 MBA라고 해도 수준이 낮은 곳은(랭킹이 낮은 곳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사람들의 치열함이 상대적으로 떨어집니다. 또 국내는 “맥락의 변화”가 작아서 시야나 사고의 큰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좋은 MBA 는 입학이 어렵습니다. 많이 어렵습니다. 에세이와 GMAT, 면접으로 이어지는 이 일련의 과정은 정말 괴롭죠. 입학한다고 해도 엄청난 투자비를 써야 합니다.
위에 적은 MBA의 기회나 경험은 솔직히 MBA를 가지 않아도 개인이 노력하면 얻어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이미 좋은 회사를 다니는 분들이라면 기회비용을 생각할 때 더 낭비가 될 수도 있겠죠.
다만 MBA는 경영자로서의 시각을 키워줍니다. 사회생활 15년, 20년을 보내거나 큰 리스크를 안고 창업하지 않아도 젊을 때 대기업 경영자의 시각을 배울 수 있고, 체계를 갖고 이를 설명하게 해줍니다. 다른 맥락의 사회에서 소수자로 살아가면서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인사이트도 얻을 수 있고, 머리 좋은 사람들과 부딪히며 나는 어떻게 경쟁할 것이고, 사람은 어떻게 리딩 해야 하는가도 배울 수 있죠.
이상 제가 MBA를 다녀와서 느낀 점을 글로 풀어내보았습니다. 세월이 많이 지난지라 요즘은 또 다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큰 틀에서는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고민하시는 분들께도 작은 도움이나마 될 것 같고요.
글이 많이 길지만 이것 하나만 기억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MBA는 당신의 커리어를 극적으로 업그레이드 시켜줄 치트키가 결코 아니라는 사실 말입니다.
이전 글
슬기로운 직장생활과 모비인사이드의 파트너십으로 제공되는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