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문서만 따라 하면 조직문화가 완성되나요?”
흔히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중요한 문서(Culture Deck)’라고들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마 인사(HR) 및 조직문화에 대해 관심 있는 분들이라면 다들 들어봤을 텐데요, 바로 넷플릭스의 조직 문화(일하는 문화)를 담은 100장이 넘는 PPT 슬라이드를 말합니다.
넷플릭스의 유명한 문서 <자유와 책임>
최근 몇 년 사이에 ‘조직 문화’라는 테마가 화두로 떠올랐죠. 각종 스타트업들은 물론이고 이름 있는 중견기업들까지 조직문화 담당자를 채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왜일까요? 왜 갑자기 조직문화가 핫하게 떠오르는 건지 생각해봅시다. 제 생각엔 크게 2가지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첫 번째는 우리나라의 고질적인 병폐인 ‘갑질 문화’에 대한 탈출 욕구입니다. 누구나 인간 대접받는 곳에서 일하고 싶어 하죠. 월급이 조금 줄더라도 멀쩡한 사람들하고 일하고 싶은 게 우리 직장인들의 진심이니까요.
두 번째, 밀레니얼 세대가 사회에 공급되면서 그들의 눈높이에 맞는 기업 홍보 방안이 필요해졌습니다. 요새 유행하는 말로는 ‘채용 브랜딩’이라고도 합니다. 유튜브 같은 영상 플랫폼이 발달하면서, 단순히 글자로 “우리 회사 좋아요~” 라고 써놓는 거 보다는 실제로 일하는 모습을 보고자 하는 취준생이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대기업 인사팀도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코미디 같은 상황이 생기고 있습니다. (외주를 주는 경우가 많겠지만..)
SKT는 18년도 하반기 공채부터 직무별 VLOG를 업로드했습니다.
영상을 보면 확실히 생동감 있고 현실적인 조직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딱딱한 글자보다는 훨씬 낫죠. 하지만 이런 영상 자체가 ‘조직 문화’를 의미하진 않습니다.
조직 문화를 만들기 위한 첫 단계로, 보통 기업이 우선순위에 두는 인재 또는 일하는 방식의 핵심 가치(Core Values)를 정의하곤 합니다. 예를 들어 넷플릭스는 “판단력, 소통, 임팩트, 호기심, 혁신, 용기, 열정, 정직, 이타적 행동” 이라는 9가지 가치를 선정했습니다. 넷플릭스 문서에는 이 아홉 가지 가치를 만족하는 사람을 고용하고 승진시키겠다고 쓰여 있습니다.
넷플릭스가 핵심 가치라는 걸 정의하고 조직문화와 평가보상에 활용한다는 소문이 저 문서를 통해 우리나라에도 전파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조직 문화란 걸 딱히 생각해본 적이 없는 스타트업들은 자기들의 핵심 가치를 도출하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죠. 대표적인 것으로는 “최고의 인재”, “탁월함”, “성실함”과 같은 무난한 단어들이 있습니다.
마치 메이플 스토리 캐릭 생성 같은…
아이러니한 건, 이제 막 조직문화를 만들기 시작한 스타트업들의 핵심 가치를 살펴보면 대부분 비스무리 합니다. 저는 이런 현상을 보면, 어릴 적 했던 <메이플 스토리>라는 게임이 떠올라요.
처음에 캐릭터 만들 때 초기 능력치 세팅을 하는데, 이때 “힘, 민첩, 지능, 행운”과 같은 장점들에 주어진 능력치를 배분하는 과정이죠. 지금 스타트업들이 열심히 도출하고 있는 그 핵심 가치들도 똑같아 보여요.
우리가 단순히 메이플 같은 RPG 게임을 하면서도 직업을 여러 번 바꾸고, 무기도 바꾸고, 정 아니다 싶으면 새로운 캐릭터를 키우기도 하잖아요. 근데 게임보다도 훨씬 시장에 대응하기 힘들고 당장 하루 앞을 모르는 게 비즈니스인데.
어떻게 스타트업을 설립하자마자 핵심 가치를 도출할 수 있나요? 적어도 비즈니스 모델이 확고히 자리를 잡고 매출이 발생하기 시작해, 조직 구성원이 빠르게 늘어나는 시점이 도래한 이후에 고민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가장 중요한 건 기업의 지속가능성입니다. 조직 문화는 안정적인 BM을 구축한 뒤에 생각해봐도 늦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기업이 없으면 조직 문화도 없습니다. 산전수전 고생해가면서 팀원들끼리 충돌도 하고 싸움도 하면서 기업 경쟁력이 생긴다면, 조직 문화는 어느샌가 생겨있을 겁니다. 은근히 자리 잡힌 그 문화를 요약하는 ‘단어’를 뽑아내면 그것이 핵심 가치가 되는 것입니다.
마냥 긍정적인 단어를 떠올리는 게 아니라, 내가 매일 마주하는 구성원의 모습과 어울리는 단어를 뽑아낸 것이 핵심 가치입니다.
우리 회사의 핵심 가치가 단순히보여주기 식 단어인지 고민해봅시다.
넷플릭스 문서에도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실제로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이 가치다.”
조직 구성원들이 공감하지 못하는 공허하기만 한 뻔지르르한 단어는 핵심 가치가 아닙니다.
‘탁월함’ 이라는 가치가 있다고 합시다. 정말 우리 회사의 모든 직원이 탁월한가요? 탁월함의 기준은 상대적입니다. 판단하기 어렵죠. 정말 미친 듯이 탁월했으면 우리 회사에 없을 겁니다. 넷플릭스나 구글에서 일하고 있지 않겠어요?
세계 최고의 탁월한 인재들은 여기에 가있을 겁니다.
긍정적인 가치를 정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게 나쁜 건 아닙니다. 다만, 그 가치에 구성원들이 공감하지 못하고 단순히 좋아 보이는 단어만 나열한 것으로 느낀다면, 싹 지워버리고 차라리 다수결 투표를 통해 핵심 가치를 도출하는 게 낫습니다. 그러면 적어도 ‘개성’이라도 있겠죠.
되뇌어 봅시다. 우리는 넷플릭스가 아닙니다. BM 확보하고, 투자도 받으면 좋고, 매출 잘 내서 직원들하고 다 함께 행복하고 싶은, 한국에 있는 고만고만한 기업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기업들의 핵심 가치는 독창성이 없고 다 넷플릭스 따라 하는 느낌입니다.
무엇보다, 넷플릭스의 핵심 가치는 CEO인 리드 헤이스팅스(Reed Hastings)가 직접 만든 겁니다. 자기 회사니까 자신감 있고 파격적으로 만든 거죠.
조직문화 담당자는 대표가 아닙니다. 담당자 채용해서 열심히 핵심 가치 도출해서 결재 올리면 뭐하나요? 대표가 결국 이해하지 못하거나 진짜로 조직 문화를 바꿀 생각이 없으면 말짱 도루묵입니다.
넷플릭스 문서의 도입부에는 파산한 ‘엔론’을 디스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청렴, 존중, 탁월함’ 같은 단어를 로비에 걸어두었지만, 정작 CEO가 사기 혐의로 감옥에 갔다는 내용입니다. 아주 명치를 쎄게 때리죠.
마지막 교훈, “듣기에 그럴듯한 단어들을 로비에 걸어두는” 회사가 우리 회사가 아닌지 잘 생각해봅시다. 핵심 가치는 단순히 보여 주기 위한 홍보성 단어가 아닙니다. 기업 구성원들의 땀 냄새가 진하게 배어있어야 합니다.
지나가는 아무 직원이나 붙잡고 핵심 가치를 물어봤을 때, 그날 먹은 점심 메뉴 말하듯이 툭툭 튀어나올 만큼 공감할 수 있는 단어여야 합니다. 그러한 알짜배기 핵심 가치를 재료로 비로소 조직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인스턴트 만들 듯이 뚝딱 만들어 낸 문화는 금방 상하기 마련이니까요.
만일, 아직 <넷플릭스 문서> 한국어 번역본을 읽어보지 못한 분이 계시다면.. 이 링크를 통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번역본 링크>
해당 글은 유재호님과 모비인사이드의 파트너쉽으로 제공되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