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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biinside Apr 13. 2021

스타트업 조직의 작고 소중한 징후들

조직에는 수많은 징후들이 스쳐 지나간다. 예를 들면 이렇다. “OO님은 너무 바쁘시니까요” 혹시 지나가다가 이런 말을 들었다면 무슨 생각이 드는가? 그냥 다들 바쁘니까 그러려니 하고 별 생각조차 안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 귀에는 이렇게 들린다. “비상! 비상! 위험 징후를 포착하였습니다”


영화에서처럼 먼 미래에 벌어질 일이 눈에 보이는 양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작은 말 한마디에 불과하지만 여기에는 수많은 가능성이 담겨 있다. 



1) OO님은 너무 바쁘기 때문에 말을 걸기가 어렵다/부담스럽다.


만약 그에게 물어본다면 간단하게 해결될 질문 거리라든지, 업무적으로 요청할 게 있다 할지라도 상대방이 너무 바빠 보이면 말을 못 걸게 된다. 사소해 보이지만 전사에 이런 상태가 만연해 있다면 낭비되는 시간들을 감히 계산할 수 조차 없다. 매일 자기 실무만 쳐내기 급급한 실무자들은 느끼지 못하지만, 조직 전체를 보는 사람이라면 매일매일 수십 명이 쌓아 올리는 비효율이 얼마나 끔찍한지 알 것이다. 


2) OO라는 사람은 지금 업무량이 과부하 상태다.


업무량이 제대로 관리되고 있는지도 확인해봐야 한다. 솔직히 일이 많은 건 어느 스타트업이나 비슷하다. 그러나 일이 잘 분배되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구조적으로 팀원들의 업무량이 제대로 파악이 되고 있는지, 그에 맞게 재분배되고 있는지를 확인해볼 수 있겠다. 만약 구조의 문제라면 비단 이 OO라는 사람의 업무만 과중한 게 아니라 다른 구성원들도 문제를 겪고 있을 확률이 높다. 


스타트업에는 이런 식의 작고 소중한 징후들이 많다. 얼마 전에 썼던 글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다른 팀이 무슨 일 하는지 왜 알아야 돼?”라는 글에서는 사일로 현상에 대해 다뤘다. 


개인적으로 조직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은 이런 징후를 잘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회학이 딱 그렇다. 나는 사회학 전공인데 예를 들면 과거에 개인의 자살은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로만 취급됐었다. 저 사람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겠지, 저 사람이 어떤 힘든 일이 있었나 보다 하고 그의 문제로만 여겨졌었다. 하지만 이제는 사회적 관점에서 자살이 절대로 개인만의 문제가 아님을 모두가 안다. 사회적 현상이고 사회적 문제다. 상황 이면의 배경과 맥락, 구조, 영향을 고려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스타트업에서도 사회학적인, 사회적인, 조직 차원의 관점이 필요하다. 작은 말과 행동에 담긴 조직 차원의 인사이트를 뽑아내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내가 자주 목격하는 스타트업에서의 작고 소중한 징후들에 대해서 생각나는 대로 정리나 해볼까 한다. 





#1 이건 굳이 공유할 필요 없어요.


조직의 문제나 위기, 혹은 사업 방향성이나 신사업에 대한 정보들, 재무 관련 정보들을 구성원들에게 공유할지 말지 고민할 때 들려오는 말이다. 당연히 안건의 경중과 대외비 여부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나는 웬만하면 구성원에게 투명히 공유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회사 자체에 대한 여러 정보들을 통제하기 시작하면 이런 문제가 발생한다.


"야, 이번에 ~라던데 너 아는 거 있어?"
"뭐? 처음 듣는데?"
"아씨 뭐 어떻게 되는 거지..."
"몰라, 알아서 하겠지"



#2 알아서 하겠지


회사의 정보들이 통제되면 구성원의 소속감이 사라지고 동기부여가 떨어지며 구성원들이 경영진과 근로자를 분리해서 생각하게 된다. 자기가 속한 조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소속감이 점차 줄어든다. 구성원들은 자기가 정보에 접근할 권한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마음의 벽도 생긴다. 또 자기가 속한 조직이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니 일에서 느끼는 보람도 줄어든다. 자연스레 자신은 그냥 근로자일 뿐이라고 자기 위로하게 된다. 그때부터 조직과 자신을 분리하여 경영진과 대립하는 마음이 자리잡기 시작한다.


여기서 경영진들이 착각하기 쉬운 게,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정보이고 구성원이 알 필요 없다고 생각한 정보일지라도 그것을 공유하지 않으면 구성원은 소외감을 느낀다는 거다. 왜냐하면 구성원들은 그 정보가 뭔지를 아예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에 그게 중요한지 아닌지도 판단할 수가 없다. 단지 자신이 정보를 공유받지 못하는 위치에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될 뿐이다. 하지만 경영진 입장에서는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정보인데 왜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냐”고 생각하기 쉽다. 경영진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실제로 별 거 아닌 정보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받아들이는 구성원 입장에서는 아니라는 거다. 



#3 ~하는 게 이해가 안 된다.


구성원의 입에서 회사의 결정에 대해 “이해가 안 된다”는 말이 슬쩍 튀어나올 때가 있다. 동료들과 별로 시답잖은 얘기를 나누다가 “근데 나는 좀 이해가 안 된다. ~하는 게 맞지 않나?”라는 식으로 회사의 방향성에 대해 자기 생각을 말할 때가 있다.


이는 세 가지 문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1) 방향성이 제대로 공유되고 있지 않다.


의사결정권자와 실무자가 쌍방향으로 소통이 자유롭게 이루어지고 있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프로젝트를 왜 해야 하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채로 업무 지시만 내리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때 문제가 생긴다. 실무자는 일의 배경을 잘 모르니까 엉뚱한 방향으로 작업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고 CEO나 팀장이 나중에 확인해보니 “이거 왜 이렇게 했어”하고 뒤집어 엎게 되기도 한다.


특히 회사의 방향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이해가 안 된다”라고 표현했다는 건 그야말로 소통이 안 된다는 걸 말한다. 만약 제대로 소통이 이루어졌다면 적어도 상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이해했으나 동의하지 않는다고 얘기할 것이다. 그러나 말 자체가 통하질 않거나 말을 나누지도 않으니까 ‘이해가 안 된다’고 표현하는 걸지도 모른다.


즉, 이 문제는 소통의 문제다. 그냥 직원 한 명을 설득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소통 방식이나 구조에 문제가 없는지 살펴봐야 한다. 다른 팀원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2) 당사자의 동기부여 수준이 굉장히 낮아진다.


방향성에 공감을 못하는 사람은 당연히 동기부여 수준이 떨어진다. 대체 왜 이 방향으로 일을 해야 하는지 납득을 못하기 때문에 자기가 하는 일이 가치 있다고 느끼지도 않는다. 자기가 생각할 때는 다른 방향으로 가야 하는데 이해도 안 되는 방향으로 일을 하고 있으니 답답해지는 것이다. 이 사람은 이 문제가 계속 납득되지 않으면 금방 회사를 떠날지도 모른다. 


3) 주변 동료들에게 악영향을 끼친다.


공통의 목표를 추구하고 한창 달려도 모자랄 때에 서로 추구하는 방향이 각기 다르고, 그런 상태가 지속되면 당연히 열심히 일하던 사람들도 영향을 받는다. 한창 뛰고 있는데 옆사람이 자꾸 “이 방향 틀린 거 같다”고 얘기하면 달리기에 집중이 되겠는가? 그래서 회사의 방향성이나 현황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공통의 목표를 추구하는 게 중요하다. 



#4 이거 누가 말했었지? or 너가 말했었잖아 or 내가 말했었잖아


이 표현은 본능적으로 사람에게서 책임 소재를 따지는 표현이다. 이는 심리적 안전을 굉장히 무너트리는 표현 방식이 된다. 의도는 그게 아니었을지라도 표현 자체가 그런 영향을 끼친다.  


이거 누가 말했었지? = 누구야, 책임져

너가 말했었잖아 = 너가 책임져

내가 말했었잖아 = 내 책임 아니야


예를 들어 기능 A를 추가했더니 중대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거 누가 넣자고 했었지?”라고 묻는 상황이 있겠다. 분명히 먼 옛날에 회의를 통해 결정했을 내용임에도 공통의 합의된 결정사항이 아니라 의견을 발의한 개인에게 책임을 넘기는 듯한 모양새가 되어버린다. 단 한 번의 발언으로도 구성원들(특히 직급이나 자신감이 낮은 구성원들)은 의견을 내기 두려워하고 껄끄러워하게 된다.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원인을 사람에게서 찾으면 해결책을 찾기가 어려워진다. 사람이 하루아침에 백팔십도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회사에 사람이 한두 명만 있는 것도 아니다. 다른 누군가가 얼마든지 비슷한 실수를 할 수도 있다. 자꾸 문제 원인을 사람에게서 찾으면 결국에 해답은 그 사람을 내보내는 것밖에 없게 된다. 정작 의사소통 방식이나 체계가 엉망임에도 문제 원인을 사람에게서 찾은 탓에, 같은 문제가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 다만 그것을 밖으로 표현하지 않는 사람들만 조직에 남아있게 될 뿐이다. 



#5 다들 너무 바빠서… 다들 너무 바쁘니까…


글의 도입부에서 얘기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서로 소통이 제대로 안 되는 상황이다. 만약 구성원 중 누군가 이런 말을 한다면 등줄기에 소름이 돋아야 옳다. 아마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다음과 같은 상황이 수백 번씩 반복되고 있을 것이다.  


A한테 물어볼 게 있는데 바빠 보여서 그냥 혼자 한참 찾아본다. (보통 자기가 몇 분이나 걸려서 찾아보는지 인지조차 못한다)

A한테 요청할 게 있는데 바빠 보여서 그냥 미루고 있는다. 나중에 물어봐야지 한다. 실제로는 A가 충분히 처리할 여력이 되는데 그걸 모른다. 결과적으로 10분이면 끝날 일을 다음 날 끝낸다. 이런 바보 같은 일이 쌓여서 전체 납기일이 조금씩 늦어지는 걸 아무도 모른다.

누구한테 의견을 구하고 싶은데 다들 바빠 보여서 그냥 혼자 고민한다. 알고 보니 다른 팀에서 이미 처리한 일이다. 똑같은 일을 멍청하게 다른 팀에서 똑같이 하고 있다. 이미 누가 한 일을 다른 팀에서 또 하고 있다. 이런 일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셀 수도 없다.


이런 경우엔 업무량 문제가 아닌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일이 많고 적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저들 모두의 일을 줄여준다고 해서 소통이 늘어나는 건 아니다. 신기한 일이다.


나는 이게 그냥 실무자들의 일반적인 특징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인간의 본성에 가깝다. 원래 대부분의 직장인은 그런 것이다. 자기가 맡은 일에 몰입하고 집중해서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다 보면 다른 팀원들한테 부담스럽게 말을 걸거나 도움을 청하려고 하지 않는다. 선천적으로 도움을 잘 요청하는 사람이거나, 후천적으로 연습한 게 아니라면 대개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이럴 땐 그들 마음가짐을 바꾸려고 들면 효과가 없다. “안 바쁘니까 편하게 얘기하세요”, “좀 더 소통을 많이 하세요”, “부담 갖지 마세요”라고 얘기해봤자 안 변한다는 뜻이다. 내가 경험한 방법 중에선 제도적으로 업무 접점을 늘려버리는 게 나았다. 우리 동료들에게서 배운 방식이다. 



 공동 작업 시간  

서로 다른 업무를 하더라도 모여서 일하는 시간을 갖는다. 정해진 시간에 모여서 같이 일한다. 원격 근무하는 사람은 Zoom으로 참여해도 상관없다. 그 시간은 딱 정해진 시간이기 때문에 “바빠 보여서 말을 못 걸었다”는 부담을 느낄 필요가 없다.


 공동 작업 문서  

아예 A라는 팀원과 B라는 팀원이 같이 업데이트할 문서를 만들어버린다. 예를 들어 디자인팀에서도 고객 테스트를 하고, 영업 팀에서도 고객 테스트를 한다면 고객 리스트라던지 테스트 기록을 적어두는 공동 작업 문서를 만든다. 그러면 알아서 협업하게 된다.


 팀 체제  

형식적인 팀일 뿐이라도 서로 다른 팀이라면 소통이 줄어든다. 의도적으로 소통을 늘리고 싶다면 팀으로 묶어버리는 게 효과적이다.





기원을 찾아서


고작 한 개인을 분석한다고 사회 현상을 이해할 수 있을까?
고작 작은 교실 안의 문제를 관찰한다고 해서 한국 교육의 문제를 설명해낼 수 있을까?

내가 조직 구조나 문화에 관심 갖게 된 건 교육 문제 때문이다. 내가 겪은 교실 안의 문제들이 너무 짜증 나서 교육 문제를 공부하기 시작했다가 사회학을 전공하게 됐다. 왜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하고 싶은 일을 참고 수능 공부나 먼저 하라는 걸까? 왜 정답을 잘 맞혀서 높은 점수를 받고 좋은 대학에 가야 하나? 그런 문제의식으로 출발했다.


고작 시험 문제 하나를 푸는 것에도 대한민국의 교육 구조적 문제가 숨어 있었다. 점수 우열을 가리기 위해 억지로 비꼬아낸 영어 문제 안에는 무엇이 숨어있는가? 대학 학벌주의와 자본주의가 들어 있다. 대학 서열이 사회경제적 지위와 직결되고, 물질적 조건이 인간다운 삶보다 우선하기 때문에 교육이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이게 비단 교육만의 문제인가? 해법을 교육에서만 찾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개인의 말과 행동, 생각을 개인의 것으로만 보는 건 어리석다. 영화 조커가 인기를 끌었다. 왜냐? 개인의 말과 행동의 이면에 어떤 사회적 배경이 있는지 고려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요즘은 드라마 속 빌런들도 사연이 있다. 왜냐? 개인 속에 숨은 전체를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자연은 프랙탈 구조다. 전체와 부분이 비슷하게 생겼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거시와 미시를 모두 보아야 하고, 둘은 비슷한 점이 많다. 



정답은 없다? 



당연히 정답은 없다. 하지만 나는 마치 내가 아는 게 전부인 것처럼 말한다. 진짜로 내가 아는 게 전부라서 생각해서 그러는가? 아니다. 그래야 나아갈 수 있기 때문에 말할 뿐이다.


상대주의와 허무주의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상대주의란 세상에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는 생각이다. 달이 지구 주위를 도는 것인지 지구가 달 주위를 도는 것인지는 상대적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게 절대적으로 옳다고 확답할 수 없다. 즉, 상대주의 안에서 ‘절대적인 진리’라는 건 누구도 주장할 수 없다.


하지만 이는 허무주의와 다르다. 허무주의는 모든 논의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누구도 진짜 옳은 게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으니 논리상으로는 개나 소나 자신이 옳다고 말할 수 있다. 소아성애자나 시체를 사랑하는 사람들도 자신이 옳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식의 상대주의에서는 논의가 무슨 소용인가? 아무도 정답을 가려낼 수 없다.


그런 식으로는 절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논의를 진전시키려면 상대주의는 ‘전제’가 되어야 한다. ‘내가 틀릴 수도 있지만 정답에 가까운 것을 찾아나가겠다’, ‘진리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조건 안에서 더 나은 것, 더 옳은 것을 한 번 찾아보겠다’라고. 나는 그게 실존주의라고 생각한다.


모든 인간은 현실의 조건 안에서 생각한다. 그 누구도 자신이 태어난 시대나 공간, 문화, 환경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다고 인간은 진리에 도달할 수 없는가? 실제로 도달할 수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인간은 애초에 아무것도 아닌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진리에 가까운 것을 찾아나감으로써 인간다움을 만들어왔다. 그러니까 진리는 뭔지 모를 지라도 그 시대에 진리에 가장 가깝다고 여겨지는 ‘시대정신’은 찾아나갈 수 있다. 현실의 땅을 딛고 말이다.


정답은 없는가? 모른다. 모르지만 인간은 인간다움을 스스로 찾고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인간이다. 정말로 정답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자신이 생각하는 답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논의를 이어갈 수 있다. 그게 실제로는 틀릴 수도 있지만 그것을 전제하고 다음 논의를 진행해야 한다. 난 내가 여러 가지를 마치 다 아는 것처럼 정답인 것처럼 얘기하지만 내가 진짜로 뭘 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수없이 그런 얘기들을 들어왔다. 너가 Exit이라도 해봤냐, 어떻게 창업 교육을 하냐. 너가 전문가도 아닌데 왜 뭐라도 되는 것처럼 브런치에 글을 쓰냐. 회사 안에서 내 경험이나 노하우를 늘어놓아도 비슷한 공격을 받는다. 사람들은 누구보다 정답을 원한다. 그리고 자격을 따진다. 마치 교실 안에서 정답을 얘기할 수 있는 건 오직 ‘선생님’ 뿐인 것처럼 말이다.


대한민국은 정답 맞히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정말로 정답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자기 답을 말하는 데에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한 명의 대단한 전문가만 떠드는 사회보다, 모든 사람이 허튼소리라 할지라도 자기 경험을 공유하는 사회가 더 낫다고 생각한다. 마을에서 족장이 죽으라 하면 죽는 주술적인 사회가 낫겠는가, 주민 A가 예쁘게 생긴 버섯을 먹었더니 일주일을 앓아누웠더라는 얘기를 동네방네 알려주는 사회가 낫겠는가?? 그런데 놀랍게도 직장에서도, 교실에서도, 브런치에서도, 사회에서도, 방방곡곡에서도 서로 눈치만 보고 누가 정답을 얘기해주기만 기다리고 있다.


더 나쁜 건, 누군가 손 들고 ‘아는 체’했을 때 손가락질하는 거다. 자기 경험과 노하우를 나누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다른 사람이 입을 열 때 ‘왜 아는 체냐’하는 게 더 문제다. 사일로 현상이 어디서 시작되느냐?? 이런 작은 생각들에서 시작된다.


대체 누가 전문가인지는 모르겠지만 모두가 전문가 입모양만 쳐다보고 있는 시장이 싫다. 실리콘밸리에서 뭘 한대! 우와 정말 최고의 조직 문화야! 마치 선생님이 정답을 말해주기만을 기다리고 모두가 숨 참고 있다가, 정답이 나오면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라고 소리 지르는 아이들처럼 말이다. 누가 자기 의견을 말하면 싸늘한 눈초리로 쳐다보면서 “왜 나대는 거야”하는 아이들처럼 말이다.


정답은 없다.

그렇다면 자기 생각을 말하라. 정답이 아니어도 상관없으니까.


어쨌든, 내가 어떻게 조직과 사회를 분석하는지 한 번 풀어보고 싶었다. 단편적인 말과 행동, 현상에서 출발하여 원리를 분석하고 체계를 잡고 상황에 맞는 해결책을 찾고 있다. 사람의 작은 생각을 바꾸는 건 세상을 바꾸는 일과 다르지 않다고 믿는다. 작은 조직을 바꾸는 것도 사회를 바꾸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사회는 어떻게 변하는가? 그냥 그게 궁금하고, 웬만하면 좀 바꾸고 싶다.  




유디V님이 브런치에 게재한 글을 편집한 뒤 모비인사이드에서 한 번 더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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