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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biinside Feb 14. 2024

모든 것이 홍대 옥탑방에서 시작되었다


"너 웹툰 좋아하니?"
옆에 있던 지인의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아니요” 

화제전환을 기대했는데 또 다른 질문이 이어졌다.


“그럼 애니메이션은?” 

이번에는 대답에 신중을 기했다. 어쩌면 내 입에서 수긍하는 답이 나오기 전까지 질문이 이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출제자의 의도를 신속하게 파악하는 게 핵심이다.


“최근 픽사의 스토리텔링이라는 책을 흥미롭게 읽었어요. 애니메이션이라는 게 단순하게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제작하는 게 아니더라고요.” 지인이 내가 만족할만한 답을 했는지 다른 장르를 물어보지 않았다. 대신 다른 질문을 했다.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운영하시는 분을 아는데 한번 만나볼래?”




그렇게 며칠 뒤 이번 생에서는 예정에 없던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런데 사무실이 범상치 않았다. 사무실 곳곳에 독특한 인테리어는 물론이고 책상 위에 권총(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스케치를 위한 소품)도 있었다. 나이키의 전 CMO 그레그 호프만이 쓴 ‘영혼의 설계자’라는 책에서 ‘공간에 감정이 없으면 창의력이 발휘되지 않는다’고 했었다. 그 책에서 말한 공간이 이런 곳일까?


마침내 마주한 이곳의 창업자는 애니메이션 산업의 활발함과 긍정성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는 침착하고 진지한 태도로 자신의 삶을 들려주었다. 그는 대학에 가지 않고 군대에 갔고, 기업에 취업하는 대신 동대문시장에서 사설 경비로 일했다. 그러다가 뒤늦게 대학에 진학하여 애니메이션을 전공했고, 그 끝에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설립했다. 자칫 불편하고 숨기고 싶을 수 있는 이야기를 그는 덤덤하게 풀어냈다.

한참 회고를 하던 중 내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오늘 말씀드린 내용을 글로 쓰시게 된다면, 과장하거나 미화하지 말아 주세요.”


도대체 그는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일까? 나는 궁금증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의 이야기를 더 듣기로 했다.






만화에 빠져 살던 소년 


따스한 오월의 햇살이 가득한 어느 교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왁자지껄한 무리 옆 유독 무엇인가에 열중하고 있는 한 아이가 있었다. 그는 교과서 한쪽 여백에 자그마하게 그림을 그리고는 지우고 다시 그리기를 반복하였다. 잠시 후,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페이지를 넘기더니 다시 같은 위치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또래 친구들과 공놀이하거나 장난치는 것보다 책 끝에 그리는 그림이 더 흥미로웠다. 한참을 그렇게 몰두하다가 교과서를 덮었다. 그가 책장을 빠르게 넘기자 책 모서리의 그림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흠뻑 빠져있던 것은 ‘플립북 애니메이션’이었다. 플립북은 애니메이션의 원리인 시각의 지속성을 이용한다. 시각의 지속성이란 빛이 눈에 들어오고 나서도 뇌에서 잠깐 그 영상을 유지하는 현상을 말한다. 여러 장의 연속된 그림을 빠르게 보여주면 뇌는 그 영상들을 하나로 합쳐서 움직이는 것처럼 인식한다. 지금은 당당히 작품으로 인정받아 플립북만을 위한 공모전도 있지만 예전에는 책을 이용한 놀이에 불과했다.


소년은 ‘둘리’나 ‘달려라 하니’와 같은 국산 만화도 놓치지 않고 시청했다. TV에서 만화를 방영할 때면 너무 집중한 나머지 저녁 먹으라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일요일 아침 8시에는 KBS에서 방영하는 ‘디즈니 만화동산’은 그에게 아침 식사보다 더 신성하게 지켜야 하는 일과였다. 행여나 TV 소리에 전날 늦게까지 식당을 운영하고 쉬시는 부모님이 깨실까 두려워 TV 위에 이불을 걸치고 빛과 소리를 완벽하게 새어나가지 않도록 했다.



중학생이 되어서도 그의 만화에 대한 애정은 계속되었다. 책가방에는 교과서보다 만화책이 더 많았다. 부모님은 교과서를 붙들고 공부해도 모자랄 판에 만화책만 들고 사는 아들이 걱정되었다. 그런 그가 고등학교 때 손에 쥐고 있던 만화책을 놓게 하는 새로운 문물이 등장했다. 바로 ‘스타크래프트’였다. 피시방이 동네 곳곳에 생겨나고 가정에는 모뎀을 이용한 인터넷이 보급되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 수학능력 평가를 집중적으로 대비해도 시간이 부족한데 수업 끝나면 피시방에 가기 바빴다. 하루는 담임 선생님이 그를 정신 차리게 하겠다고 100대 넘게 체벌을 한 적이 있다.


“너 이 자식, 대학을 코 앞에 두고도 정신을 못 차려?”


교복에 피가 묻어날 정도로 심각하게 매를 맞았다. 하지만 그는 선생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담임선생님이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잡아주려고 한 것이 선생님의 진심일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그의 학창 시절은 만화와 PC게임으로 가득한 채로 흘러갔다. 골드프레임을 창업한 금동호 대표의 이야기다.


금동호 대표, ⓒ골드프레임







만화보다 혹독하고 가혹했던 현실 


만화와 PC게임에 빠져 살던 금동호 대표는 그의 바람대로 대학교에 진학하지 않았다. 친구들이 모두 대학교에 입학하고 대기업 취업을 꿈꾸며 캠퍼스 라이프를 즐길 무렵 그는 군에 입대하였다. 굳이 관심이 없는 학업을 이어가겠다고 학비로 부모님에게 부담을 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 차라리 하루라도 사회생활을 빨리 시작하는 것이 더 나을 거야.’ 


그가 군복무를 하던 중 부모님은 서울에서 운영하던 식당을 정리하고 고향인 경상북도 봉화군으로 귀농하셨다. 그렇게 제대 후 그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독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모아둔 돈도 없고 다른 경제적 기반도 없었다.


돈이 필요했던 그는 동대문 여성복 상가에서 사설 경비 직원으로 일을 시작했다. 시급은 높은 편이었지만 일은 힘들고 위험했다. 동대문 상가 상인들은 거칠고 현찰이 오가는 곳이라 자잘한 사건들이 끊이지 않았다. 격일 근무로 하루는 24시간 일하고, 그다음 날은 24시간 쉬는 패턴은 그를 점차적으로 정신적, 육체적으로 지치게 했다.


ⓒ(사)동대문패션타운관광특구협의회


한 번은 난동 피우는 손님이 있었다. 그를 제지하겠다고 건물 밖으로 밀쳤는데 경미한 찰과상을 입어 경찰까지 출동하였다.


“가해자분께서는 경찰서로 함께 이동해 주시겠습니까?”


그렇게 한밤중에 경찰서까지 다녀오게 되었다. 다행히 난동 피운 손님의 과실도 있어서 그날 밤 바로 풀려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일을 겪으며 그는 현재의 일이 결코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생각에 그만두었다. 그 후 탑차를 운전하며 간신히 생활비를 마련할 수 있었지만, 하루 벌어 하루 사는 것이 전부였다. 바로 그때 고등학교 시절 담임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동호야, 사람대접받으려면 대학은 나와야 한다.”






토토로가 심어준 애니메이션에 대한 열망


선생님 말씀처럼 그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학벌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실히 느꼈다. 연인을 만들 때도, 친구를 사귈 때도, 직장에서 일할 때도, 그에게 던져지는 첫 번째 질문은 항상 같았다.


“어느 대학 나오셨어요?”


고졸이었던 그는 이 질문에 대답하는 게 불편했다. 고민 끝에 이제라도 대학에 진학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인생의 전환점이 될 영화를 보았다.


그 영화는 산골짜기에 살아가는 한 자매가 숲 속의 신비한 정령들과 우정을 나누는 이야기였다. 영화의 제목은 ‘토토로’였고, 감독은 미야자키 하야오였다. 그는 어릴 적 심취했던 만화 영화의 감동을 다시 느꼈다. 영화를 보고 나서 그는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대학에 가서 애니메이션을 배우겠어.’


ⓒ Studio Ghibli


그는 회사에서 제공하는 특별전형으로 애니메이션 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대학 생활은 쉽지 않았다. 입시를 전문적으로 준비한 동기들보다 나이는 많고, 그림 실력은 부족했다. 문제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직장생활을 하다가 대학을 진학하였던 그는 생활비와 학비를 스스로 벌어야 했다. 홍대역 근처 식당에서 주방 아르바이트를 했다. 수업이 끝나면 저녁부터 새벽까지 일하고, 과제 기간에는 잠을 아예 포기했다. 정말 견디기 힘들 때는 찜질방에서 잠시 눈을 붙이는 것이 전부였다.


1학년 때는 아르바이트와 학업이 병행이 가능했지만 2학년 때는 애니메이션 전문 학원에 다녀야 했다. 당시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기술이라서 전문 학원이 아니면 다른 방도가 없었다. 늦은 나이에 공부하겠다고 대학에 간 아들이 기특했는지 경상북도 지방에 계신 부모님이 한 학기 등록금을 지원해 주었다. 비록 남들보다 시작은 늦었지만, 오직 근성으로 차이를 극복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눈여겨보던 학원 선생님의 추천으로 애니메이션 회사에 취업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 결과가 새로운 가능성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며 더 큰 꿈을 꾸기 시작했다.






입사하는 곳마다 연이은 폐업


‘뽀로로’와 ‘로보카 폴리’와 같은 히트작을 목격하고 나서 애니메이션 회사가 쏟아져 나온 시기가 있었다. 국내 애니메이션과 캐릭터산업은 뽀로로의 출현 전후로 구분된다고 평가될 정도였다. 2012년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뽀로로의 브랜드 가치는 8천억 원, 취업 유발효과는 4만 3천여 명, 경제효과는 5조 7천억 원에 달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코드 스튜디오라는 작은 애니메이션 회사에서 일을 시작한 금동호 대표는 기적과도 같은 기회를 잡았다. 세계적인 어린이 애니메이션 채널인 니켈로디언과 손잡고 작품을 제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니켈로디언은 다양한 애니메이션, 드라마, 게임 쇼 등을 방송하는 미국의 채널로, 오랜 전통과 체계를 갖춘 곳이었다. 그는 니켈로디언과 협업하면서 애니메이션 제작의 비법과 노하우를 짧은 시간 안에 습득할 수 있었다.


 

그는 니켈로디언과 함께 한 프로젝트에서 3D 애니메이터로 활약했다. 3D 애니메이터는 컴퓨터를 통해 캐릭터나 개체에 생명을 불어넣는 아티스트였다. 3D 애니메이터는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 괴물, 로봇 등 다양한 캐릭터를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했다. 실사 영화에서 3D 애니메이터는 연기자이자 촬영 감독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운명은 잔인했다. 프로젝트는 갑작스럽게 취소되었고, 그의 역할도 사라졌다. 그는 회사를 떠나야 했다. 그 후 그는 여러 애니메이션 회사를 전전했지만 업계의 상황은 좋아지지 않았다. 제2의 뽀로로를 꿈꾸며 시작했던 작은 기업들은 대부분 생존하지 못하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






골드프레임의 시작


취업하는 회사마다 연달아 폐업을 하였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애니메이션 팀장으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프리랜서로 경력을 이어갔다. 애니메이션 프로젝트를 수주받아 다른 프리랜서들과 협업하고, 홍보나 캠페인 영상도 제작하는 등 다양한 일을 맡았다. 그는 1인 기업의 대표로서 모든 일을 책임지고, 때로는 밤을 새워 작업에 몰두했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수주받은 일만 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지금처럼 남의 일만 하다가는 절대 우리의 작품은 없을 거야. 우리가 직접 기획한 캐릭터로 콘텐츠를 만들자.”


그의 진심과 열정은 동료들에게 전달되었고, 그들은 2013년에 시작한 개인사업을 2017년에 법인으로 전환하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골드프레임이 탄생했다.




하지만 법인회사를 운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금동호 대표는 회사 생활 경력이 길지 않았고, 그마저도 주로 애니메이션 작업에만 집중했던 애니메이터였다. 회사 운영에 필요한 지식과 능력이 부족했고, 어려움이 많았다. 하지만 그와 동료들은 자체 캐릭터 사업을 위해 힘을 합쳐야 한다고 믿었다.


창업과 함께 결혼식을 올린 금동호 대표는 신혼집을 구할 돈이 없었다. 우연히 얻게 된 사무실은 단독 주택을 개조한 곳이었는데, 그곳의 일부를 신혼집으로 사용했다. 새신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사업자등록 후 회사 명함을 들고 영업하면서도, 골드프레임이 작은 회사라는 것은 숨기고 싶었다. 그런 회사를 신뢰하고 일을 맡길 리가 없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사무실 주소가 홍대라는 것이 도움이 되었다. 다들 설마 그게 주택을 개조하여 신혼집까지 있는 사무실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게 부족한 환경에서도 금동호 대표와 동료들은 매일 새로운 도전에 부딪혔지만 수주액만큼 맷집도 늘어났다.






늘어나는 일감과 함께 밀려온 혼란 


넷플릭스의 ‘라바 아일랜드’는 애니메이션 산업의 히트작이었다. 그리고 그 작품의 애니메이션 슈퍼바이저가 금동호 대표였다. 그는 제작사를 떠나 독립한 이후에도, 시즌 2부터 시즌 4까지 점점 더 많은 역할을 맡았다. 시즌 4에서는 애니메이션 파트를 모두 담당하며, 애니메이션 ‘라바’ 시리즈의 중요한 파트너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성공에 자부심을 느끼면서도, 자신의 회사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였다.


애초의 회사 설립 목적은 동료들과 자체 캐릭터 콘텐츠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외주 일에 바쁘게 몰두하다 보니, 골드프레임의 대표 콘텐츠를 만들기 위한 시간과 자원이 부족했다.


“우리가 원하던 것이 안정이었나? 우리만의 콘텐츠를 세상에 선보이겠다던 계획은 어떻게 되었지?”


ⓒ골드프레임


고민 끝에 그는 원래의 계획대로 자체 애니메이션 콘텐츠 기획에 더욱 몰두했다. 애니메이션은 기획 단계에서 트레일러 영상이 중요하다. 트레일러 영상은 애니메이션 작품의 내용과 분위기를 미리 보여주는 예고편이다. 이것은 투자사나 배급사와 계약을 맺을 때 필수적인 요소이다.


하지만 트레일러 영상을 제작하는 데에는 통상 2~3억 정도의 비용이 든다. 그는 이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한국 콘텐츠진흥원의 지원금을 신청했지만, 탈락했다. 다시 광주 진흥원에 도전했고, 드디어 일억 원의 지원금을 받게 되었다. 이를 기회로 삼아 골드프레임의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에블리’ 시리즈의 기획을 완성했다. 하지만 그는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갑작스러운 위기가 찾아왔다.






골드프레임에 닥친 위기의 서막


애니메이션 회사 골드프레임은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에블리’ 시리즈를 기획했지만, 순조로울 것으로 기대했던 투자사의 후속 투자 유치가 미뤄졌다. 기획 단계에 들인 투자금은 결국 빚으로 변하고, 이자는 점점 쌓여만 갔다. 새로운 투자사를 찾기 위해 노력했으나, 그들과 비전을 공유할 수 있는 파트너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애니메이션 투자사를 찾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애니메이션 제작은 많은 시간과 비용이 소모되는 작업이다. 투자사는 애니메이션의 수익성과 시장성을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 그러나 애니메이션은 예술적인 요소와 기술적인 요소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어서 투자사의 관점에서는 평가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둘째, 애니메이션은 감독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감독의 비전과 스타일을 투자사가 이해하고 공감하기란 쉽지 않다.


ⓒ골드프레임


마지막으로 애니메이션 산업은 국내외에서 경쟁이 치열하고 변화가 빠른 분야이다. 한국의 애니메이션 산업은 일본과 미국에 비해 역사와 규모가 작다. 또한 물가와 임금은 계속 상승하면서 애니메이션 제작비용은 부담이 커졌다. 한편, 국내에서는 국산 애니메이션에 대한 수요와 인식이 낮아서 시장 확대가 어려운 상황이다.


그 결과 동료들과 함께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콘텐츠를 기획하는 데 쏟은 노력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금동호 대표는 골드프레임의 비전에 공감하여 합류한 구성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다. 야속하게도 위기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라바 아일랜드’ 프로젝트 수주 이후, 골드프레임은 규모 있는 프로젝트를 꾸준히 수주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은 수억 원의 빚을 짊어지게 되었다.






구원투수의 등판과 시장의 재정의


비록 위기에 처했지만, 골드프레임은 여전히 자체 콘텐츠를 세상에 선보이겠다는 꿈을 놓지 않았다.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해외 시장의 물꼬를 틀어줄 강력한 파트너가 필요했다. 그때 운명처럼 마주친 것이 위지윅스튜디오였다. 위지윅스튜디오는 2018년 상장 이후 M&A를 통해 토털 콘텐츠 제작그룹으로 성장했다. 그들은 영화, 드라마, 미디어, 공연, 전시 등 다양한 콘텐츠 분야에서 국내 최고의 전문기업으로 자리 잡았다.


그들은 글로벌 콘텐츠 시장의 리딩 컴퍼니로 도약하겠다는 포부로 애니메이션 분야의 파트너를 찾고 있었다. 골드프레임과 위지윅스튜디오는 서로의 비전과 이익이 일치했고, 골드프레임은 위지윅스튜디오의 투자를 받아 새로운 도약을 준비했다.


2023년 확장이전한 사무실, Ⓒ골드프레임


골드프레임은 위지윅스튜디오와의 협력으로 새로운 콘텐츠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위지윅스튜디오 역시 2021년 컴투스그룹에 합류하면서 컴투스그룹의 강력한 자본과 네트워크의 지원을 받았다. 그 덕분에 2022년 한 해 동안 9개 기업에 약 400억 원의 투자를 하며 콘텐츠 시장의 주요 플레이어로 등극했다. 골드프레임은 위지윅스튜디오에 이어 컴투스그룹과의 협력 관계를 통해 업에 대한 더 넓은 시야와 더 높은 비전을 갖게 되었다.  






새로운 시도와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


그런 생각 전환의 결과물 중 하나가 바로 ‘생존스쿨 촉망고’였다. 당시 방영권 수익보다 유튜브 수익이 더 커질 시기였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은 유아 정책으로 인해 키즈 관련 분야는 광고가 적어 수익이 낮았다. 골드프레임은 어떻게 하면 유튜브에서 성공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 한 직원이 다소 생뚱맞은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우리가 지금까지 시도해 본 적 없는 병맛 콘텐츠를 만들어보면 어떨까요?


“그리고 채널은 최근 떠오르는 틱톡이 좋을 것 같아요.”




생존스쿨 촉망고, ⓒ골드프레임


그렇게 설마 하는 마음으로 틱톡에서 ‘생존스쿨 촉망고’ 연재를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기회비용을 최소화할 목적으로 아이디어를 제안한 한 구성원만 배정했다. 제작 시간과 비용을 줄이기 위해 부득이 전문 성우 대신 TTS(Text-to-speech, 텍스트 음성 변환) 서비스를 활용했다.


이 덕분에 혼자서도 일주일에 콘텐츠 한 편씩 틱톡에 올릴 수 있는 생산력을 확보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조회수가 수십만을 기록하였다. 당시 당사자뿐만 아니라 다른 팀 구성원들도 모두 깜짝 놀랐다. 조회수 폭발의 원인은 바로 틱톡 추천 콘텐츠 선정이었고, 댓글에서는 유쾌하고 신선한 반응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골드프레임은 관객의 반응을 얻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시간과 비용이 필요하다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조금 더 모험적인 콘텐츠 스튜디오로 진화했다.


촉망스튜디오몰, ⓒ골드프레임


이러한 변화의 일환으로 골드프레임은 유튜브 채널을 개설하여 창의적이고 개성 있는 콘텐츠를 선보였다. 특히 ‘생존스쿨 촉망고’는 구독자가 가파르게 늘며 28만을 넘어섰다. 이제는 단순히 콘텐츠에서 그치지 않고 ‘생존스쿨 촉망고’ IP(지적재산권)를 활용한 다양한 상품을 제작하여 현재 촉망고 전용 촉망스튜디오몰을 운영 중이다.


또한, 2024년부터 카카오페이지를 통해 촉망고 웹툰이 연재를 시작했다. 촉망고 제작팀은 오래전 ‘생존스쿨 촉망고’가 언젠가 극장 스크린이나 TV에서 더 많은 관객들에게 선보이는 꿈이 점차 현실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꼈다. 시장의 반응을 끌어낸 IP 하나가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생존스쿨 촉망고, ⓒ카카오페이지






모든 것이 홍대의 옥탑방에서 시작되었다


지금 세계는 한국이 만든 콘텐츠에 열광하고 있다. 전 세계 94개국에서 넷플릭스 1위를 차지한 <오징어 게임>, 아카데미상 4관왕을 수상한 영화 <기생충>과 같은 작품들은 한국 콘텐츠의 위상을 높였다. 그들의 성공 비결은 무엇일까?


바로 독창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스토리텔링이 돋보이는 콘텐츠였다. 또한 넷플릭스와 같은 글로벌 플랫폼을 통해 세계인들이 손쉽게 이들의 작품을 경험할 수 있게 된 것도 중요한 요인이다.


Ⓒ골드프레임


골드프레임은 이러한 트렌드에 맞춰 자체 콘텐츠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그들은 스토리를 애니메이션의 영혼이자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스토리는 애니메이션의 목적과 방향을 정하고, 캐릭터와 세계관을 구축하고, 감정과 메시지를 전달한다. 덕분에 스토리가 풍부하고 흥미로운 애니메이션은 관객에게 즐거움과 감동을 주고, 관객으로 하여금 애니메이션에 몰입하고 공감할 수 있게 만든다.


지금도 골드프레임은 흥미로운 스토리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작고 큰 시도를 거듭하고 있다. 그들은 뚜렷한 색깔과 매력을 가진 그들만의 작품을 전 세계에 선보이고자 한다. 언젠가 관객들이 골드프레임의 작품을 보는 순간 이런 생각을 하길 바란다.


“이거 좀 골드프레임스러운 느낌이 물씬 나는데?”




ⓒ골드프레임



위대한 스토리텔러이자 혁신가인 월트 디즈니는 살아생전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모든 것이 생쥐 한 마리에서 시작되었다.”


그 생쥐는 미키마우스였다. 미키마우스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상징이자 마스코트로,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대중문화의 아이콘이다. 1928년 월트 디즈니와 어브 아이웍스가 처음 선보였으니 머지않아 100주년을 맞이한다. 슈퍼마리오는 1981년 동키콩이라는 아케이드 게임에서 처음 등장했다. 그리고 4년 후 1985년 슈퍼 마리오브라더스가 출시되면서 게임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제는 게임뿐만 아니라 영화와 만화와 장난감 등 다양한 매체에서 슈퍼마리오의 모험과 세계관을 느낄 수 있다.


골드프레임도 이런 위대한 스토리텔러들처럼 세상에 영원히 기억될 수 있는 캐릭터와 스토리를 꿈꾸고 있다. 이를 위해 다채롭고 창의적인 작품을 꾸준히 선보일 것이다. 토종 애니메이션 제작사로서의 자부심과 책임감을 갖고 글로벌 애니메이션 산업의 새로운 문을 열 것이다. 미래에는 사람들이 골드프레임에 대해 이렇게 얘기할 것이다.


“모든 것이 홍대 옥탑방에서 시작되었다.”  





해당 콘텐츠는 Jimmy Cho님과 모비인사이드의 파트너쉽으로 제공되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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