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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Dec 17. 2023

박용팔의 꿈

 비가 그치고, 눈이 내렸다. 집이 너무 추웠다. 작은 창으로 햇살이 비치기는 하는데 햇살이라기보단 그냥 열 없는 조명이었다. 용팔은 자기가 냉장고에 갇힌 생선 같다고 생각했다. 밖으로 나가면 오히려 따뜻할 것 같았다.


 용팔아아 노올자아아.


 친구 놈이 살얼음처럼 얇은 창에 자갈을 집어던지며 소리쳤다. 개놈의 자식, 문을 열고 들어오면 되는데 꼭 밖에서 지랄을 떨었다. 용팔은 내복 위에 또 내복을 입고 양말 위에 또 양말을 겹쳐 신은 뒤 골덴 바지에 스웨터를 입고 쌔무 잠바를 걸치고 밖에 나갈 준비를 했다. 출입문을 여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친구는 춥지도 않은지 얻어 입은 것처럼 손목 발목이 허옇게 드러나는 옷을 입고 있었다. 밤송이 같은 귀마개도 하나 했는데 볼따구가 얼다 녹다를 반복해서 얼룩이 졌다. 콧물이 입 주변의 땟국을 씻으며 질질 흘러내렸다.

 얼음땡 하자. 친구가 말했다.

 얼어 죽겠는데 뭔 얼음땡이야. 용팔이 농담처럼 말했다.

 눈싸움할까?

 다리 아퍼. 숨바꼭질하자. 용팔이 말했다.

 그래. 내가 술래!

 친구는 용팔의 의견도 묻지 않고 그대로 뒤돌아 손으로 눈을 가리고 전봇대에 이마를 기대고 섰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용팔은 아픈 다리를 끌며 숨을 곳을 찾았다. 지팡이를 저만치 한 번 툭 짚고 착착착착 다리를 네 번 움직였다. 툭, 착착착착. 다시 툭, 착착착착. 그렇게 한참 걷다 보니 피곤해졌다. 공원 벤치가 눈에 들어왔다. 용팔은 벤치 위에 쌓인 눈을 털 생각도 않고 그대로 깔고 앉았다. 친구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잠이 쏟아졌다. 용팔은 엉덩이 밑에서 눈이 녹아 얼얼할 지경인데 잠이 오는 게 희한하다고 생각했다.


 용팔아.


 굵고 다정한 목소리. 따뜻한 목소리가 들렸다. 용팔은 졸다가 눈을 떴다. 벌써 까만 밤이었다. 눈앞에는 해 같은 남자가 서 있었고 그 주변으로만 눈송이가 빛을 받아 반짝였다. 아버지였다. 아버지에게선 알싸한 담배 냄새가 났다.  

 집에 안 가고 뭐 하니. 아버지가 물었다.

 집에 아무도 없어서요.

 심심했구나.

 네.

 가자, 업어줄까?

 괜찮아요. 용팔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 아버지가 기특하다는 듯 용팔을 보고 웃었다.

 용팔은 저만치 멀어지는 아버지의 뒤를 쫓아갔다. 툭, 착착착착. 툭, 착착착착. 추위 탓인지 집에서 나올 때보다 돌아가는 길이 더 멀어 보였다. 허벅지 만한 들고양이가 용팔의 지팡이를 치고 지나가는 바람에 하마터면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한참 만에 집에 도착했다. 집은 연립주택 1층이었는데 용팔은 그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2층이나 3층이었다면 엉덩이로 기어 내려와야 했을 거야. 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집 안은 밤에 잡아먹혀서 까마득했는데 용팔은 부러 거실의 큰 불을 켜지 않고 현관의 작은 불만 켰다. 큰 불은 켜두면 너무 차가웠다. 신발을 벗는데 배가 아팠다. 요새는 배가 시도 때도 없이 아팠다. 심지어 나오려는 게 똥인지 오줌인지 구분도 되지 않았다. 무언가 갑자기 터져 나오려는 느낌이 들면 일단 변기에 앉아야 했다. 신발장에서 화장실까지 거리가 멀게만 느껴졌다. 툭, 착착착착. 툭, 착착착착. 용팔은 외투도 벗지 못하고 겨우 내복 바지만 내리고 변기에 앉았다. 서서 볼일을 보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서서 일을 본다니.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볼일을 마친 용팔은 휴지 두 장을 뜯어 밑을 닦고, 물을 내리고, 다시 두 장을 뜯어 밑을 닦았다. 일전에 휴지를 한 번에 많이 썼다가 변기가 막히는 바람에 아주 애를 먹은 일이 있었다. 요양보호사가 한숨을 쉬며 변기를 뚫는 걸 옆에서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는 계속 두 장씩 휴지를 끊어서 썼다. 용팔이 밑을 다 닦고 일어서려 하자 지팡이를 짚은 어깨에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또 어깨가 빠지려고 했다. 어릴 때 몇 번 빠진 이후로 젊었을 때는 근육이 붙어 잠잠하다가 나이를 많이 먹으면서 다시 빠지기 시작했다. 덜거덕 소리와 함께 지팡이를 쥔 손에서 힘이 빠졌다. 용팔은 열린 화장실 문 앞에 그대로 엉덩이를 까고 쓰러졌다. 넘어지고 나니 일어설 수가 없었다. 요양보호사가 오려면 아침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가만있다간 보일러도 못 틀어 빙판 같은 바닥에 밤새 엉덩이를 까고 엎드려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아찔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걸까. 살면서 턱없는 욕심을 부리거나 모험을 하진 않았는데 어느새 누렇고 새카만 가난이 방바닥에 들러붙어 있었다. 특별한 잘못을 해서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여자와는 원래 인연이 없었고 젊을 때 친했던 친구들은 일거리를 찾아 고향을 떴다. 몇몇 사람들은 죽었다. 그래서 그냥 지금의 모습이 된 것이었다. 잘못이 있다면 살아 있는 게 잘못이었다. 용팔은 아프지 않은 팔로 겨우 손에 닿는 집 전화의 수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잠시 고민했다. 엉덩이를 위로 향하는 게 나을까 아니면 반대로 뒤집고 있는 게 나을까. 그냥 엉덩이를 내보이고 있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숫자를 눌렀다.

 십여 분 뒤에 소방서에서 사람들이 왔다. 불 좀 켜겠습니다. 누군가 스위치를 눌렀고, 집이 환하게 밝아졌다. 용팔은 저항하지 못하고 발가벗겨지는 느낌에 낯이 확 뜨거워졌다. 사람들이 용팔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그러자 툭 하고 빠졌던 어깨가 솟으며 거짓말처럼 뼈가 맞춰졌다. 아픔도 사라졌다. 용팔은 민망한 생각이 들었다. 노인네가 사람이 그리워 거짓으로 신고를 한 모양새로 비칠까 두려웠다. 게다가 팬티까지 내리고 있었으니 이상한 오해를 할지도 몰랐다.

 병원 안 가셔도 괜찮겠어요? 젊은 남자가 물었다.

 네, 네. 죄송합니다.

 또 아프시거나 하면 연락 주세요.

 네, 네.


 사람들이 돌아갔다. 용팔은 너무 피곤했다. 그래서 외투와 양말만 대강 벗고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꿈에서 용팔은 냇가에서 지팡이로 하루 종일 칼싸움을 하며 놀다가 밥 짓는 냄새를 맡고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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