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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적 소비

by 백경 Feb 26.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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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 손에 잡히는 책은 보통 만 육천 원, 거기에 양장 커버가 더해지면 만 팔천 원을 받는다. 짜장면 두 그릇 혹은 치킨 한 마리를 먹을 수 있는 돈이고, 조조할인으로 영화표를 끊으면 콜라에 팝콘까지 더해 백여 분을 맘껏 즐길 수 있는 돈이다. 무엇보다도 이 돈이면 55매짜리 아이브 2025 시즌그리팅 칼라풀데이즈 포토카드를 2박스나 구매할 수 있다(럭키비키잖아).


그래서 나는 책 사는 돈이 아깝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책은 일단 먹을 수 없고 마냥 즐기기엔 좀 무겁고 아이브라던가 아이유라던가 아이셔를 포기해야 하는 껄끄러운 상황을 내게 요구한다. 모두가 비슷하다는 생각을 이따금 한다. ‘요즘 책을 누가 보냐?’라는 말은 있어도 ‘요즘 넷플릭스를 누가 보냐?’라는 말은 어딘지 어색하다. 문 앞에 인터넷 서점에서 구매한 책 박스가 도착할 때마다 아내는 내게 “또 샀어?” 하고 말한다. 어. 또 샀어. 도서관까지 가는 왕복 기름값이 더 아까워서 또 샀어.


책 사는 돈이 아까운 나는 거기서 어떻게든 뽕을 뽑으려 한다. 방법은 다음과 같다. 구매한 책을 일단 읽는다. 끝까지 읽고 책이 재미있었으면 바로 한 번 더 읽는다. 재미없었으면 돈이 아까워서 한 번 더 읽는다. 그런 뒤 일단 책장에 꽂아두었다가 두어 달쯤 지나 ‘이거 무슨 내용이었더라?’ 생각이 들면 돈 쓴 게  아까워서 또 읽는다. 내 책장에 가장 오래 꽂혀있는 책 중 하나는 코맥 매카시의 <The Road>인데 내가 기억하는 것만 다섯 번쯤 읽었다.  최근에는 폴 칼라니티의 <숨결이 바람 될 때>를 연거푸 두 차례 읽었고, 아이브 포토카드 2박스를 포기하고도 남음이 있을 만큼 책이 좋았다.


나처럼 책 살 돈이 아까워 서점에 가지 않는 사람들에게 위와 같은 방법을 추천한다. 같은 책을 여러 번 읽으시라. 도파민을 얻긴 어려워도 지혜를 얻을 수 있고, 읽을수록 머리가 좋아지진 않아도 생각에 깊이를 더할 수 있고, 운이 좋으면 연인처럼 사랑할 수 있는 책을 만날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게 단돈 이만 원도 하지 않는다. 꽤 괜찮은 소비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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