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란말이를 만드는 일이 얼마나 고도의 집중력과 세심함을 필요로 하는가는 만들어 본 사람만이 안다. 누군가 ‘계란말이는 기본이다. ’하고 떠들어 댄다면 십중팔구는 요알못(요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거나 우리 엄마다. 계란을 부쳐서 둘둘 감는다고 될 일이 아니다. 약불로 느긋하게 달궈진 프라이팬에 기름을 고루 두르고, 계란물을 부어 절반을 살짝 넘긴 정도로 익었을 때 재빠르게 카펫을 말듯 말아낸다. 이때 약 1~2센티 정도는 남겨야 계란 물을 재차 부었을 때 카펫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계란물을 붓고, 절반쯤 익은 계란 카펫을 말고 하는 작업을 3~4회 되풀이한다. 중간중간 너무 익어서 갈색 줄무늬가 섞인 나무등걸 같은 계란말이가 되지 않도록 요리가 완성되는 그 순간까지 집중해야 한다. 비로소 속살이 하얗고 부드러운 계란말이가 완성된다. 그렇게 일주일에 평균 2회, 일 년에 약 100회, 오늘날까지 600여 회를 말아낸 계란말이지만 여전히 만드는 동안에 긴장이 된다. 부끄럽게도 컨디션 난조일 때는 온전한 계란말이를 만드는 데에 실패하기도 한다.
며칠 전 아이들을 데리고 일기를 쓰는 중에 첫째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센드위치’를 ‘샌드위치’로, ‘치즈에 고소함’을 ‘치즈의 고소함’으로 고쳐 준 뒤였다. 타박을 한 것도, 으르듯이 말한 것도 아닌데 울었다. 아빠가 무섭게 말했단다. 어린애한테 서운함을 느낀다는 게 우스웠지만, 사실 그랬다. 저가 좋은 일을 허락하면 아빠 최고를 연호하다가도 하기 싫은 일을 다독여서 할라 치면 아빠는 미운 사람이 되고, 무서운 사람이 되었다. 하루 이틀이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머리가 커서 그런지 부쩍 그런 말을 많이 하는 게 속이 상했다. 일기장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안쓰러운 마음은 들지 않고 그저 보고 있기가 괴로웠다. 하지 마, 너 괴롭히려고 하는 거 아냐. 말하고 나도 쓰던 일기장을 접었다.
책장에 꽂힌 육아 관련 서적들을 보고 있자니 한숨이 나왔다. 난 내 새끼를 이토록 잘 키워서 무슨 대학에 보내고 무슨 상을 받았고, 잘 말아낸 계란말이처럼 훌륭히 육아를 했노라 떠들어 대는 것 같아 배알이 꼴렸다. 부럽고 질투 나서가 아니고 이를테면 ‘애프터서비스의 부재’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시키는 대로 하고는 있는데 생각처럼 애 키우는 일이 수월하지 않았다. 작가들이 그렇다고 첨언을 해 줄 것도 아니고, 미안하다고, 사실 내 새끼한테만 맞는 방법인 것 같다고 뒤늦게 전제를 끼워 넣을 것도 아니었다. 지면에 인쇄된 활자는 어딘지 보는 사람을 주눅 들게 만들고 신성한 느낌을 주는 구석이 있어서, 나처럼 AS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먼저 처절한 자책의 시간을 갖게 만들었다. 이렇게만 하면 훌륭한 아이가 될 거야, 안 되는 건 네 탓이야. 책장 그득 빛나는 육아지침서들이 서로 손을 맞잡고 내 주위를 맴돌며 낄낄대는 것 같았다.
나의 육아는 언제쯤이나 능숙해질까. 프라이팬을 달구는 온도도, 계란 카펫을 뒤집는 타이밍도, 완성까지의 집중력도 나무랄 데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온전치 못한 계란말이가 심심찮게 탄생하는 걸까. 만 7년 가까이 보아 온 내 아이의 눈에 나는 왜 이토록 자주 미운 아빠고 무서운 아빠로 비치는 걸까. 아이의 눈물이 프라이팬의 계란처럼 일기장에 눌어붙기 전에 나는 왜 빨리 뒤집어주지 못했던 걸까.
아침식사로 또 계란말이를 준비한다. 속에 슬라이스 치즈를 접어 넣기 때문에 난이도는 배가 된다. 치즈 위로 계란카펫이 한 겹, 두 겹, 세 겹까지 감긴다. 겉면을 앞뒤로 노릇한 빛이 날 때까지 굽는다. 작은 도마 위에서 한 김 식히고, 한 입 크기로 썰은 뒤에 지그재그로 케첩을 뿌려 마무리한다. 작은 짐승들이 벌써 냄새를 맡고 쪼르르 식탁으로 다가온다. 오늘은 꽤 그럴싸한 모양이라 마음이 놓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