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쇠 가게 큰아버지네 아들을 오랜만에 만났다. 사촌형이 되는 셈인데, 나이는 같아서 서로 말은 놓고 지낸다. 국내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미대를 나왔지만 돈 버는 머리는 없다. 머리숱도 없다. 설에 식구들이 다 모였을 때는 장발이라 티가 덜 났다. 오랜만에 보니 박박 깎아놔서 두피에 머리카락의 흔적들만 남아 있었다. 그 모양이 마치 붓으로 먹을 찍어 백지에 한 방울 탕 튀긴 것처럼 정수리와 제일 바깥쪽 주변머리만 거뭇거뭇하고 그 사이가 휑했다. 머리 위에 큰 눈동자를 지고 가는 것도 같았다. 사촌형을 만나기 전에 운동을 바짝 하고 와서 배가 고팠다.
여기 뭐 먹을 만한 데 있어?
거기 갈래? 오래된 중국집인데 꽤 유명해.
중국집이 유명해 봤자지.
유명해, 특이한 거를 팔아.
뭔데 그게.
사촌형 손에 끌려간 그곳은 이른바 ‘중화비빔면’으로 유명한 중식당이었다. 점심시간보다 조금 이르게 찾았는데도 기다리는 사람이 많았다. 번호표를 받아서 줄을 섰고, 침묵을 지키고 있자니 어색했다. 우리는 무언가 이야기할 상황이 되면 빼먹지 않고 꼭 주워섬기는 주제가 하나 있는데 바로 ‘우리 가족의 몰락사’였다.
우리집은 잘 살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할아버지가 돈이 많았다. 육이오 때 할머니와 함께 수저 한 쌍만 들고 이북에서 남한으로 넘어와 밤낮없이 일을 했다. 손재주가 좋았던 할아버지는 당시에는 흔하지 않던 양장점(양복점)을 했다. 그게 대박이 나서, 내 아버지 세대엔 동네에서 할머니네 집 하면 애들이 소고기만 먹어서 돼지고기 맛을 모르는 집으로 통했다. 왜 할아버지가 아니고 할머니네 집으로 통했느냔 것에 한마디 덧붙이자면 할머니의 외모가 한몫한다. 올해로 아흔에 가까운 우리 할머니는 거짓말 조금 보태서 어디 가서 작다는 소리 안 듣는 나와 비슷한 풍채에 큼직큼직한 이목구비에 각진 얼굴이다. 그래서 젊은 시절 별명이 ‘로스께(러시아 사람을 낮잡아 부르는 일본 말)’였다. 아버지 세대가 다 시집장가를 가고 손주들이 학교에 가기 시작할 무렵 우리에겐 2만 평짜리 과수원이 있었고, 건물이 세 채, 아파트도 형제들 명의로 하나씩 있었다.
나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군대에 가서 임종을 못 지켰다. 언젠가 돌아가시는 날 밤 형제들을 모아놓고 했던 말을 고모한테서 들었다. 돈 버는 뒷모습만 보여주고 자식들을 제대로 기르지 못한 것 같아 후회가 된다고 말씀하셨단다. 그리고 중학교 내내 학교에서 한 자리 숫자 성적표를 받아오는 바람에 할아버지로부터 ‘우리 집안의 기둥’이 될 거라며 돌아가시는 날까지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막내 손주(나)를 못 보고 가서 아쉬워하셨다고도 했다. 할아버지의 장례 이후 우리집은 빠르게 몰락했다. 멸망에 가까운 몰락은 아니고 지금처럼 내가 예전에 좀 살았는데, 하고 얘기할 여유 정도는 있는 몰락 말이다. 과수원이 사라졌고, 건물 세 채는 다 팔아먹었고, 아파트는 팔면 길바닥에 나 앉아야 하니 팔지 못했다. 아버지 세대의 사업병이 치유가 된 건 그 무렵이었다.
과수원을 파는 게 아니었는데.
생각하지 마, 우리 것도 아니었잖아.
안 팔았으면 그림도 안 그리는 거였는데.
안 그리고 뭐 하게.
착한 건물주 해야지.
월세 밀리면 십만 원 단위는 깎아줄 거야?
그럼, 헬스장도 지어서 공짜로 쓰게 해 줄 거야.
양반일세.
우리 이야기의 끝은 늘 돈이 많았으면 어찌어찌했으리라로 마무리되었다. 사촌형과의 그런 대화는 기분이 좋았다. 이루어져야 한다는 갈급함이 없고 죽이 맞아 함께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일 자체가 재밌었기 때문이다. 돈 많으면 더 큰 사업으로 대박 내려는 생각은 않고 건물주 정도에 머무르려는 소박함(?)도 좋았다. 자기 건물에 헬스장을 짓고, 신나는 얼굴로 벽에다 잔뜩 멋을 부린 그래피티를 그려 넣는 민머리 형의 모습이 상상이 되어 혼자 낄낄거렸다. 나이 먹을수록 점점 수다쟁이가 되는 건지, 금세 우리 차례가 왔다.
중화비빔면 주세요.
탕수육이랑 군만두도.
술은 안 해?
오늘은 됐어.
웬일이래.
‘중화’를 붙이기엔 잘 아는 맛의 비빔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맛있다고 느낀 건 그 한 그릇에 물 샐 틈 없이 들어찬 세월 덕인 듯했다. 쫄깃하게 면을 삶아내는 시간과 식힘 정도, 식감을 헤치지 않는 고명의 크기, 비볐을 때 적정한 양념의 비율, 그리고 아스라이 대접을 감싸는 들기름의 향. 긴 세월 수 천, 수 만 그릇을 담아내는 동안 하나 특별할 것 없는 재료로 만든 비빔면은 그렇게 완벽하게 자리를 잡았다. 우리는 말없이 한 그릇씩 해치웠다. 다 먹고 한숨 돌리는 틈을 타서 재빨리 계산대로 달려가 카드를 내밀었다. 사촌형이 뒤따랐지만 이미 늦었다.
형을 집에 데려다주면서 또 한참 수다를 떨었다. 형네 집은 언덕배기에 있는 예쁜 벽화가 그려진 집이었다. 집 앞에 도착하자마자 형은 담배가 마렵다며 쌩 하니 뒤도 안 돌아보고 들어갔다. 나도 돌아섰다. 주머니를 뒤져서 영수증을 꺼냈다. 오늘 먹은 게 비빔면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도 비빔면 같아서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