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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Feb 23. 2023

오늘은 세상의 평화를 위해 쉽니다

 잠든 아내를 두고 까치발로 안방문을 나선다. 함께 누워있다가 어느 순간 사라지는 게 싫다고 투정할 테지만 언제까지 가나 보자, 하고 두고 보기 시작한 게 벌써 9년 차다. 사랑도 깊으면 병이다. 몸 건강히 오래오래 병을 안고 살면 좋겠다고 잠깐 생각한다. 아내가 도로록, 코골이 하는 소리가 어깨너머로 들린다.


 프림과 설탕이 빠진 알커피 두 봉지를 까서 까만 세라믹 컵에 쏟는다. 뜨거운 물을 부으니 헤이즐넛 향이 잠깐 스친다. 컵은 열이 가해지면 우리 네 식구의 사진이 표면으로 드러나는 신기한 물건이다. 나의 전용으로, 둘째가 두 살 즈음 선물 받았으니 5년 이상 되었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머리숱이 적고 아내의 귀여운 덧니도 그대로다. 애들만 크는 것 같다. 그렇게 질리지도 않는 사진을 보느라 잠깐 시간을 뺏긴다.


 늦잠을 자는 바람에 벌써 7시가 다 되었다. 엊저녁에 통닭을 시키는 바람에 곁들이는 소주의 유혹을 참지 못한 탓이다. 초등학교 입학하는 첫째의 책상을 들여야 하기 때문에 내일모레 친한 소방서 동료이자 고등학교 동창과 봄맞이 대청소를 하기로 했는데, 보나 마나 일 마치고 한 잔 걸칠 텐데, 어쩌자고 예습처럼 혼자 술잔을 기울였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만 내가 아니면 그 마음을 누가 알까.


 백지를 노려본다고 30분을 또 그냥 날린다. 오늘은 글렀다. 마음 한구석에서 벌써 아침 뭐 해 먹일까를 고민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계란도 다 떨어지고, 두 마리 남았던 굴비는 내가 근무 간 사이에 아이들 간식으로 줬단다. 설에 안전센터장이 선심 쓰듯 (세금으로) 마련한 참치캔 세트가 눈에 띈다. 참치는 마요네즈에 버무리고 김치는 잘게 다져 볶아서 김밥이나 말아줘야겠다. 백지 위에서 깜빡이는 커서가 마치 집에서 애들 기다린다고 술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려는 나를 한심한 눈으로 보는 친구 같다. 이렇게 간다고? 한 시간 반 동안 생각해 낸 게 겨우 참치김치김밥이야? 묻는 것 같아서 나도 지지 않고 한 마디 하련다.


“내가 뭐 쓸 일이 없어야 세상이 평화로운 거야. 소방관은 그런 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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