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ODA Jul 02. 2020

그녀는 왜 '검은 여왕'이 되었나..

Reine Noire; 검은 여왕


이웃나라에서 온 한 소녀가 왕비가 되고 오랜 기간 그 나라를 통치한 역사가 되었으면서 어두운 아우라를 뿜어내는 'Reine Noire (검은 여왕)'이라는 타이틀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14살의 외국에서 온 신부는 프랑스 문화발전에 큰 족적을 남겼지만.. 프랑스에서의 생활은 그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습니다.


급격히 기운 가세에 결혼 지참금도 제대로 챙겨가지 못한 그녀를 프랑스 궁정 사람들은 ‘La femme italienne (그 이탈리아 여자)’라며 노골적으로 비하해 부르며 무시했고, 이미 사랑하는 님-Diane(디안)-이 있던 동갑내기 신랑 Henri II(앙리 2세)는 통통한 체형에 눈이 튀어나오고 코가 큰 전형적인 메디치가의 생김새를 가진 신부 Caterina(까떼리나)에겐 관심조차 없었죠.

 



반면 좀 우울해 보이긴 하지만 잘생긴 얼굴에 듬직한 체격을 지닌 Henri II를 보고 첫눈에 반해버린 Caterina는 결혼 생활 내내 자신을 바라보지 않던 남편이 갑작스러운 사고로 사망하자 그를 애도하기 위해 남은 평생을 검은 드레스만 입고 지내기로 결심합니다. 보통 그래서 '검은 여왕'이라 불렸다고 알려져 있으나.. 단순히 그런 이유만으로 붙은 명칭은 아닙니다. '검은'은 중의적인 의미로, 검은 의상은 그녀가 가지고 있던 어두운 아우라를 잘 드러내 주는 적절한 포장지 같은 역할이었지요.



 '피비린내 나는 사악한 이탈리아인'


유럽에서 그녀에 대한 평가는 '피비린내 나는 사악한 이탈리아인'!!

남편의 죽음 이후 어린 아들을 대신해 본격적으로 섭정을 시작하고 난 뒤, 그녀의 명으로 행해졌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독살이나 무자비한 대학살은 유럽 역사에서 그녀가 사악한 이미지를 구축하는데 큰 몫을 했습니다. 그녀는 피렌체에서부터 함께 온 조향사 René(르네)의 도움을 받아 책이나 장갑, 옷 등에 독을 묻혀 맘에 들지 않는 정적들을 제거해 나갔다고 알려져 있죠.


그중 대학살이 자행된 사건이 있었으니..



16세기 중후반 프랑스는 Huguenots(위그노)라 불리던 지금의 개신교 세력이 강해져 가톨릭교와의 대립이 고조되던 시기로, 두 진영은 가장 손쉽고도 흔한 방법인 결혼으로 화합을 꾀합니다. 전통적인 가톨릭 파였던 Caterina는 자신의 권력과 프랑스의 평화를 위해 딸을 희생시키죠. 막내딸 Marguerite(마르그리트)를 위그노의 중심이었던 나바라 왕국**의 젊은 왕 Henri IV(앙리 4세)와 맺어주어 억지 평화를 도모한 것입니다.

1572년 8월 성대하게 치러질 결혼식을 위해 많은 위그노들이 파리로 몰려들었고, 사람들은 드디어 이 결합으로 프랑스를 괴롭혀오던 종교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올 거라는 희망을 품게 되죠. 하여 행복은 둘째치고 적어도 평화로운 가운데 행해졌어야 할 결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모두가 축제 분위기 속에 취해있던 시간, 무자비한 대학살은 시작되었습니다.

역사에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로 남은 이 사건은 공주와 왕의 혼배성사가 있은지 6일 후, 아직 결혼식의 흥겨움에 들떠있던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8. 24) 새벽에 일어난 기독교 내의 종교 학살로, 프랑스의 위그노 지도자 Gaspard II de Coligny(콜리니) 제독이 살해되면서 기나 긴 어두운 밤이 시작됩니다.

이 사건을 다룬 영화 1994년 작 '여왕 마고(La Reine Margot)'에서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는데, '늙지 않은 미녀'로도 유명했던 90년대 프랑스 여신 이자벨 아자니(Isabelle Adjani)가 그녀의 나이 39에 19살의 Marguerite역을 맡아 열연해 깊은 인상을 남겼죠.




Caterina는 딸의 결혼식을 위해 파리로 모인 위그노 하객들 중 남녀노소 구분 없이 수백 명이 학살되는 것을 지켜보았고, 프랑스 화가 Francois Dubois(프랑수아 뒤부아)는 이 모습을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위그노 화가였던 Dubois는 학살로 임신한 아내를 잃었지만 본인은 살아남아 스위스로 피신해 잔인했던 역사를 남겼죠.


학살의 실질적인 명을 내렸던 당시의 왕인 Caterina의 아들 Charles IX(샤를 9세)는 24일 다시 학살을 멈추라는 명을 내렸지만 이미 사람들의 광기는 지도자의 통제력을 벗어나 평소 맘에 들지 않던 이를 위그노로 몰아서 죽이는 지경까지 이르렀고, 몇 주간이나 지속되며 다른 도시와 시골로까지 퍼진 이 비극적인 학살로 최대 30,000명 정도가 희생되었습니다.



점성술과 연금술

Caterina가 사악하고 어두운 이미지를 갖게 된 또 다른 이유는 점성술과 연금술 때문입니다. 점성술에 심취했던 그녀 곁엔 점성가와 연금술사들이 넘쳐났고, 그녀는 매일매일 운세를 보며 삶의 많은 부분을 그들에게 의지했죠. 각종 약은 물론 젖소나 노새의 배설물까지 마셔가며 난임으로 고통받은 10년의 세월이 흐른 뒤 10명의 아이들을 연달아 낳았을 땐 사람들은 그녀가 주술에 빠져 여러 점성술사들과 함께 한 초자연적인 수행에 의한 결과라 믿었습니다.

사실 난임의 주된 요인은 남편 앙리에게 있었고 의사 Jean Fernel(쟝 페넬)의 조언을 받아 임신에 성공한 것이었지만, 인기도 없고 만만했던 외국인 신부에게 모든 원인과 책임을 씌우는 게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을 테지요.


그녀가 점성술의 열렬한 추종자였다는 건 사실이지만.. 이 시대엔 그다지 특별한 일도 아니었습니다. 당시 통치자들은 점성술을 믿고 의지했으며 모든 결정은 점성술사들과 상의한 후에 내렸던 그런 시대였기 때문이죠.

Nostradamus(노스트라다무스)와도 친분이 있었던 그녀는 편지로 조언을 받거나 그를 파리로 불러들여 자녀들을 위한 별점을 보기도 했습니다. Nostradamus는 직접 마술 거울로 그녀의 아들들 중 누가 미래에 왕이 될지 예견해주기도 했는데, 특히 남편의 죽음에 대한 Nostradamus의 예언이 맞은 후 Caterina는 더욱 그에게 집착하게 되었습니다.




빈틈없는 정치가   



그녀는 매우 정치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태생부터 주위 환경이 그녀를 그렇게 단련시켰을 테죠. 유일한 상속녀로 태어나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부모를 연달아 잃은 그녀의 후견인이 되어준 이는 무려 당시 권력의 상징인 교황이었습니다. 친척인 교황 Leone X(레오 10세, 종조부)와 Clemente VII(클레멘트 7세, 재종조부)의 보호 아래 로마에서 받은 세련된 교육을 바탕으로, 복잡한 정치적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이용당하며 살아남기 위해 자연스레 터득된 처세술로 내공이 쌓일 대로 쌓인 젊은 왕비는 조용히 숨죽여 인내하며 자신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다른 나라로 시집을 가면서 그 문화에 순응하기는커녕 자신이 자라온 문화를 가져가 전파했다는 점만 봐도 환경에 굴복하지 않는 그녀의 당당한 면모를 엿볼 수 있는데, 요리·속옷·향수·위생 등 기본적인 문화 전파는 물론 당시 애도의 표시로 왕비들이 입었던 흰색* 대신 검은 의상을 택한 점도 시대가 바라는 모습에 따르지 않았던 그녀의 성향을 잘 드러내 줍니다.



'사랑하던 남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한'이라며 그녀 자신과 남들 보기에도 좋게 포장했지만.. 다분히 정치적인 장치-내가 왕의 어머니라는 것과 '여왕 어머니'라는 칭호를 받았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기 위한-의 성격을 담고 있으며, 좀 더 현실적인 이유로는 검은색 의상이 자신을 보다 날씬하게 비춰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 내·외적으로 매우 신경을 썼죠.


그런 그녀는 자신뿐 아니라 후대에도 남아 여성의 몸을 억압한 도구를 고안해 내거나 유럽 전체로 유행을 퍼트렸습니다.







Tacchi alti; Talons Hauts; 하이힐

결혼이 결정되고 프랑스로 가야 했던 14살의 소녀는 자신의 작은 키가 염려스러워졌습니다. 특히, 이미 존재하던 정혼자의 아름다운 그녀 디안(Diane de Poitier)이 신경 쓰였지요. 당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추앙받고 있던 Diane의 명성과 Henri II에 대한 영향력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하여 자신감이 필요했던 Caterina는 피렌체의 장인에게 굽이 높은 신발을 주문하죠. 내면의 성숙함과 아름다움도 중요하지만 겉모습과 태도에서 전달되는 강력한 힘 또한 잘 아는 소녀였습니다.


동방-오스만 제국-에서 건너온 플랫 형태의 높은 굽이 달린 신발은 14세기부터 베네치아에서 유행하며 발 보호는 물론 부와 지위를 상징하는 수단으로 애용되었습니다. 보통 15-20cm 굽이었던 Pianelle(삐아넬레, 또는 pantofole)는 과시와 허영의 손을 잡고 20inch(약 50cm)까지 높아진 기형적인 모습으로 17세기까지 여인들의 사랑을 받았는데, 그 배후에는 남편들의 지지도 한몫을 했죠. Pianelle를 신고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하게 된 부인과 딸들을 통제할 강력한 수단으로 활용했던 것입니다.

 

혼자서는 걷지도 못해 양 옆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 걷는 여인들의 모습을 본 다른 유럽인들은 '나무 반, 여자 반'이라 부르며 혀를 내둘렀다고 합니다.

위험했던 이 신발은 많은 여인들이 넘어지고 심지어 임산부들이 넘어져 유산하는 사례가 빈번해지자 굽 높이를 제한하는 법이 제정되었습니다. 어길 시 많은 벌금을 내거나 징역형까지 받을 수 있는 중죄였지만 유행을 막는 건 또 다른 유행뿐.. 파리에서 퍼진 더 작고 세련된 구두가 유행하자 여인들은 드디어 이 기형적인 높은 굽의 신발을 버렸죠.


Pianelle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모양과 굽 높이가 달랐는데 베네치아나 피렌체에서는 주로 나무로 된 굽에 가죽이나 실크, 벨벳으로 마감하고 금·은실, 보석 등으로 장식했고, 스페인에선 코르크로 된 웨지에 가죽이나 새틴을 씌우고 무늬를 넣어 양각한 'Chapìn'을 신었습니다. 현대에 쓰이는 영어식 표현 Chopine(쇼팽)은 여기에서 유래되었죠. 쇼팽은 전 유럽으로 퍼지며 다양한 디자인의 하이힐로 발전했습니다.


신발이라기보다 키를 늘려주는 기구에 가까웠던 Pianelle는 Caterina와 함께 패션으로 거듭나게 되는데, 현대의 하이힐처럼 뒤꿈치에 굽이 따로 달린 형태는 Caterina가 자신의 결혼식을 위해 주문한 구두가 시초라 할 수 있습니다.



Caterina가 피렌체의 장인에게 주문한 구두는 '앞 코가 길고 굽이 있는 우아한 형태'로, 이 천재적인 구두장인은 무거운 나무로 된 웨지를 떼어버리고 7cm짜리 굽을 단 새로운 형태의 신발을 선보였습니다. 16세기 피렌체에서 신던 스타일과 이후 프랑스에서 유행한 신발 스타일로 그녀가 신었던 구두의 형태를 유추해 보면 현대의 뮬(Mules)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결혼식 리셉션장에서 7cm 하이힐을 신고 한층 당당해진 모습으로 천천히 걷는 그녀의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고도 매혹적으로 비쳤고 이후 프랑스 궁정 여인들은 너도나도 그녀를 따라 하이힐을 신고 다녔다고 합니다. 이 작고 세련된 구두는 'Souliers à pont'가 되어 유럽으로 퍼지며 바야흐로 하이힐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죠.



Corsetto; Corset; 코르셋

의복이라기보다는 신체를 고문하는 기구에 가까웠던 코르셋은 뒤틀린 환상의 기준에 몸을 끼워 맞추기 위한 필수적인 도구로 그 역사는 꽤나 오래되었습니다. 얇은 허리에 대한 욕망은 여성들만의 전유물은 아니었죠.


고대 그리스 크레타섬의 미노스 문명의 유물에서 코르셋 초기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남녀 모두 강제로 조이지 않고는 불가능한 허리 사이즈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백합 왕자의 허리 사이즈가 뱀의 여신보다 더 얇아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요? :)

그리스, 테베, 미노아인들은 남녀 모두 가죽으로 만든 코르셋을 입었고 미노아인들은 운동할 때 허리와 엉덩이의 지지대로 코르셋을 착용했다고 합니다. 마치 복대처럼 말이죠.


기원전 2000년 경부터 모습을 드러낸 코르셋은 15세기 신에서 인간 중심 사회로 돌아와 인체를 사랑하는 시기가 돌아오자 다시 등장합니다. 자신의 아름다운 몸을 자랑하고 싶어 진 사람들은 몸의 실루엣이 드러나는 옷을 선호하게 되었지만 이상향과는 다른 자신들의 정직한 몸매에 만족하지 못하고 특정부위를 강조해 주기 위한 코르셋을 꺼내 들었죠.


상류층에 의해 진화되던 코르셋은 15세기엔 가죽이나 뻣뻣한 리넨을 끈으로 엮은 형태이다 16세기엔 금속으로 만든 몸통 모양이 고안되었고 점차 천 사이에 고래수염이나 뿔, 고리버들을 고정해 만든 좀 더 부드럽지만 단단한 코르셋으로 그 모양이 정형화됩니다.


보기만 해도 아플 것 같은 금속 코르셋은 실제로도 고통스러운 착용감으로 일찍 사라졌는데, 학자에 따라 의복이라기보다는 교정이나 치료 목적으로 보거나 종종 칼로 암살되던 시대라 보호대로 사용되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이 코르셋을 Caterina가 프랑스로 가져가 선보였죠. 적어도 그녀는 이 금속 코르셋의 도움을 받아 원하는 실루엣을 만들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16세기 초반에는 진정한 코르셋이라 할 수 있는 고래수염으로 만든 코르셋도 탄생합니다. 16세기부터 상업적 포경이 시작되면서 대서양을 건너다 발견된 새로운 고래 어장으로 인해 고래수염은 흔한 재료가 되었고, 곧 스페인과 이탈리아 반도에서 이 고래수염과 버크램***같은 직물로 만들어진 코르셋이 퍼졌죠. 이 또한 Caterina를 통해 프랑스로 들어와 'Corset'이란 이름을 달고 유럽 전체에 유행하게 됩니다.


여기서 무서운 건.. 그녀는 정작 자신은 단 한 번도 도달해보지 못했을 '13인치 허리'를 이상적인 허리사이즈로 정의해 궁정 여인들에게 강요했다는 점입니다. 13인치면 약 33cm로 중국의 전족에 버금가는 뼈를 깎는 듯한 고통이 있어야만 겨우 도달할 수 있는 치수로, 이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거냐면 출생 시 아기들의 평균 허리둘레가 약 33cm입니다.

 

말벌 허리로 유명했던 1900년대 프랑스 배우 Polaire(Émilie Marie Bouchaud)의 허리사이즈도 13인치에서 1인치 더 큰 14인치였습니다. 하여 여자아이들은 대략 9살부터 잘 때를 제외하고 하루 종일 코르셋을 입은 채로 지내야 했습니다.




당시 그려진 그림을 보면 심심치 않게 코르셋을 한 드레스 차림의 여자 아이들이 등장하는데, 초상화가 그려질 때 오스트리아 여대공 마리아의 나이는 겨우 3살이었으며; 벨라스케스가 그린 '시녀들'에 등장하는 스페인 공주 마르게리타는 5살의 나이에 코르셋과 Verdugado(Farthingale)까지 한 어른과 똑같은 드레스를 입은 모습입니다. 잠시 그림을 위한 차림새였겠지만.. 여자아이들은 걸음마를 떼기도 전부터 코르셋과 친해져야만 했죠.


귀족들은 끊임없이 평민들과 자신들을 구분할 무언가를 찾았고, 그 무언가는 생활하는데 불편하고 화려할수록 사랑받았습니다. 그 외형적인 아름다움 때문인지 코르셋은 여러 시대에 걸쳐 여러 번 채택되었는데, 코르셋은 불편했지만 착용 후에는 곧은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고 꼿꼿한 태도에서 묻어 나오는 위엄 있는 자태로 곧 귀족의 상징이 되었죠. 18세기 프랑스혁명과 함께 버려진 코르셋은 잠시 주춤했지만 금방 다시 부활해 남녀 모두에게 선풍적인 지지를 받으며 화려한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남성 또한 여성 못지않게 아워글라스 실루엣을 선호했던 18세기말부터 19세기 중엽에는 남성도 코르셋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이 전 시대에도 종종 슬림한 라인이 유행일 땐 코르셋을 착용하긴 했지만, 특히 이 시기 댄디즘이 퍼지면서 그들의 멋들어진 차림새는 코르셋으로 완성되었죠.

1820년대 영국 왕 George IV는 댄디의 아버지 브러멜(George Brummell)을 절친으로 둔 인사답게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며 나라보다는 본인을 꾸미기 바빴는데, 먹을 것 또한 사랑해 점점 비대해지는 몸을 고래수염으로 만든 코르셋으로 정돈했습니다.


오늘날 사진 어플로 다른 사람이 되듯 실제 모습을 그대로 그렸다 죽기 싫은 화가로 인해 초상화와는 많이 달랐던 조지 4세는 무릎 사이에 배가 걸려있다고 기록될 정도로 비만이었습니다. 허리 사이즈를 줄여볼 요량으로 입었던 코르셋으로 인해 자신의 대관식에서 거의 기절할 정도였다는 그의 허리사이즈는 의복 착장 후 55인치였죠. 1824년 그의 코르셋이 50인치 크기로 만들어졌다고 하니 만약 그 사이즈의 코르셋을 그대로 입었다면 기절할만했네요. :0


이렇게 남녀 모두에게 인기를 끌던 코르셋은 Victoria 여왕 시대에 유행의 정점을 찍으며 Belle Époque시대까지 전성기를 누렸고, 심지어 세계 1차 대전의 여파에도 살아남았지만 세계 2차 대전 이후 몸을 해방시킨 실루엣의 유행으로 점차 사그라들었습니다.

역시 유행을 막는 건 다른 스타일의 유행뿐입니다.





* 당시 유럽의 여왕들은 '순결의 상징'으로 애도 기간 동안에는 흰색 드레스를 입는 것이 관례

** 나바라 왕국 - 지금의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에 위치하여 17세기 초까지 존재했던 왕국

*** 버크램(buckram) - 면이나 마를 뻣뻣하게 만든 천






사진출처:

Wikimedia Commons

Google Images

이전 07화 왕비가 된 이웃나라 상속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