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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DA Aug 10. 2020

르네상스의 여자, Isabella d'Este

:  는 시대의 유행 선도자(Trend Setter)



15-16세기 Ducato di Ferrara(페라라 공국)은 르네상스 예술의 중심지로, 이 공국을 지배한 Este가문의 수장 Ercole I d'Este와 부인 Eleonara d'Aragona 사이엔 두 딸 Isabella와 Beatrice가 있었습니다. 페라라의 총명했던 두 공주는 당대의 유능한 지도자이자 유행 선도자(Trend Setter)였죠.



Città del Rinascimento, Ferrara; 르네상스의 도시 Ferrara


페라라 공국은 수많은 예술가들과 시인 · 철학자들의 놀이터이자 1391년 대학교가 세워진 학문 교류의 장으로, 그야말로 르네상스 학문과 문화의 나라였습니다.


15세기 페라라를 다스렸던 Ercole I d'Este는 르네상스의 중요한 예술 후원자로, 특히 음악 애호가였던 그는 네덜란드나 프랑스 등 다른 유럽에서 활동하는 유명 음악가들을 페라라 궁정으로 불려 들여 활동케 하며 페라라를 예술과 문학의 중심지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배움과 문화가 중요한 환경 속에서 고전과 인문주의 교육을 받으며 예술이 일상이던 가정에서 자라난 Isabella와 Beatrice 두 자매는 우아하고 지적인 여인들로 성장하죠.



르네상스의 여자 'Isabella d’Este'


Este 가문의 장녀 Isabella(1474-1539)는 문화와 예술을 사랑한 뛰어난 미적 감각의 소유자로, 자신만의 스타일을 가지고 패션을 선도한 당찬 여성이었습니다. 그녀는 당시 남성이 지배하던 예술 후원 산업에 과감히 발을 들인 여성으로, 단순한 예술 후원자를 넘어서 자신만의 예술 문화 공간 'Studiolo'를 가진 최초의 여성이었죠. Leonardo da Vinci가 르네상스의 남자라면, Isabella d’Este는 르네상스의 여자였습니다.


15살에 옆 나라 Marchesato di Mantova(만토바 후국)의 후작 Francesco II Gonzaga와 결혼한 뒤 전쟁으로 남편이 잡혀갔을 땐 섭정이 되어 뛰어난 정치 감각을 발휘해 만토바를 지켜냈고, 그녀의 외교적 능력으로 후국이었던 만토바는 공국으로 승격되기도 했습니다.




두 번의 유산 끝에 찾아온 첫 아이였던 Isabella는 자체가 기쁨이자 축복이었기에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자랐죠. 일찍 말문이 트였고 놀라울 정도로 기억력이 좋아 영재의 기질을 보였던 Isabella는 혼인을 위해 만토바로 떠나기 전까지 페라라에서 지내며 개인교습을 받았는데, 페라라 대학교 교수와 고전을 논하고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익혔으며 시인 Antonio Tebaldeo과 함께 시를 짓고 공부했습니다.


음악 애호가 아버지가 후원하는 당대 최고 음악가들과 교류하며 다양한 악기 연주를 배웠고, 춤의 거장 Lorenzo Lavagnolo에게 춤을 배운 그녀를 프랑스 왕 Luigi XII세는 ‘멋지게 춤을 추는 아름다운 여인’이라 묘사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궁중 예절을 익힌 그녀는 르네상스의 중심 도시 중 하나였던 페라라를 방문하는 왕족이나 유명인사들을 접대하면서 정치 및 외교협상 기술도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었죠.


6살에 이미 혼처가 정해졌지만 어렵게 얻은 맏딸을 매우 사랑했던 부모님은 그녀가 13살이 되기 전에는 결혼할 수 없다고 못 박아 둔 덕분에 마음껏 배우고 어머니를 따라 여행도 자유롭게 하며 풍족한 공주로서의 생활을 만끽했습니다.



1490년 2월, 페라라에서 홀로 혼인성사를 마친 Isabella는 4일 후 남편이 기다리고 있는 만토바에 도착했습니다. 이 발랄했던 신부는 건장하게 멋진 모습의 신랑도 좋았고 자신을 성대하게 반겨주는 만토바도 마음에 쏙 들었죠. 만토바 또한 총명하고 구김살 없이 발랄한 Isabella를 반겼습니다.



좋은 집안에 충분한 지참금 - 다양한 보석, 그릇, 25.000개의 금화 등이 화가 Ercole de’ Roberti의 그림이 그려진 14개의 화려한 상자에 담겨 함께 온 그녀를 두 팔 벌려 환영했죠. 사실 그녀는 당시 더 잘살던 밀라노 공국에서도 탐내던 일등 신붓감이었습니다.   

8일간 지속된 결혼 축하연에 초대된 외국인 손님만 17,000여 명에 가까웠고, 매일매일 연회에 놀이기구, 쇼, 카니발 등이 열렸으며 분수조차 물이 아닌 와인으로 채워졌습니다.


포동포동하고 예쁘진 않았지만 -당시 만토바 사람들의 평가- 우아하고 매우 지적인 여인이었던 Isabella는 페라라에서 익힌 뛰어난 예술적 감각으로 만토바 궁정을 문화의 장으로 만들었습니다. Raffaello, Tiziano, Leonardo da Vinci같은 화가들을 후원해 그림을 그리게 했으며, 음악가들과 연주하며 음악을 논하고 수집한 미술품과 책들을 보존 · 연구할 수 있는 스튜디오를 만들어 그녀만의 예술 문화를 발전시켰습니다.



패션 선도자; Trend Setter


‘여자의 옷은 달 모양보다 더 다양하다’던 동시대 작가의 표현처럼 개인의 자유가 주어진 르네상스 시절엔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변화무쌍한 스타일이 유행하게 됩니다.


어렵게 얻은 첫 자식을 애지중지, 아낌없이 지원해주신 부모님 덕분에 세상이 자기중심으로 돌아가던 Isabella는 주목받는 것 또한 즐겼습니다. 그녀는 여성스러우면서도 화려한 스타일로 자신을 마음껏 드러냈죠. 패션을 정치적 전략으로 삼았기 때문에 관습과 전통을 존중하면서 자신을 표현하는 형태와 방식에 극도로 주의를 기울여 원하는 이미지를 만들어냈습니다.



생후 6개월 된 Isabella의 의상 목록엔 은빛 비단으로 만든 Turca*가 있었고, 한 살 무렵 그녀의 옷장엔 온갖 화려하고 값비싼 드레스로 가득했습니다. 겨우 두 살 때 금은실로 짠 직물로 만들어진 신발은 33켤레나 되었죠.


결혼한 이후, 그녀는 만토바에서는 거의 옷을 지어 입지 않고 패션인들이 흔히 그렇듯 유행을 앞서가는 곳**- 주로 베네치아나 페라라- 에서 주문해 입었는데, 두 곳 모두 그녀를 위한 구매담당자 따로 있었습니다. 시간이 좀 더 지나서는 많은 돈을 들여 재능 있는 재단사와 장인들을 만토바로 끌어들였으며, 그리스인 자수사까지 두었습니다. 페라라에서 구매를 담당했던 Girolamo는 그녀에 대해 이렇게 말했지요.



그녀는 ‘화려하고 참신한’것이기만 하면 구입했고
품질이 좋다면 비용은 고려하지 않았다




그녀의 세련된 패션감각은 널리 소문이 퍼졌고 다른 유럽 궁정 여인들은 그녀의 패션을 따라 하기 바빴습니다. 1523년 폴란드 여왕 Bona Sforza는 Isabella가 ‘이탈리아의 모든 아름다움의 근원이자 원천’이라며 찬양했고, 프랑스 왕실에서도 그녀의 스타일을 요구했습니다.

1515년 Isabella는 잠시 볼모로 프랑스에 가 있던 아들 Federico II에게 편지를 받았는데 그 내용인즉슨, 프랑스 왕 Francesco I세가 프랑스 여인들이 Isabella처럼 옷을 입길 원하니 따라 할 수 있는 드레스, 소매, 머리스타일까지 전부 장착한 ‘패션 인형’***을 보내 달라는 것이었죠.


그로부터 2년 후, 실제 Isabella가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 그녀와 동행했던 재단사는 많이 감격스러웠던지..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문과 창문에 매달려 구경하던 프랑스인들은
그녀의 세련되고 아름다운 모습에 경이로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패션에 대한 열정은 강박으로까지 이어졌는지.. 자신이 라이벌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입는 스타일을 시시각각 디테일까지 조사했으며, 자신을 아껴주던 어머니가 돌아가신 슬픈 와중에도 동생 Beatrice가 장례식장에 어떤 의상을 입고 올지 몰래 정보원을 보내 알아보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자신이 더 우아하게 보여야 했기 때문이죠.


Isabella는 프랑스에 사는 시누이 Clara Gonzaga에게 편지를 보내 옷을 지어 입고자 하니 검은 천을 보내달라 요청했습니다. 당시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검은색 직물은 이탈리아 것보다 좋은 최고급이었죠. 슬픔도 최고급으로 옷을 만들어 입겠다는 그녀의 의지를 꺾을 순 없었습니다.


아버지 Ercole I d’Este가 돌아가신 이후엔 검은색 의상만 입고 지냈는데, 검은 의상은 그녀의 어머니 Eleonora가 선호했기 때문에 Isabella는 어렸을 때부터 자주 입어 친숙한 색상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색감의 변화 없이 유지하는 검은색이 되기 위해서는 매우 긴 염색 과정과 후처리가 필요했기 때문에 르네상스 시대 검은색은 부의 상징이기도 했지요. 이렇게 얻기 어려운 재화인 데다 개인적인 선호도가 더해져 어두운 색 의상은 페라라와 만토바 궁정에서 품위 있는 색상으로 채택되었고, 16세기 검은색 의상은 유럽 전체에서 유행하게 됩니다.







초상화, 그리고 패션


르네상스 시대, 초상화는 외교적 선물로 종종 이용되었습니다. 특히 아름답고 유명한 이의 초상화는 다른 궁정에서 자주 요청되었죠. 당연히 Isabella d’Este의 초상화는 매우 인기가 높았습니다.


하지만 함께 높았던 그녀의 예술적 기준을 충족시키긴 어려웠던 관계로 아무나 그녀를 화폭에 담지는 못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태어나기 한참 전부터 만토바의 궁정화가였던 Andrea Mantegna가 그린 자신의 초상화가 맘에 들지 않자 ‘자신과 비슷한 구석이 하나도 없다!’ 화를 내며 주저 없이 다른 이를 찾아 나섰죠.




그녀는 초상화에서 자신의 생김새가 아닌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이미지로 보이기를 원했는데, 궁정 여인다운 기품 있는 모습에 신비스러운 이미지를 원했던 그녀를 충족시켜 줄 화가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오래 앉아있는 것도 싫어해 화가들은 기존의 그림이나 흉상을 보고 그려야 했죠. 다 그린 후에는 눈이나 머리카락을 그녀가 원하는 색으로 교정하는 후작업도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평생을 많은 화가들 사이에 살았던 이 치고는 남겨진 초상화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나마도 Isabella로 추정되는 그림이 반이죠.


이랬던 그녀가 초상화를 그려달라 먼저 요청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그 유명한 Leonardo da Vinci입니다.





 Leonardo da Vinci


1499년 밀라노 공국이 프랑스에 점령당했을 때 만토바는 밀라노 공국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어주었는데, 점령당하기 전 가까스로 탈출한 Leonardo는 베네치아로 가던 도중 만토바에 잠시 들러 머물렀습니다. 여주인 Isabella는 극진히 환영했죠. 안 그래도 자신의 아우라까지 담아낼 수 있는 화가를 찾던 중이었던 그녀는 밀라노에서 Leonardo가 그린 Cecilia Gallerani의 초상화를 보고 매료되어 그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차였습니다.




그림 속 그녀는 약 1년 전 Gian Cristoforo Romano가 만든 흉상과 닮았는데, 아마 Leonardo도 이 흉상을 보며 그렸을 거라 추측됩니다. 그녀는 초상화를 위해 오래 앉아있는 것을 싫어했고 더구나 첫아이를 임신한 지 6개월쯤이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무엇보다 그림과 흉상의 생김새가 똑같다고 전문가는 말합니다. Leonardo가 직접 그녀를 보며 그린 그림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이 그림은 그녀의 실제 나이대(약 25세)에 그린 드문 초상화입니다.




그녀는 분리된 소매와 연결된 드레스 몸통 사이로 슈미즈(Sottile camicia)를 끄집어 내 퍼프소매처럼 만들고, 머리 뒤쪽을 베일로 덮어 어깨 밑에서 살짝 묶은 뒤 이마를 두르는 리본으로 베일을 고정한 15세기 북부 이탈리아의 귀족 여성들의 전형적인 유행 패션을 보이고 있습니다. 흉상과 스케치가 다른 점은 머리스타일로 흉상은 베일이 머리 뒤쪽에만 있지만 Leonardo는 투명 베일로 머리 전체를 덮어 감싼 모양으로 그렸죠.



Isabella는 초상화를 그릴 때 남성적인 자세로 그려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녀는 여성이기보다 주체적인 한 인간으로 보이고 싶어 했죠. 무려 1500년대에 양성평등을 추구하며 실천했던 여인이었습니다.


이 자세는 레오나르도의 다른 작품 ‘Monna Lisa(모나리자)’의 포즈와 비슷합니다. 그래서 모나리자의 실제 모델이 그녀라는 논란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세 가지 정도가 있는데: 첫 번째 이유는 비슷한 포즈로 - 모나리자는 의자 팔걸이에 한쪽 팔을 기댄 채 손을 포개어 놓고 있는데, 르네상스 시대 통치자들의 초상화 속 특징인 팔걸이가 아무렴 부유하다고는 하나 상인 부인의 초상화에 등장할 리 없다는 거죠. 이후 Isabella의 이 포즈는 종종 'Monna Lisa'의 예견이라 불렸습니다.




Isabella의 스케치는 미완성인 채로 Leonardo da Vinci가 들고 베네치아로 떠나버렸는데, 이후 그녀는 1501년부터 1506년까지 요청사항을 적은 서신을 통해 Leonardo와 그림에 대한 상의를 했습니다. 이 계속된 서신들이 두 번째 이유이며, 세 번째는 - 그림의 배경입니다. 모나리자 뒤에 보이는 배경은 광활한 대지가 펼쳐진 Toscana****라기보다는 Mantova의 북쪽에 위치한 Garda호수를 연상시키기 때문이죠.


두 그림이 그려진 시기는 그다지 차이도 없습니다. Leonardo는 Isabella의 스케치를 그리고 2~3년 정도 후 ‘Monna Lisa’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확인시켜 줄 당사자가 없으니 모나리자엔 유독 많은 설들이 존재하고 그 설들은 항상 논란의 여지가 남아있죠. 2013년에 색까지 칠한 완성본이 스위스에서 발견돼 또다시 진품 여부*****의 논란이 된 이 스케치는, 당시 그녀의 강력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완성되지 못한 채 남겨졌고 현재 이 스케치는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Isabella의 스케치는 꾸며진 아름다움과 의도된 완벽함을 추구하던 당시의 초상화 스타일들과 달리 ‘Monna Lisa’처럼 실제 같은 초상화를 시도한 실험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Isabella는 일생 동안 많은 이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교류했는데 그 수가 30,000여 개에 달하며 현재 남아있는 서신만도 16,000여 개입니다. 그녀의 역사적 유산의 핵심은 바로 이 서신들이죠. 단순한 구매를 요구하는 주문서부터 예술, 정치, 가족, 여행, 건강, 음식, 사회적 관습, 역사 등 새로운 문화와 지식을 찾고 탐구하는 이 수많은 대화는 개인의 기록인 동시에 역사적으로 가치 있는 사료로, 그녀 덕분에 우리는 여성의 눈으로 본 르네상스를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Tiziano Vecellio


그녀의 초상화 중 가장 유명한 이 작품은 대략 1534-36년, 그녀의 나이 60대에 그려진 그림입니다. 작품의 모델은 그녀 자신의 젊은 날로, 나이가 들어서 그녀는 초상화를 위해 앉아있는 것을 아예 거부했죠.


당시 가장 유명한 초상화 작가였던 Tiziano는 1511년 Francesco Francia가 그린 그녀를 보며 이 초상화를 완성했습니다. Isabella는 Tiziano에게 23년 전 Francia가 그린 그림과 함께 그와 비슷한 시기 자신이 유행시킨 스타일의 의상을 보냈죠.

이렇게 탄생하게 된 초상화 속 그녀는 앳된 얼굴에 화려한 차림새로 높은 사회적 지위를 한껏 드러내고 있습니다. 당시 미의 기준이었던 금발에 뽀얀 얼굴, 금 · 은실로 무늬를 넣어 화려하게 장식한 소매와, 왼쪽 어깨에만 걸친 모피에 터번 같은 머리장식으로 꽤나 아방가르드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의상의 거대한 볼륨감과 금은빛 옷감의 화려함은 위엄 있는 권력의 상징이자 상류층만이 누릴 수 있는 미덕이었던 시기였습니다. 시대의 미적 포인트인 둥근 어깨를 더욱 강조하기 위해 어깨선이 끝나는 지점 아래에 거대한 풍선 같은 퍼프소매를 연결해주었고, 팔을 감싼 소매는 동방에서 온 화려한 실크 직물로 만들어 달아 주었지요.



당시 드레스엔 소매가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소매는 하나의 중요한 패션 아이템이었죠. 대부분 몸통과 다른 옷감과 색으로 만들었으며, 다양한 모양에 한쪽에만 보석과 수를 장식하기도 했습니다. 부를 과시할 수 있는 사치품으로 화려하게 장식하거나 아니면 거대한 부피로라도 존재감을 드러내야 했죠. 몸통과 동일한 천으로 만든 소매는 16세기 이후 유행하게 됩니다.



흡사 우리나라 가체를 얹은 듯한 머리 모양은 그녀가 유행시킨 그녀만의 헤어스타일 ‘Capigliara’입니다. 헤어피스와 실크 리본, 가죽으로 그물 모양을 만들어 머리를 감싼 후 진주나 다른 보석으로 장식했죠. 이 머리 모양은 북부에 위치한 이탈리아 반도 내 다른 공국으로 퍼져 크게 유행하며 귀족 여성들의 잇 아이템이 되었습니다.




이 머리장식은 ‘매우 이탈리아다운’ 스타일로, 머리 위에 얹는 큰 둥근 모양만 보자면 이미 한 세기 전인 14세기 후반부터 인기를 끌었던 머리 모양입니다. 르네상스의 가장 큰 특징이자 혜택인 개인의 창의성 발현으로 사람들은 마음껏 개성을 발휘하기 시작했죠.          



그 시작은 ‘Balzo’입니다. 14세기 후반~15세기 초, 여전히 남아있던 고딕 패션 -위로 높이 올라간- 의 흔적으로, 당시 미의 기준이었던 -제모까지 해가며 만든- 넓고 볼록한 이마를 더욱 강조하기 위한 머리장식이었습니다. 크고 볼륨감 있는 모양을 위해 금속으로 만든 틀을 머리 위에 고정하고 천으로 덮어 완성했죠. 이 머리는 집안에서 높은 위치의 남녀 모두 했던 머리장식입니다. 우리나라 다래처럼 머리를 땋아 높이 올린 모습도 보이네요.



15세기 초가 되자 여인들은 머리장식의 부피를 좀 줄이고 이것저것 올려 장식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원래는 처녀의 상징으로 꽃을 올려 장식했던 화관 ‘Ghirlanda’가 시간이 지나면서 단순성을 잃고 화려해지면서 귀부인들의 창의력을 자극하는 잇 아이템이 되었죠. 화려한 공작 깃털로 감싸고 귀금속으로 장식하면서 장인정신과 부의 상징이 되어 유행했습니다.




이후 거의 100년 정도가 흘러 16세기 초, Isabella는 ‘Capigliara’를 만들어냅니다. 덮어도 머리 모양이 비치는 실크나 그물 모양의 망을 이용해 머리를 감싸 도넛 모양으로 만든 뒤 온갖 화려한 장식을 얹었죠. 이 머리 모양은 Isabella의 유명세 덕분인지 좀 더 널리 퍼지며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녀는 자신만 할 수 있도록 이 스타일을 소유하고 싶어 했지만 그녀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Capigliara는 빠르게 퍼져나갔습니다.

어디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녀가 주변인들과 나눈 서신에서 처음 Capigliara가 등장한 건 1509년으로 그 내용으로 보아 그녀 스스로 만들었다는 건 확인할 수 있습니다.




Balzo와 Ghirlanda가 유행하던 시절(15세기)엔 남자도 머리에 큰 천을 얹고 다녔습니다.

15-16세기 르네상스 시절에 급격한 경제와 문화의 발전은 ‘다른 문화와의 교류’ 덕분이죠. 특히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였던 베네치아로 동방의 다양한 문물들이 들어오게 되면서 많아진 돈을 드러내고 싶은 새로운 상인 계층 - ’부르주아’의 등장으로 거리는 패션쇼장이 되었습니다. 다양한 문화가 섞인 패션이 좀 더 자유롭게 유행하며 주변 공국으로 열심히 퍼져나갔죠.


더 발달된 문명에서 온 새롭고 멋진 문물에 마음이 혹했던 이들은 그 멋진 것들을 들고 온 그들의 모습에 더 감탄했습니다. 철학과 지식, 생각이 중요했던 르네상스 시대를 살아가고 있던 유럽인들에게 머리가 강조되는 이 크고 아름다운 머리장식은 신비롭고도 강렬한 힘을 느껴지게 했으며 위대한 지식의 근원처럼 여겨졌습니다. 하여 귀족들과 지도자들, 그리고 돈 많은 남자들도 머리에 큰 천 덩어리를 얹고 다니기 시작했죠.




이렇게 동방에서 유래된 패션이라고 보는 게 설득력 있어 보이지만, 유럽은 다른 유래를 들기도 합니다. Chaperon(fr)은 고딕 후기(1350-1450)에 썼던 후드가 달린 짧은 어깨 망토로 프랑스에서 농민이나 노동자들이 입었던 작업복인데,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면 Liripipe(fr)라 불리는 모자의 긴 꼬리 부분을 돌려 감아줘 악천후를 견뎌냈고, 이후 하층민들이 하던 이 패션을 때마침 동방의 이국적인 취향을 선호했던 부유한 젊은이들이 따라 해 이 천을 모두 말아 머리에 올리고 다니면서 유행이 되었다..라고 하지만 그 모습이 너무나 동방의 터번 같기는 합니다. 시기 또한 교역이 활발하던 때와 맞고요.




Balzo를 보고 오스만 제국 술탄의 둥근 터번이, Capperone(it)를 보고 천을 말아 올린 터번이 자연스레 떠오르는 건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

유래를 따지고 들자면 끝이 없고 비슷하다고 하여 무조건 따라 했다고 할 수는 없으나, 노동자들의 복식에 '동방의 취향'이 더해져 귀족들이 취한 패션이라기보다는 Capperone와 터번 패션은 따로 구분하는 게 더 적절한 듯합니다.



* Turca – 넓은 소매가 달린 길고 앞이 열려있는 겉옷

** 15세기 이탈리아 반도 내 3대 사치 공국은 피렌체, 베네치아, 로마

*** 잡지가 없던 시절 14세기부터 인형에 옷을 입혀 보내 각국의 최신 궁정 패션을 주고받음

**** 그림을 요구한 상인이 살던 곳이 Toscana 지역의 Firenze

***** 스위스에서 발견된 완성본에 대한 진품 여부에 대한 논란





사진출처: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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