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밀라노의 패션리더 Beatrice d'Este
1475년 6월, 후계자를 고대하며 희망에 차 있던 페라라{Ferrara} 궁정에 힘찬 아이의 울음소리가 퍼졌습니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또 여자아이였죠. 페라라의 궁정 일기는 이렇게 역사를 기록했습니다.
… 남자아이를 원했던 에르콜레 1세는 기뻐하지 않았다
기다리던 아들이 아니자 부부는 깊은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첫째 딸 이사벨라 데스테{sabella d’Este}를 품에 안고 큰 행복을 느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반응이었죠.
그 다음 해엔 그렇게 고대하던 아들이 태어나, 부모의 관심에서 늘 조금은 뒷전이었던 베아트리체 데스테{Beatrice d’Este}는 두 살 무렵부터 할아버지 페르디난도 1세{Ferdinando I}에게 맡겨져 조용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결혼 후엔 밀라노의 패션리더가 되어 화려한 삶을 살다 21살의 이른 나이에 갑작스레 생을 마감합니다.
나폴리 왕국
베아트리체의 엄마 엘레오노라{Eleonora d’Aragona}는 르네상스 시절 이탈리아 반도의 남부를 장악했던 나폴리 왕국의 공주로 페라라 공국의 에르콜레 1세와 결혼해 가정을 꾸리며 살던 어느 날, 아버지인 나폴리 왕 페르디난도 I세가 두 번째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참석차 나폴리 왕국으로 떠나죠. 두 살이 된 베아트리체는 언니 이사벨라와 함께 임신한 어머니의 손을 잡고 길을 나섰습니다.
그렇게 나폴리에서 지내며 할아버지의 결혼식을 잘 마쳤을 때쯤 페라라에서 급한 연락이 오죠. 에르콜레 1세가 전장으로 떠나야 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엘레오노라는 막 네 번째 아이를 낳은 참이었지만 남편 대신 페라라를 지켜야 했기 때문에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엘레오노라의 아버지는 손녀 베아트리체와 막 낳은 손자를 두고 가라며 딸을 설득했고, 엘레오노라는 첫째 딸 이사벨라만 데리고 페라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렇게 베아트리체는 8년이란 긴 시간 동안 나폴리 궁정에서 자라게 되죠. 당시엔 아들은 멀리 보내 공부시키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딸이 어머니에게서 떨어져 자라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비록 어린 시절 부모의 사랑은 받지 못했지만, 페라라 공국이 전쟁에 연루되어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 베아트리체와 남동생은 강하고 부유했던 나폴리 궁정에서 조부의 특별한 사랑 아래 풍요롭고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밀라노 궁정과의 약혼
여러 도시국가로 나눠져 있던 시대에 동맹은 필수였고, 이러한 동맹을 더욱 탄탄히 하고 유대감을 형성하는 데에는 결혼만 한 것이 없었죠. 에스테 가문의 자식들 또한 어린 나이에 약혼자들이 정해졌는데, 베아트리체의 상대는 이미 비공식 자녀까지 있던 28살의 밀라노 섭정 루도비코{Ludovico Sforza}였습니다.
다소 못생긴 생김새로 태어나 본의 아니게 어머니를 놀라게 했던 루도비코는 1452년 밀라노에서 태어났습니다. 루도비코의 어머니는 남편이 전투로 잠시 밀라노를 떠나 있던 사이 태어난 아이의 소식을 전하고 이름을 지어주기 위해 남편에게 편지를 보내죠.
가족 그림 속 유난히 까만 아이가 바로 루도비코로, 짙은 피부에 검은 눈과 머리카락을 가지고 태어난 루도비코를 아버지는 어릴 적부터 ‘Maurum(=Moro)’이라 부르곤 했습니다. 하여 그의 정식 이름인 'Ludovico Maria Sforza'보다 루도비코 일 모로{Ludovico il Moro}라 불렸는데, 보통 ‘검은 머리와 어두운 피부색 때문에 무어인(Moor)을 뜻하는 모로{Moro}로 불렸다’ 라거나 ‘밀라노에서 실크 생산을 개발하려는 루도비코의 정책 -뽕나무를 밀라노에서는 모론{Morón}으로 부름- 때문에 일 모로{il Moro}로 불렸다’라고 알려져 있죠.
그리고 밀라노에서 전해 내려오는 전설도 있습니다.
어린 시절 매우 성급하고 고집스러운 성격 탓에 ‘토로{Toro(황소)}’라 불렸던 공작 아들 루도비코에게는 평소 잘 씻지 않고 더러운 얼굴로 다녀 ‘모로{Moro}’라는 별명으로 불린 평민 출신 친구 체사리노가 있었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이 장난꾸러기 두 친구는 궁정 사람들을 놀래 킬 계획을 세우죠. 외모가 비슷했던 두 친구는 서로의 옷을 바꿔 입고 어른들을 속이기로 합니다. 루도비코는 거만한 어른들의 황당하고 놀란 표정을 보고 싶었습니다.
깨끗이 씻은 체사리노가 루도비코 옷을 입고 어른들이 모여 있는 무도회장에서 루도비코 행세를 하고 있을 때, 루도비코는 줄을 타고 굴뚝을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미끄러져 벽난로에 다리만 나온 채로 망토에 의지해 매달려 있게 됩니다. 모두가 놀라 우왕좌왕할 때 체사리노는 힘을 다해 루도비코의 다리를 잡아당겨 구해내죠. 굴뚝의 그을음으로 더러워진 루도비코는 놀란 아버지에게 장난이었음을 밝혔고, 이후 진짜로 힘이 센 체사리노가 ‘토로’로 불리고 피부가 재로 그을려 더러웠던 루도비코는 ‘모로’가 되어 불렸습니다.
어디에서 들어본 내용 같지 않나요?
이 전설을 들은 마크 트웨인이 영감을 얻어 쓴 작품이 바로 ‘왕자와 거지’라고 합니다.
역사 속에 등장하는 루도비코를 더 알아보자면...
루도비코가 재위하던 시절 밀라노 궁정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나 브라만테 같은 이들이 활동했는데, 다빈치의 유명한 작품 산타마리아{Santa Maria delle Grazie}성당의 벽화 [최후의 만찬{Cenacolo}]을 의뢰한 이가 바로 루도비코입니다. 또한 레오나르도의 유명한 4대 여성 초상화 중 무려 두 명이 루도비코의 정부이기도 하죠. 적장자 조카를 핍박하고 자신의 이익때문에 프랑스를 불러들여 이탈리아 반도를 위험에 빠트리기도 했던 루도비코는 이래저래 역사적 인물임에는 틀림없는 듯합니다.
그렇게 '일 모로'로 불리게 된 루도비코는 무럭무럭 자라 권력욕 넘치고 여성편력이 화려한 그런 청년으로 성장하죠.
1480년 말, 조카의 섭정으로 실질적인 밀라노의 지도자가 되면서 합법적으로 권력을 구축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한 루도비코는 자신에게 힘을 실어줄 가문의 신붓감을 물색하기 시작했습니다. 공작의 자리를 지키고 있던 조카의 약혼녀가 바로 나폴리 왕국 왕세자(Alfonso II세)의 딸 이사벨라 다라고나{Isabella d’Aragona}였기 때문입니다. 이대로 두었다간 힘 있는 나폴리 왕가를 사돈으로 둔 조카에게 섭정의 자리를 내놓고 다시 모든 걸 돌려줘야 할지도 몰랐습니다. 그러기 전에 적절한 조치를 취해 놔야 했죠.
하여 머리를 쓴 루도비코는 또 다른 나폴리 왕의 손녀를 신붓감으로 정합니다. 바로 근처 페라라 공국 에스테 가문의 5살 된 맏딸 이사벨라 데스테였죠.
하지만 이사벨라는 바로 얼마 전 만토바의 프란체스코 2세{Francesco II}와의 약혼이 성사된 후였습니다. 밀라노의 힘 있고 부유한 스포르차 가문과의 동맹을 놓칠 수 없었던 아버지 에르콜레 1세는 부인의 조언을 받아 루도비코에게 4살 된 둘째 딸을 제안하죠. 현명하고 정치적 능력이 뛰어났던 엘레오노라의 계략이었지만, 사실 루도비코에겐 더 좋은 기회였습니다. 베아트리체를 특히 예뻐했던 나폴리의 왕인 할아버지 페르디난도 I세가 이 결혼에 큰 관심을 보인다는 사실이 더욱 루도비코의 구미를 당겼죠.
이로써 4살 된 베아트리체와 28살의 루도비코의 약혼이 성사되었고, 루도비코는 에스테 가문뿐 아니라 아라고나 왕가로 까지 동맹을 확장하는 수를 마련하게 됩니다.
약혼 후에도 나폴리 궁정에서 별 탈 없이 지내던 베아트리체는 1485년 어머니의 청으로 페라라로 돌아오게 되는데, 정치적인 계산이 빨랐던 엘레오노라는 긴 전쟁으로 페라라의 재정상태가 어려워지자 루도비코의 환심을 사기 위해 딸을 일찍 집으로 불러들였습니다. 루도비코는 약혼녀가 페라라 궁정에서 신부수업을 받으며 자신과 가까이서 자주 만날 수 있게 되길 바라고 있었죠. 첫째 딸 이사벨라에겐 애정이 먼저 앞섰던 엘레오노라였지만 자신이 키우지도 않았던 베아트리체에겐 정치적인 입장이 먼저였습니다.
부모님의 사랑은 받지 못했지만 대신 손녀를 딸처럼 여기며 아껴줬던 할아버지는 베아트리체가 계속 자신의 보호 아래 안전하고 행복하게 지내길 바랬지만, 나폴리 또한 반란으로 시끄러워지자 보호 차원에서 손녀를 페라라 궁정으로 돌려보내기로 합니다.
베아트리체가 떠나는 날, 두 궁정에서 그녀의 위치는 온도차가 났죠. 기품 있고 사랑스러운 공주 베아트리체를 사랑했던 나폴리는 눈물로써 그녀를 떠나보냈지만, 페라라는 다소 냉정한 태도로 8년 만에 돌아온 공주를 맞이했습니다. 궁정 연대기에는 그녀가 돌아왔다는 소식도 제대로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10살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 베아트리체는 그래도 행복했습니다. 페라라 궁정은 온갖 재밌는 것들로 가득했고 무엇보다 언니와 동생들이 있었기 때문이죠. 특히 언니 이사벨라와는 친구처럼 지내며 함께 공부하고 악기를 켜며 춤을 배웠습니다. 인문학과 방대한 고전 교육에 힘쓴 페라라 궁정의 교육 덕분에 두 공주는 교양 있고 세련된 여인들로 성장하죠. 정작 집으로 돌아온 이후엔 결혼이 늦춰지고 있었지만 베아트리체는 오히려 이런 상황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은 생각이 달랐지요. 당시 가장 강하고 부유했던 밀라노 궁정과의 동맹이 깨질까 노심초사하던 아버지 에르콜레 1세는 베아트리체가 페라라로 돌아온 이후 루도비코에게 딸의 그림도 보내고 지속적으로 결혼에 대한 논의도 했지만, 루도비코는 새삼 베아트리체의 나이가 어리다는 둥 국정일이 바쁘다는 둥 결혼식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습니다.
첫째 딸 이사벨라의 경우엔 먼저 딸의 어린 나이를 이유삼아 여러 번 결혼을 연기했던 엄마 엘레오노라는 둘째 딸의 혼사는 행여 파투 날라 전전긍긍하며 딸보다는 나라를 더 생각하는 태도를 보였죠. 루도비코에게 체칠리아라는 공식 정부가 있었기 때문에 더 초조해졌습니다. 체칠리아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4대 여성 초상화 중 하나로도 유명한 여인이지요.
하지만 여유 있던 루도비코도 1488년 겨울 합법적인 공작이었던 조카 지안 갈라아초{Gian Galeazzo}가 결혼하고, 이듬해 2월 신부 이사벨라 다라고나가 밀라노에 도착하자 마음이 급해졌던지 부랴부랴 특사를 페라라로 보내 결혼을 위한 구체적인 논의를 시작합니다. 후계자가 있다면 자신이 밀라노의 공작이 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죠.
그런 급한 마음을 읽은 정치 고단수 어머니 엘레오노라는 행여 결혼이 깨질라 노심초사하던 자신들의 입장은 숨긴 채 페라라에 유리한 수를 두며 결혼에 대한 계약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두 궁정 간의 유대를 더 강화하기 위해 베아트리체의 두 남동생과 스포르차 가문의 여식들의 결혼도 결정되었지요.
한 겨울의 결혼
루도비코는 점성술사들과 상의해 별자리를 보고 결혼식 날을 택했는데, 너무 추워 굳이 선택하지 않은 1월이었습니다. 너무나 배려 없던 결정이었지만 1490년 12월 말 베아트리체는 결혼을 위해 밀라노로 행하는 여정을 시작하죠. 보통 겨울엔 3월 중순까지 1미터의 눈이 내렸고, 그해 특히 혹독한 겨울을 나고 있었지만 더 이상 결혼식을 연기할 수 없었던 엘레오노라는 아이들을 이끌고 춥고 힘든 길에 나섰습니다. 결혼식에 초대받은 언니 이사벨라 데스테도 함께였습니다.
엘레오노라가 남편과 주고받은 서신에서 표현된 ‘잔 속의 와인이 얼어버릴 정도’의 너무나도 춥고 힘들었던 약 20여 일간의 긴 여정 끝에 마침내 결혼식을 올릴 파비아{Pavia}에 도착했죠. 루도비코는 사람들에게 밀라노 공작인 조카를 지배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밀라노가 아닌 근처 영지 파비아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새신부가 탄 배가 다리를 지나자 화려하게 꾸며진 말을 탄 루도비코가 강둑에 서서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는 손을 뻗어 하선하는 베아트리체를 도왔고 부부의 첫 만남은 그렇게 이루어졌죠. 매력적이고 기품 있는 베아트리체의 모습에 루도비코는 매우 흡족했고 그 마음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사랑에 잘 빠지는 새신랑은 장인 에르콜레 1세에게 여러 번 서신을 보내 새신부에 대한 만족감과 감사함을 표현했죠.
다음 날 거행된 결혼식에서 베아트리체는 수많은 진주와 보석이 달린 긴 흰색 드레스를 입고 어머니 엘레오노라와 언니 이사벨라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제단에 섰습니다. 혼인성사 후 신부의 마음에 들고 싶었던 루도비코는 새신부 일행을 완벽하게 맞이할 준비를 하기 위해 먼저 밀라노로 떠났고, 베아트리체는 파비아에서 준비한 축하행사를 즐긴 후 밀라노로 향했습니다.
루도비코는 이 결혼을 위해 몇 달 전부터 유명 화가와 조각가들을 불러들여 지오비아{Porta Giovia}성을 화려하게 장식했고, 결혼식 행렬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모든 도로와 다리를 보수했을 정도로 공을 들였습니다.
밀라노에 도착한 베아트리체일행은 마치 여왕의 입성처럼 느껴지는 분위기에 놀라움을 감추질 못했죠. 거리의 상점과 집들은 꽃과 화려한 커튼, 태피스트리로 장식되어 있었고, 온 도시가 환영의 물결로 가득한 축제의 분위기였습니다.
말을 탄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두줄로 길을 만들어 서있는 가운데 팡파레는 울려 퍼졌으며 환호하는 군중들 사이로 황금빛 조르네아{Giornèa}를 차려입은 루도비코가 베아트리체를 웃으며 맞이했습니다.
14세기 군사 복식에서 유래된 조르네아는 15세기 이탈리아에서 유행한 우아한 겉옷으로, 하루를 뜻하는 'giorno'의 어원에서 온 것처럼 매일 입는 일상복처럼 애용되었습니다. 그림 속 형형 색색의 의상들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엔 염색법이 매우 발달해 있었으며, 자주색이나 검은색 같은 비교적 까다로운 공정을 거쳐야 하는 어두운 색의 천들은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고 금실로 짠 의상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아무나 입을 수 없었죠. 격식을 차려야 할 때는 가문의 문장과 휘장으로 장식한 화려한 조르네아를 걸쳤는데 모피로 가장자리를 감싸고 안감은 실크로 마감했습니다.
조르네아는 남녀노소 모두 입었는데, 여성의 것은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형태였고 남성은 엉덩이까지 오는 형태였습니다. 남성들이 입은 조르네아의 가장 큰 특징은 튜브 형태의 주름으로, 천을 먼저 겹쳐놓은 뒤 바느질로 고정하거나 안쪽으로 띠를 둘러 천을 고정시켜 두툼한 주름 모양을 잡아주었습니다.
어깨만 이어진 앞 뒤 판을 걸쳐 입는 매우 편한 의상으로, 고정하지 않은 채 입거나 앞판 허리 부분에만 허리띠를 둘러 입었습니다. 지금 입어도 굉장히 편하고 유용할 디자인의 조르네아는 15세기 내내 남녀노소 모두에게 사랑받다 15세기 후반에 사라지죠.
발레 타이즈처럼 보이는 하의는 ‘칼제브라케{Calzebrache}’*로 중세 시절부터 착용한 긴 양말 같은 바지입니다. 남성 복식은 중세시대 발목까지 오던 긴 의복들이 르네상스를 지나며 점점 짧아져 상의와 하의로 나뉘기 시작했는데, 짧아지는 상의를 따라 발목이나 종아리까지만 가려주던 양말이 허벅지까지 올라오면서 바지 형태로 발전하게 되죠.
이렇게 남녀복식은 비슷한 튜닉을 입었던 것에서 벗어나 확연한 차이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유는 남성들의 과도한 인체 사랑의 결과라 하겠습니다.
15세기 초중반에는 분리된 형태의 칼제브라케를 허벅지까지 끌어올려 린넨으로 만든 속옷에 끈으로 고정시켜 입었으나 15세기 중후반에는 양쪽이 결합돼 엉덩이를 감싸주는 바지로 발전하죠. 발 부분은 발까지 모두 감싸는 형태와 고리바지처럼 고리로 된 형태가 있었습니다.
주로 모직물이나 벨벳, 실크로 만들었기 때문에 신축성을 주기 위해 바이어스 재단을 했지만 종아리 부분 같은 경우는 터주기도 했습니다. 중세 기간 동안 온몸을 최대한 가리고 다니다 점차 인체의 미를 찬양하는 수준까지 도달한 패션은 교회에서 외설적이라고 비난할 정도로 온 몸의 굴곡을 그대로 드러냈기 때문에, 입체재단이 발달하지 못했던 당시엔 크게 굴곡진 부분은 반으로 갈라 끈으로 엮어줘야 몸에 꼭 맞게 입을 수 있었습니다.
칼제브라케는 단색으로 입기도 했지만 양쪽 색이 다르거나 독특한 패턴이 들어가기도 했는데, 이는 집안의 문장과 휘장 속 패턴과 색으로 착용한 이들이 속한 가문을 알려주는 기능을 했죠. 유난히 밝은 색상과 화려한 패턴이 눈에 띄는 칼제브라케는 일종의 파티복과도 같았습니다. 카니발이나 파티 등에서 남자들은 화려한 칼제브라케로 한껏 멋을 냈습니다.
* 칼제브라케는 프랑스어로 Chausses(쇼오스)이다.
계획대로 모든 결혼절차가 끝난 이후엔 더없이 화려한 축제가 이어졌습니다. 결혼 축하 행사를 기획한 이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였죠. 일 모로의 위대함을 확인시키기 위해 화려하고 웅장한 스타일의 축하 행사를 준비했습니다. 베아트리체 일행은 놀랄 수밖에 없었지요.
일행이 도착한 광장에는 세개의 단상이 준비되어 있었는데, 한쪽 단상에서는 연주자들이 음악을 연주하고 있고 다른 한쪽에는 선물 꾸러미들이 쌓여져 있었습니다. 그 한 중간에 앉아 고위 공직자들의 인사를 받으며 공물을 받는 주인공이 되자 베아트리체는 새로운 기분을 느끼기 시작했죠.
자신보다 23살이나 많은 아버지뻘 루도비코에겐 별 관심 없었던 베아트리체는 그 시대 가장 중요하고 세련된 궁정의 지도자 부인이라는 역할에 매료되었습니다.
레오나르도가 선보인 불꽃놀이와 웅장한 회전목마는 다소 작은 공국에서 온 사람들의 눈에는 별천지로 보였고, 결혼 축하 행사만을 위해 반강제적으로 차출된 롬바르디아 지역에서 활동하는 모든 유명한 화가와 조각가들이 몇 달 동안이나 공을 들여 만들어놓은 -금색 별이 빛나는 하늘처럼 보이게 꾸며놓은 무도회장의 천장 밑에서 베아트리체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좋아하는 춤을 추며 자신을 위한 무도회를 만끽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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