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eatrice d'Este 머리 Coazzone
밀라노 공국의 성대한 환영을 받으며 안주인으로서 성공적인 데뷔를 마친 Beatrice d'Este는 특유의 통통 튀는 발랄함과 쾌활한 성격으로 밀라노 궁정을 유럽에서 가장 재밌고 인기 많은 축제와 파티의 중심지로 만듭니다.
남편 Ludovico는 "그녀는 내게 태양의 빛보다 더 소중하다"라며 Beatrice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죠.
Milano 궁정생활
15살의 어린 공주는 빠르게 공국의 안주인 자리에 적응해갔습니다. 남편에겐 이미 안주인 행세를 하던 공식 정부가 있었고 모든 것이 생소한 궁정에서의 생활은 녹록지 않았으나, Beatrice는 밝은 성격과 우아한 자태로 Ludovico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점차 궁정에서 그녀의 위치는 확고해졌죠.
어린 시절을 나폴리 궁정에서 자란 Beatrice는 스스로를 Este가문보다는 거대한 Aragona왕가의 후손으로 생각했고, 4살부터 왕실 공식행사에 참여하며 공주로서의 역할을 익힌 그녀는 궁정 내 여주인 노릇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자연스레 배어 있는 두 궁정(Napoli와 Ferrara)의 취향으로 안목이 높았던 Beatrice는 가장 먼저 밀라노를 가꾸는 일에 열중했습니다. 성들을 새롭게 단장하고 거리를 청소해 깨끗한 환경을 만들었는데, 그 선봉엔 무려 Bramante와 Leonardo da Vinci가 섰죠. 이들로 인해 밀라노의 건축물과 거리는 예술적인 아름다움으로 풍성해졌습니다.
물론 궁중에서의 생활이 행복하고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성 편력이 화려했던 남편으로 인해 적지 않은 고통을 받았는데, 모두에게 상냥하게 대했지만 때에 따라 오만하고 강한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했던 Beatrice는 남편의 여자 문제에 있어서도 자신만의 방식대로 처리하죠.
이미 10년 동안 공식 정부였던 Cecilia Gallerani를 인정하고 안정된 관계를 구축하고자 했으나, 결혼 초 Ludovico가 선물한 드레스가 Cecilia의 드레스와 같은 원단인 것을 알고는 단호히 거부했던 새신부는 Ludovico에게 그녀와의 관계도 끝내기를 강요했습니다.
Cecilia는 Beatrice가 Ludovico와 결혼할 때 Ludovico와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지만, 새신부의 마음에 들고 싶었던 Ludovico는 바로 정부의 남편감을 물색하기 시작했죠. 그렇게 Cecilia는 아이를 낳은 후 Ludovico가 골라준 Ludovico¹ 백작과 결혼하여 궁에서 나가게 됩니다. Leonardo da Vinci의 초상화 ‘흰 족제비를 안은 여인’으로도 유명한 Cecilia는 결혼 선물이 된 이 그림을 들고 궁을 떠났고, 이를 시작으로 Beatrice는 남편의 정부들을 거의 모두 궁에서 나가게 만들었습니다.
결혼 후 2년 뒤 아들을 낳은 Beatrice 덕분에 Ludovico는 1494년 꿈에 그리던 밀라노 공작이 되었지만, 열 여자 마다하지 않던 Ludovico는 또 다른 여인 Lucrezia Crivelli에게 푹 빠지죠. Lucrezia는 다름 아닌 Beatrice의 시녀였습니다. 결혼 전부터 원래 있어왔던 남편의 정부들보다 자신의 시녀였던 Lucrezia와의 관계에 Beatrice는 큰 배신감을 느껴 바로 궁에서 내보내려 했지만 남편의 정부들 중 유일하게 성공하지 못합니다.
이 두 여성 모두 Leonardo da Vinci의 그림으로 남았는데, 다빈치의 4대 여성 초상화 중 두 명이 이 여인들입니다. Ludovico는 정작 부인인 Beatrice의 그림은 요구하지 않았고 이는 Beatrice에겐 상처가 되었죠.
실망한 Beatrice는 남편과는 거리를 둔 채 밀라노 궁정을 진정한 르네상스가 구현되는 곳으로 만드는 것에 열중합니다. 예술 문화에 조예가 깊었던 그녀는 자신의 힘을 이용해 밀라노 궁정을 Baldassarre Castiglione, Bramante, Leonardo da Vinci와 같은 문화 및 예술계의 거장들로 둘러싸인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습니다.
당시 밀라노는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에 이은 사치 국가 중 하나로, 그중에서도 세련되고 우아한 패션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밀라노 궁정에 가야 했습니다. Ludovico il Moro의 시대, 패션에 있어서 풍요로움의 정점을 찍고 있던 밀라노였죠.
계급 사회에서 의상은 가장 먼저 신분을 드러내 주는 도구로, 왕족이나 귀족들은 자신이 속한 가문의 위대함을 보여주기 위해 사치스럽고 화려한 복장으로 치장했습니다.
‘예술이 옷보다 저렴’하게 평가되는 시대였던 당시엔, Leonardo da Vinci의 1년 임금이 50~100 Ducati로 추정되는 반면 숙련된 자수사는 200 Ducati를 받았고, 귀족들은 연간 수입의 40%를 의류에 지출할 정도로 패션산업이 부흥하고 있었습니다.
Trend Setter di Milano; 밀라노의 유행 선도자
Sforza가문의 일원이 된 Beatrice는 궁정 복식의 화려함에 창의력을 더한 자신만의 스타일로 밀라노 궁정을 장악했습니다. 그녀와 함께 밀라노는 패션의 도시로 거듭나게 되죠.
짧은 생을 살다 간 그녀의 가장 큰 업적은 패션으로 당대 ‘Novarum Vestium Inventrix (새로운 패션의 발명가)’로 평가받으며 마음껏 재능을 발휘했습니다. 복장에 관련된 법을 규정하고, 새로운 옷차림과 머리 모양을 선보이길 즐긴 진정한 유행 선도자였습니다. 그녀의 스타일은 귀족 여인들 뿐만 아니라 하층 계급에까지 영향을 미쳤죠.
음악과 춤, 축제, 무도회를 좋아했던 Beatrice는 종종 무도회에서 입을 드레스를 직접 디자인해 만들었고, 그런 아내의 열정적인 모습을 Ludovico는 뿌듯한 마음으로 온 동네에 자랑했습니다.
결혼 첫 2년 동안 84벌의 드레스를 만들었을 정도로 그는 어린 아내를 위한 금전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결혼 6개월 후, 페라라 대사 Giacomo Trotti가 페라라로 쓴 편지엔 'Ludovico경은 매일 최상급으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보석과 금으로 제작된 옷을 아내 Beatrice에게 선물한다'라 적혀있었죠.
검은 머리에 작은 키를 가졌던 그녀는 스트라이프 패턴의 드레스와 굽이 높은 신발로 외모를 보완했습니다. 그녀가 신었던 ‘Pianelle’는 유물로 남아 Vigevano 신발 박물관에서 볼 수 있죠. 하이힐의 원조격인 Pianelle는 14세기부터 베네치아 여인들 사이에서 유행한 높은 굽이 달린 신발로 Caterina de' Medici를 따라 프랑스로 건너가 하이힐로 발전하게 됩니다.
Beatrice의 과시적인 옷차림은 종종 정치적 목적을 띈 의도적인 표현으로, 공식 행사 때는 Ludovico가 선택한 로고와 모토 또는 가족의 문장인 '나침반과 붓'이 수놓아진 드레스를 입었습니다.
결혼 후 2년 뒤인 1493년 친정 페라라에 방문했을 땐 제노바 항구의 탑이 수놓아진 소매가 달린 드레스를 입고 등장했는데, 당시 밀라노의 지배를 받고 있던 제노바 공화국은 중세시대부터 베네치아에 버금가는 대표적인 해상 무역 국가로, 친정 페라라와는 사이가 좋지 못했습니다.
페라라가 베네치아와 소금 무역으로 인한 전쟁을 치렀을 때 베네치아편에 선 적국이었던 제노바를 당시 지배하고 있던 밀라노였기에, 굳이 친정의 적국을 상징하는 전리품을 소매에 새겨간 행위는 동맹 공국의 안주인으로서 힘을 과시하는 처사라 할 수 있죠.
Beatrice는 언니 Isabella d'Este뿐만 아니라 어머니 Eleonora와도 옷차림에 있어서 공개적으로 경쟁을 벌렸고 Ludovico는 든든한 지원자를 자처했습니다.
Ludovico와 Beatrice가 성상 앞에 두 아들과 무릎을 꿇고 있는 이 그림은 Ludovico il Moro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점을 상징하는 작품으로, 조카의 죽음으로 인해 통치권을 넘겨받은 Ludovico가 스스로 권력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정치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형과 조카를 독살해 자리를 차지했다는 숱한 의혹을 가진자답게 그 무엇보다 왕위 계승의 정당성이 필요했기 때문이죠.
Beatrice는 밀라노 공국이 번성했던 시기의 호화로운 궁정 패션의 전형적인 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마 끈과 보석으로 장식된 정교한 헤어스타일, 드레스의 탈착식 소매는 자수와 상감세공²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Beatrice의 머리’라 할 수 있는 ‘Coazzone’는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상징적인 머리장식이었습니다.
스페인에서 건너온 포니테일 스타일 'Cofia de Tranzado'로, 스페인에는 13세기 말~14세기 초에 처음 등장해 16세기 중반까지 애용되었으며 그 기원 -땋은 머리- 은 비잔틴에서 찾을 수 있죠.
Beatrice가 결혼식에서 선보인 이후 밀라노 궁정의 모든 여인들도 따라 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는데, 1495년 열렸던 Ludovico의 대관식 그림을 보면 궁정 여인들의 머리 모양이 모두 같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Coazzone는 2년 전 먼저 밀라노에 도착한 나폴리 공주인 Isabella d'Aragona³로 인해 이미 궁정에 퍼져있었으나, Beatrice는 이 머리스타일을 자주 하고 다니며 땋는 방식 등 자세한 지침을 만들어 궁정 여인들에게 사용을 장려했고 이러한 이유로 밀라노 공작부인의 머리라는 의미의 'Sforza 머리'로 세상에 알려지게 됩니다. 패션은 만들어진 곳과 생명력을 얻어 꽃 피우는 곳이 다르게 나타날 때가 많죠.
나폴리 왕국은 역사적으로 독일, 스페인,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 유럽의 승자들의 지배를 번갈아가면서 받았기 때문에 다양한 문화가 섞여 있는 독특한 지역으로, 당시는 스페인 점령기⁴였습니다. 나폴리 궁정에서 성장한 Isabella d'Aragona나 Beatrice는 스페인 문화에 매우 익숙했고 특히 스페인 패션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당시 여성의 아름다운 긴 머리카락은 강력한 유혹의 무기이자 여성스러움의 상징이었습니다. 도덕적 관점에서는 허영심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거나 느슨하게 묶는 스타일은 소녀나 약혼하지 않은 여성들의 전유물이었죠. 1968년작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줄리엣도 이 헤어스타일을 하고 무도회에서 로미오와 춤을 췄습니다. 머리 모양 그 자체가 '나는 줄리엣이다'를 외치고 있는 것처럼 아름다운 줄리엣을 그대로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사자를 맨 손으로 찢어 죽이는 삼손의 힘이 머리카락에서 나오듯, 서양세계에서 머리카락은 힘과 관련된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권력과 권위의 표식으로, 옛 가톨릭 수도자들은 하느님께 복종하는 의미로 윗머리를 면도했을 정도죠. 중세시대엔 남성들의 머리카락 길이도 규제 대상이었고 성직자들은 턱수염과 콧수염을 기르지 못했습니다.
여인들의 머리는,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악마시 한 교회로 인해 베일로 가려졌습니다.
신에 대한 복종과 청결함을 나타냈던 베일은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며 점차 간소화되고 작아져 장식적인 기능이 강화된 다양한 형태로 변화합니다. 기혼의 여성들에겐 넓은 이마와 정교한 머리장식은 곧 부와 삶의 수준을 드러내 주는 지표였기 때문에 보통은 머리를 틀어 올려 천 또는 리본으로 고정해 화려하게 장식했으나, Este 자매 -Beatrice & Isabella- 와 Lucrezia Borgia와 같은 패션리더들로 인해 결혼을 하고도 길게 늘어뜨린 머리가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전체적으로 이마 끈 ‘Lenza‘, 캡 ‘Trinzale’ 그리고 길게 묶어준 ‘Coazzone’로 나뉘는 이 머리는 – 먼저 반으로 반듯하게 갈라 귀는 덮은 채 곱게 빗어 넘긴 머리에, 직물이나 금속으로 만든 그물 모양의 캡인 ‘Trinzale’를 써주고, 머리와 한데 모아서 묶어준 뒤 긴 헤어피스를 연결해 리본과 함께 엮어 'Coazzone'를 만들어줍니다. 그리고 뒷머리 캡을 고정해주면서 이마를 장식하는 이마 끈 'Lenza'를 둘러 완성했죠.
이마 끈 'Lenza'는 초기에는 간단한 끈이었습니다. 머리를 감싸는 베일이나 'Trinzale'가 흘러내리지 않게 고정시켜주는 기능적인 면이 강했던 'Lenza'는 이마 중간에 보석을 다는 것을 시작으로 점차 화려해지면서 장신구로써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죠.
프랑스 등 다른 유럽으로 퍼지면서 'Féronnière'라는 명칭으로 불렸는데 - 프랑스 왕 François I세의 정부 Madame Ferron(또는 Féron)이 매독 자국을 가리기 위해 이마 끈에 보석을 달아 착용한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 이 이야기는 19세기 Albert B. 의 François I 세와 정부 Féronnière의 음모에 대해 쓴 소설 'La Belle Féronnière'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Albert B. 의 소설 속 여주인공 Féronnière⁵는 프랑스 왕 François I세에게 매독을 옮겼는데, 이는 그녀의 남편이 부정을 저지르는 아내와 왕에게 복수하고자 매춘 업소에서 매독에 걸려와 그녀에게 옮긴 결과였다는 전설이 바탕이 되었죠. Féronnière는 이마의 흉터를 가리기 위해 보석을 단 이마 끈을 착용했는데, 이 장신구의 명칭을 자신의 이름을 붙여 Féronnière라 불렀습니다.
'Féronnière'는 Leonardo da Vinci의 그림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지금은 'Dama con l'ermellino (흰 족제비를 안은 여인)'로 더 유명한 Ludovico의 정부 Cecilia 초상화의 왼쪽 상단에는 'LA BELE FERONIERE LEONARD D’AWINCI'라 쓰여있는데.. 이 글귀는 da Vinci가 쓴 것이 아닙니다. 수세기 후* 추가된 것으로 D’AWINCI는 da Vinci를 발음하는 폴란드어 표기죠. 폴란드 왕가 Adam G. Czartoryski 왕자에게 구입된 후 폴란드에 도착한 지 얼마 안돼 복원가에 의해 추가된 글귀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복원가는 왜 ‘La bele Ferronniere’라 써놓았을까요?
이는 Leonardo의 4대 여인의 초상화 중 또 다른 하나인 ‘La belle Ferronnière’에서 온 것입니다.
Ludovico의 또 다른 정부 Lucrezia를 그린 이 초상화는 수 세기 동안 ‘La belle Ferronnière’란 잘못된 표기로 명명되어 왔죠. 프랑스의 Louis XII세가 Ludovico의 궁에서 약탈해갔을 가능성이 높은 이 초상화는 어떤 이를 그렸는지 모른 채 보관되어오다 1709년 프랑스 관리자였던 Nicolas B. 에 의해 ‘La belle Ferronnière’라 명명됩니다. 그는 중간에 루비가 달린 Lenza를 하고 있는 여인을 Francis I세의 정부 Madame Ferron으로 착각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렇게 Nicolas로 인해 Lucrezia의 초상화는 ‘La belle ferronnière’가 되었고, 이후 폴란드로 가게 된 Lenza를 한 Cecilia의 초상화도 같은 여인인 줄 알았던 폴란드 복원가로 인해 그림 상단에 “LA BELE FERONIERE LEONARD D’AWINCI”가 쓰여지게 된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두 초상화 모두 Madame Ferron이 아닌 것으로 판명은 났으나, 'Ferronnière'라는 이름은 남아 장신구의 명칭으로 자리 잡게 되죠.
* 1798년 Prince Adam George Czartoryski에 의해 획득된 후, 1800년 Czartoryski 가문의 소장품으로 편입
이 우아하고 공주 같은 느낌을 주는 스타일은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초까지 애용되다 19세기 부활해 다시 인기를 끌었는데, 매독이 퍼지기 시작한 15세기 말 유행해 파리 인구의 15%가 매독 환자였던 19세기 다시 부활한 것을 보면 흉터를 가리기 위한 패션과 아주 연관이 없어 보이진 않네요.
'Trinzale' 옆에 달려있는 황적색 루비가 박힌 장신구는 Ludovico가 선물해준 보석입니다. 무려 250.000 ducati로 당시 지방 마을 하나를 사는데 5.000 ducati 정도였다는 걸 감안하면 엄청난 액수의 선물입니다.
Beatrice는 진주와 리본을 좋아해 과하다 싶을 만큼 주렁주렁 달았고, 새로운 모양의 보석을 발명하기 위해 금 세공인과 교류하며 디자인에 열정을 보였죠.
금빛 새틴과 검정 벨벳 스트라이프가 배열된 Gamurra⁶에 탈부착이 가능한 소매를 리본으로 연결한 이 드레스는 Beatrice가 디자인한 작품입니다. 그녀는 종종 기하학적 무늬의 아라베스크 풍 드레스를 디자인해 입었는데, 이는 무어인 패션에서 받은 영향이었죠. 리본 장식을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Beatrice는 소매에 금빛 리본을 잔뜩 달아 Gamurra에 연결했는데, 이 과한 리본 장식은 Coazzone에 이은 그녀만의 특징적인 패션이었습니다.
당시에는 혁신으로 비쳤을.. 그 화려함에 다소 부담스럽기까지 한 이 패션은 사람들 앞에 등장함과 동시에 주목받을 수 있는 패션임에는 틀림없어 보입니다.
Gamurra 혹은 Camora라 불리던 이 의상은 여성용 기본 드레스입니다. 몸통은 꼭 맞고 발까지 오는 긴치마가 달린 단순하고 실용적인 드레스로, 15세기부터 16세기 초 이탈리아 여인들이 계급에 상관없이 모두 입었으며, 분리된 소매가 특징이죠. 리넨부터 실크까지 다양한 직물로 만든 Gamurra는 이탈리아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여성 드레스이기도 합니다. 몸에 밀착될 수 있게 절개가 들어간 '입체적인 재단'이 발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보통은 앞을 터 단추로 닫아주었는데, 임신한 경우 이 트임 부분을 조절하여 편하게 입을 수 있었고 때에 따라 뒤나 옆 선을 터주기도 했죠.
15세기 초까지만 해도 다소 꽉 끼는 소매가 드레스에 달려있었으나, 좀 더 자유로운 생각과 표현이 가능해진 인본중심의 르네상스는 이 꽉 끼는 불편함을 교회가 매우 싫어할 '절개'로 해결합니다. 절개한 부분으로 속옷이 드러나는 이 패션은 시대를 앞서가는 놀라운 패션이었습니다. 역시나 법으로는 항상 금지되어 있었지만 유행이 번지는 건 막을 수 없었죠.
어깨와 팔꿈치를 절개해 움직임이 용이해진 뒤에는 장식성이 더해졌습니다. 절개한 부분으로 보이던 속옷 Camicia⁷ 를 끄집어내 풍성하게 만들어 장식하다 아예 소매는 따로 만들게 되죠.
언제나 평민들과 구분 지을 표식을 찾던 귀족들의 새로운 아이템은 소매가 되었습니다. 소매는 점점 커지고 화려해졌으며 Gamurra와는 다른 색, 다른 원단으로 제작되었고 보석, 리본을 달아 장식했습니다.
이 부착식 소매는 부를 과시할 수 있는 사치품인 동시에 매우 실용성 높은 경제적인 아이템으로 여인들의 만족도가 매우 높았습니다. 소매만으로 새로운 드레스의 기분을 낼 수 있었기 때문이죠. 상황에 따라 갈아 끼울 수 있으니 집에서는 편하고 단순한 디자인의 소매를, 외출 시나 공식석상에서는 화려한 소매를 달아 연출했습니다.
밀라노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
진정한 르네상스를 구현하며 밀라노 궁정을 동시대 가장 재밌고 활발한 문화 교류의 장으로 만들고, 두 아들을 연달아 낳은 뒤 세 번째 아이까지 임신해 한 공국의 안주인으로서 위상을 공고히 하던 어느 날, 새해 축하파티를 즐기며 춤을 추던 중 Beatrice는 갑작스러운 복통을 느끼고 쓰러져 아이를 사산하고 맙니다. 몇 시간 후 그녀도 세상을 떠나죠. 그녀의 나이 향년 21세였습니다.
결혼 기간 내내 쉬지 않고 다른 여인들과 사랑에 빠져 아내를 힘들게 했던 Ludovico는 Beatrice의 갑작스러운 사망에 충격을 받아 실의에 빠졌고,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가진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다'라며 방 안에 틀어박혀 며칠간 나오지 않은 채 슬퍼했습니다.
조각가 Cristoforo S. 에게 작품을 의뢰해 석관을 만들고, 옷과 가구의 색을 검은색으로 바꿨으며, 아내가 사망한 화요일엔 금식을 하고 매일 두-세 번씩 미사에 참석했죠. 그녀를 위해 만든 시를 담은 책도 만들어 Beatrice를 애도했습니다.
짧은 생을 살다 간 그녀에 대한 평가는 '밀라노의 파티걸'정도로 다소 인색한데, Beatrice가 그렇게 일찍 생을 마감하지 않았더라면 밀라노의 역사가 달라졌을 거라 보는 시각도 있을 만큼 과소평가된 점도 있습니다.
그녀의 죽음과 함께 밀라노 공국에는 어두운 기운이 몰려오기 시작했는지, 아내를 잃고 무너져버린 Ludovico는 점성가에만 의지하며 방황했고, 결국 자신이 성문을 열어준 프랑스로 인해 '이탈리아 전쟁'이 일어나 포로가 되어 1508년 프랑스 성 지하에 갇힌 채 생을 마감하게 되죠.
¹ Ludovico Carminati de' Brambilla, 보통 'il Bergamino'라 불림
² 상감 세공 – 바탕색으로 짠 편직물 속에 다른 색으로 짠 무늬를 끼워 넣는 것처럼 짜 맞추는 방식
³ Isabella d'Aragona가 자신의 결혼식 축제 기간 동안 나폴리 궁정 스타일로 입었다는 기록 존재
⁴ 나폴리 왕이자 Beatrice의 할아버지 Ferdinando I di Napoli는 스페인 왕 Ferdinando II d'Aragona와 사촌관계로 본래 스페인 가문
⁵ Féronnière(es) - 소녀 Marguerite는 변호사 Le Féron과의 결혼으로 Madame Féron 이 되었고, 아름다웠던 그녀는 'La Belle Féronnière(아름다운 페론가(家)여성)'라 불림 / Ferronnière(it)
⁶ 지역별로 명칭이 달라짐. 피렌체에서는 Camora, 북부 쪽에서는 Zupa, Zipa, Socha (밀라노)
⁷ Camicia(it) = Chemise(fr/en) [슈미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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