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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와 경쟁하는 여인

; 기만적으로 고풍스러운 그녀

by MODA



깊은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조각상 같은 여인



La Belle Ferronnière, 1490–1497 ca.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는 Leonardo da Vinci가 그린 두 점의 여성 초상화가 있다. 그 유명한 걸작 [모나리자{Monna Lisa}]와 바로 이 초상화 [아름다운 페로니에레{La belle Ferronnière}]


모나리자보다 10년도 더 앞서 그려진 초상화 속 강렬하고 차가운 여인의 시선은 모나리자의 미소만큼이나 신비롭다. 다빈치 작품의 세계 최고 전문가인 카를로{Carlo Pedretti}는 이 초상화를 두고 우아하고 매혹적이며 ‘기만적으로 고풍스럽다’라 평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4대 여성 초상화, 그 세 번째

다빈치의 초상화라기엔 포즈가 다소 경직되어 있고 여인의 이목구비도 보통 그의 초상화 속 여인들의 얼굴보다 더 선명하고 무거워 그의 작품이 아니라는 의견도 있지만, 레오나르도의 그림이라 주장하는 전문가들은 여인의 강렬하고 심오한 눈빛은 모나리자의 미소만큼이나 레오나르도의 초상화라 특징지을 수 있는 요소라 평가한다.


다빈치는 '눈'이 사람의 ‘영혼을 표현하는 창’이라 여겼기 때문에 시선과 얼굴 표정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표현했다. 하여 그의 초상화는 무엇보다 먼저 얼굴을 집중적으로 관찰하게 된다. 그 속에는 화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들어있다.



여인의 또렷한 시선은 우리를(관객) 향하는 것 같지만 결코 서로 마주칠 일은 없다. 약간 위쪽의 사선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학자들에 따르면, 이 시선처리는 레오나르도의 배려의 장치로, 만약 시선이 마주쳤더라면 여인의 영혼이 뿜어내는 아름다움과 찬란함을 우리는 견디지 못했을 것이라 한다. 동시에 이 장치는 여인 또한 보호하는데, 그녀의 눈은 관객과 마주치지 않기 때문에 그 어느 누구도 그녀의 영혼을 차지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오직 그녀가 쳐다보고 있는 연인만이 사랑으로 그녀의 영혼을 소유할 수 있다는 레오나르도의 의뢰자 맞춤형 표현방법일 수도 있겠다.



잘못 붙여진 이름 [La belle Ferronnière]

여인의 차림새는 15세기 후반 밀라노 궁정 여인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여인의 이마에는 그림 명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보석이 달린 이마 끈이 자리하고 있다.



보석이 달린 이마 끈 렌자


오늘날 그림은 이 이마 끈의 영향으로 [La belle Ferronnière]라 불린다. 이마 끈 명칭으로 초상화의 이름이 되어버렸다. 물론 후대에 저질러진 실수다.

여인의 이마를 장식하고 있는 '렌자{Lenza}'는 15세기 후반 밀라노 여성들이 많이 애용했던 이마 끈 장식으로, 이마를 장식하는 것 외에도 뒷머리에 쓴 모자를 잡아주고 머리카락이 바람에 흐트러지지 않게 고정해주는 역할을 했다.

당시 밀라노에서는 ‘렌자’라 불렀는데, 왜 페로니에레{Ferronnière}가 된 걸까?


초상화 속 여인은 오랜 세월 동안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François I}의 정부 페롱 부인{Madame Le Féron}이라 여겨져 왔다. 1499년 프랑스가 밀라노 공국을 점령했을 당시 밀라노궁에서 약탈해갔을 가능성이 높은 이 초상화는, 오랫동안 화가 나 모델이 누군지 모른 채 프랑수아 1세의 소장품으로 보관되어오다, 18세기 초(1709년) 프랑스 왕실 그림 목록을 정리하던 왕실 회화 관리자에 의해 [La belle ferronnière]라 명명되었다. 그는 여인의 이마 장식을 보고 초상화의 주인공을 프랑수아 1세의 정부 페롱 부인으로 착각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또 다른 [La Belle Ferronière], 실제 페롱부인으로 추측되는 여인


전설에 따르면, 프랑수아 1세는 페롱 부인과의 첫 만남에 그녀를 침대로 끌고 가고 싶었고 그 과정에서 화가 난 그녀의 이마에 상처가 났는데, 다음날 페롱 부인은 끈에 보석을 달아 착용해 이마의 핏자국을 가렸다고 한다.


초상화 속 여인을 페롱 부인이라 여긴 관리자는 그림을 [La belle ferronnière]라 명명하였고, 이 그림명은 또 다른 레오나르도 초상화 [흰 담비를 안은 여인]에 큰 영향을 끼친다.

폴란드로 간 레오나르도의 또 다른 여성 초상화 [흰 담비를 안은 여인]을 본 복원가는 초상화 속 여인의 이마 끈만 보고 페롱 부인과 같은 여인이라 여겨 그림 상단에 [La belle ferronnière]라 적어 놓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이후 이 이마 끈 장식은 ‘페로니에레’라 불리며 19세기에도 재유행하며 사랑을 받았다.



여인의 정체는 루도비코의 정부 루크레치아

아직까지 논란은 지속되고 있지만, 초상화의 주인공으로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인물은 루크레치아 크리벨리{Lucrezia Crivelli}다.



Huius quam cernis nomen Lucretia,
Pinxit Leonardus, amavit Maurus..

‘의미 있는 그녀의 이름은 루크레티아
레오나르도가 그것을 그렸고,
일 모로*는 그것을 사랑했다’



당시 궁정 시인이 남긴 글은 초상화 속 여인이 루크레치아라는 주장을 뒷받침해준다.



*일 모로{Il Moro}는 당시 밀라노의 실질적인 공작이었던 루도비코의 별명



루크레치아는 체칠리아를 이은 루도비코의 ‘공식적인 정부’로, 그의 부인 베아트리체의 결혼식 들러리이자 시녀였다.

베아트리체와 결혼하고 난 직후, 새신부의 종용에 의해 사랑했던 정부를 갓 태어난 자식과 함께 내쫓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루도비코는 궁정에서 또 다른 사랑을 찾았다. 부인의 곁을 지키며 시중을 들던 시녀 루크레치아였다. 공작의 정부가 되기 전 이미 유부녀였던 루크레치아는 비범하고 빛나는 아름다움으로 유명했다.


결혼 전부터 골치 아프게 했던 남편의 정부 체칠리아를 겨우 쫓아내자마자, 다른 이도 아닌 자신의 시녀가 뒤이어 남편의 공식적인 정부가 되어버린 현실에 베아트리체는 분노하고 절망했다. 큰 배신감에 사로잡힌 베아트리체는 루크레치아 또한 궁에서 내보내려 여러 번 시도했지만, 유일하게 성공하지 못한 채 짧은 생을 마감한다.


생전 패션에 열정적이었던 베아트리체 자신이 궁정에 퍼트린 패션이 남편의 정부를 아름답게 꾸며주는 역할을 하며, 그림으로 남아 후대까지 알려질 줄은 짐작조차 하지 못 했으리라..



1968년작 '로미오와 줄리엣'


줄리엣의 머리로 더 유명한 루크레치아의 머리는 당시 밀라노 공국에서 유행하던 전형적인 스타일로, 공작부인 베아트리체가 퍼트린 그녀의 상징적인 머리장식 코아조네{Coazzone}다. ‘베아트리체의 머리’라 일컬어질 정도로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머리장식인 코아조네는, 스페인에서 건너온 스타일이지만 베아트리체가 결혼식에서 선보인 이후 밀라노에서 대유행했으며, 그녀는 본인만의 지침을 만들어 궁정 여인들에게 장려할 정도로 이 머리스타일을 좋아했다.



루크레치아의 코아조네(좌)와 렌자(위) / 베아트리체의 코아조네(우) - 공작부인답게 화려한 보석으로 장식된 머리


루크레치아는 드레스와 색을 맞춘 듯 작은 꽃 모양 중앙에 박힌 루비 외에 보석이 없는 비교적 수수해 보이는 차림새긴 하지만, 당시 루비는 가장 비싼 보석이었고, 드레스의 소재는 고급지고 디테일은 정교하다. 당시는 보석이 귀족의 수준과 가문의 혈통을 식별해주는 역할을 하던 시대였다.

무엇보다 그녀가 주로 귀족의 부인이나 자제들이 했던 지배자의 시녀*였음을 감안하고 본다면, 루크레치아는 적어도 귀족 집안 출신임을 짐작할 수 있다.



*시녀의 주요 임무는 왕족의 말동무나 같이 놀기, 옷 입는 거 도와주기 등




나무 난간 뒤의 그녀

나무 난간은 보는 사람과 초상화의 공간을 분리해준다.

이것은 마치 루크레치아 또한 관찰자가 되어 그림 너머의 우리를 보고 있는 느낌을 선사한다. 그녀의 몸통은 경직되어 있고 손은 감춰져 있다. 난간은 탈출로가 없는 폐쇄된 공간을 의미한다. 이 난간은 루크레치아와 관객 사이에 거리를 두고 싶어 한 의뢰인의 요청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어두운 배경과 이러한 구성 형식은 플랑드르 화풍*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상반신만 그려진 모델과 관객 사이가 석조 난간으로 구분되는 구도



나무 난간


몇 해 전까지도 그림에 대한 논란의 중심은 이 난간이었다. 레오나르도의 그림이라기엔, 과감히 모델 앞에 배치한 이 난간의 ‘전례없는 구성적 이상’ 때문에 학자들 사이에서는 그의 그림이 맞는지에 대한 논란이 이어져왔다. 난간은 입체감이 부족하고 그림자가 없는 등 결과적으로 완성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는데, 작은 세부사항에까지 깊은 의미를 두며 완벽을 기하는 레오나르도의 스타일과 구별되는 점은 진품 여부 논란에 힘을 실어주었다. 하여 이 나무 난간은 레오나르도의 조수에 의해 그려졌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했다.



기만적으로 고풍스러운 그녀

루도비코의 정부가 되었을 때 루크레치아는 이미 결혼한 상태로, 그림을 그릴 당시 30~38세였던 루크레치아는 루도비코의 어렸던 다른 여인들과는 다른 성숙한 태도와 고혹적인 아름다움으로 루도비코에게 다가왔다.


초상화 속 루크레치아의 자세는 경직되고 표정은 다소 차가운 듯 절제되어 있으나, 레오나르도는 그 뒤에 감춰진 그녀만의 강렬한 에너지를 붉은 색상과 빛으로 극대화시켰다. 왼쪽 상단에서 여인의 얼굴과 어깨에 떨어지는 빛으로 생긴 뚜렷한 그림자는 엄숙한 분위기를 조성해주며, 얼굴을 비추는 밝은 빛은 어두운 배경과 대비되어 관찰자가 오로지 여인의 모습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해 준다.




루크레치아와 루도비코의 사랑은 1499년 밀라노를 점령한 프랑스와 베네치아에 의해 끝이 난다. 당시 공작의 둘째 아이를 임신 중이던 루크레치아는 만토바{Mantova}로 피신을 가 만토바의 여주인 이사벨라 데스테의 비호 아래 안식처를 찾았다. 이사벨라는 밀라노의 공작부인이었던 베아트리체의 친언니로, 제부의 정부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편의를 봐주었다. 그녀가 친분을 이어가며 편의를 봐준 동생 남편 정부들의 공통점은 레오나르도의 초상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

'르네상스의 여자'로 문화와 예술을 사랑했던 이사벨라는 레오나르도가 그린 자신의 초상화를 그토록 가지고 싶어 노력했으나, 결국 레오나르도가 그려준 자신의 초상화 스케치로 만족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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