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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DA Dec 07. 2022

모나리자와 경쟁하는 여인

; 기만적으로 고풍스러운 그녀, La belle Ferronnière

 


깊은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조각상 같은 여인



La Belle Ferronnière, 1490–1497 ca.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는 Leonardo da Vinci가 그린 두 점의 여성 초상화가 있다. 그 유명한 걸작 [Monna Lisa(모나리자)]와 바로 이 초상화 [La belle Ferronnière]


모나리자보다 10년도 더 앞서 그려진 초상화 속 강렬하고 차가운 여인의 시선은 모나리자의 미소만큼이나 신비롭다. 다빈치 작품의 세계 최고 전문가인 Carlo Pedretti는 이 초상화를 두고 우아하고 매혹적이며 ‘기만적으로 고풍스럽다’라 평했다.






Leonardo da Vinci 4대 여성 초상화, 그 세 번째


다빈치의 초상화라기엔 포즈가 다소 경직되어 있고 여인의 이목구비도 보통 그의 초상화 속 여인들의 얼굴보다 더 선명하고 무거워 그의 작품이 아니라는 의견도 있지만, Leonardo의 그림이라 주장하는 전문가들은 여인의 강렬하고 심오한 눈빛은 모나리자의 미소만큼이나 Leonardo의 초상화라 특징지을 수 있는 요소라 평가한다.  


다빈치는 '눈'이 사람의 ‘영혼을 표현하는 창’이라 여겼기 때문에 시선과 얼굴 표정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표현했다. 하여 그의 초상화는 무엇보다 먼저 얼굴을 집중적으로 관찰하게 된다. 그 속에는 화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들어있다.



여인의 또렷한 시선은 우리를(관객) 향하는 것 같지만 결코 서로 마주칠 일은 없다. 약간 위쪽의 사선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학자들에 따르면, 이 시선처리는 Leonardo의 배려의 장치로, 만약 시선이 마주쳤더라면 여인의 영혼이 뿜어내는 아름다움과 찬란함을 우리는 견디지 못했을 것이라 한다. 동시에 이 장치는 여인 또한 보호하는데, 그녀의 눈은 관객과 마주치지 않기 때문에 그 어느 누구도 그녀의 영혼을 차지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오직 그녀가 쳐다보고 있는 연인만이 사랑으로 그녀의 영혼을 소유할  있다는 Leonardo 의뢰자 맞춤형 표현방법일 수도 있겠다.



잘못 붙여진 이름; [La belle Ferronnière]


여인의 차림새는 15세기 후반 밀라노 궁정 여인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당시 유행했던 스페인풍 탈부착식 소매가 달린 드레스와, 양갈래로 나누어 반듯하게 빗어 넘긴 낮은 포니테일 머리가 그렇다. 여인의 이마에는 그림 명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보석이 달린 이마 끈이 자리하고 있다.



보석이 달린 이마 끈 Lenza


오늘날 그림은 이 이마 끈의 영향으로 [La belle Ferronnière]라 불린다. 이마 끈 명칭으로 초상화의 이름이 되어버렸다. 물론 후대에 저질러진 실수다.

여인의 이마를 장식하고 있는 'Lenza'는 15세기 후반 밀라노 여성들이 많이 애용했던 이마 끈 장식으로, 이마를 장식하는 것 외에도 뒷머리에 쓴 모자를 잡아주고 머리카락이 바람에 흐트러지지 않게 고정해주는 역할을 했다.

당시 밀라노에서는 ‘Lenza’라 불렀는데, 왜 Ferronnière가 된 걸까?


초상화 속 여인은 오랜 세월 동안 프랑스 왕 François I세의 정부 Madame Le Féron이라 여겨져 왔다. 1499년 프랑스가 밀라노 공국을 점령했을 당시 밀라노궁에서 약탈해갔을 가능성이 높은 이 초상화는, 오랫동안 화가 나 모델이 누군지 모른 채 François I세의 소장품으로 보관되어오다, 18세기 초(1709년) 프랑스 왕실 그림 목록을 정리하던 Nicolas B.*에 의해 [La belle ferronnière]라 명명되었다. 그는 여인의 이마 장식을 보고 초상화의 주인공을 François I세의 정부 Madame Le Féron으로 착각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1699년 왕실 회화의 관리자로 임명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또 다른 La Belle Ferronière, 실제 Madame Le Féron라 추측되는 여인


전설에 따르면, François I 세는 Madame Le Féron과의 첫 만남에 그녀를 침대로 끌고 가고 싶었고 그 과정에서 화가 난 그녀의 이마에 상처가 났는데, 다음날 Madame Le Féron은 끈에 보석을 달아 착용해 이마의 핏자국을 가렸다고 한다.


초상화 속 여인을 Féron 부인이라 여긴 Nicolas B. 는 그림을 [La belle ferronnière*]라 명명하였고, 이 그림명은 또 다른 Leonardo 초상화 [Dama con l'ermellino]에 큰 영향을 끼친다.

폴란드로 간 Leonardo의 또 다른 여성 초상화 [Dama con l'ermellino]를 본 복원가는 초상화 속 여인의 이마 끈만 보고 Madame Le Féron과 같은 여인이라 여겨 그림 상단에 [La belle ferronnière]라 적어 놓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La belle ferronnière의 의미는 '아름다운 금속공의 부인'으로, 프랑스 궁정에서 일하는 금속공(또는 대장장이)의 아내였다는 설이 있음


이후 이 이마 끈 장식은 ‘Ferronnière’라 불리며 19세기에도 재유행하며 사랑을 받았다. 특히 매독이 유행했던 19세기에는 여인들이 얼굴의 흉터 자국을 가리기 위해 보석을 달아 애용했다.



여인의 정체는 Ludovico의 정부 Lucrezia Crivelli


아직까지 논란은 지속되고 있지만, 초상화의 주인공으로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인물은 Lucrezia Crivelli다.



Huius quam cernis nomen Lucretia,
Pinxit Leonardus, amavit Maurus..

‘의미 있는 그녀의 이름은 Lucrezia.
레오나르도가 그것을 그렸고,
Il Moro*는 그것을 사랑했다’



당시 궁정 시인이 남긴 글은 초상화 속 여인이 Lucrezia라는 주장을 뒷받침해준다.


*Il Moro는 밀라노 공작 Ludovico Sforza의 별명



Lucrezia는 Cecilia Gallerani를 이은 Ludovico Sforza의 ‘공식적인 정부’로, 그의 부인 Beatrice d’Este의 결혼식 들러리이자 시녀였다.

손녀 뻘인 Beatrice와 결혼하고 난 직후, 새신부의 종용에 의해 사랑했던 정부를 갓 태어난 자식과 함께 내쫓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Ludovico는 궁정에서 또 다른 사랑을 찾았다. 부인의 곁을 지키며 시중을 들던 시녀 Lucrezia였다. 공작의 정부가 되기 전 이미 유부녀였던 Lucrezia는 비범하고 빛나는 아름다움으로 유명했다.


결혼 전부터 골치 아프게 했던 남편의 정부 Cecilia를 겨우 쫓아내자마자, 다른 이도 아닌 자신의 시녀가 뒤이어 남편의 공식적인 정부가 되어버린 현실에 Beatrice는 분노하고 절망했다. 큰 배신감에 사로잡힌 Beatrice는 Lucrezia 또한 궁에서 내보내려 여러 번 시도했지만, 유일하게 성공하지 못한 채 짧은 생을 마감한다.


생전 패션에 열정적이었던 Beatrice는 자신이 궁정에 퍼트린 패션이 남편의 정부를 아름답게 꾸며주는 역할을 하며, 그림으로 남아 후대까지 알려질 줄은 짐작조차 하지 못 했으리라..



1968년작 '로미오와 줄리엣'


줄리엣의 머리로 더 유명한 Lucrezia의 머리는 당시 밀라노 공국에서 유행하던 전형적인 스타일로, 공작부인 Beatrice가 퍼트린 그녀의 상징적인 머리장식 Coazzone다.  ‘Beatrice의 머리’라 일컬어질 정도로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머리장식인 Coazzone는, 스페인에서 건너온 스타일이지만 Beatrice가 결혼식에서 선보인 이후 밀라노에서 대유행했으며, 그녀는 본인만의 지침을 만들어 궁정 여인들에게 장려할 정도로 이 머리스타일을 좋아했다.



Lucrezia의 Coazzone(좌)와 Lenza(위) / Beatrice의 Coazzone(우) - 공작부인답게 화려한 보석으로 장식된 머리


Lucrezia는 특별히 화려한 장식은 하지 않은 가장 기본적인 Coazzone로 꾸몄고, 머리를 고정해주는 이마 끈의 보석 외에는 별 다른 보석도 하지 않았다. 목걸이처럼 보이는 목에 감은 줄 끝에는 보석이 아닌 리본 장식이 달려있을 뿐이다.

Lucreiza는 드레스와 색을 맞춘 듯 작은 꽃 모양 중앙에 박힌 루비 외에 보석이 없는 비교적 수수해 보이는 차림새긴 하지만, 당시 루비는 가장 비싼 보석이었고, 드레스의 소재는 고급지고 디테일은 정교하다. 당시는 보석이 귀족의 수준과 가문의 혈통을 식별해주는 역할을 하던 시대였다.


무엇보다 그녀가 주로 귀족의 부인이나 자제들이 했던 왕가의 시녀*였음을 감안하고 본다면, Lucrezia는 적어도 귀족 집안 출신임을 짐작할 수 있다.


*시녀의 주요 임무는 왕족의 말동무나 같이 놀기, 옷 입는 거 도와주기 등



이 초상화는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이어야 했다


복원에 의해 약화되었지만 그녀의 뺨은 매우 붉었고 이마는 붉은 루비가 달린 끈으로 장식했으며, 매우 고급스러운 벨벳으로 만든 붉은 드레스를 입고 있다. 이 온통 붉은 기운강렬한 눈빛과 함께 그녀의 성격을 반영하는 요소로 해석된다. 그림을 그릴 당시 30대였던 Lucrezia는 성숙하고 권위 있는 여성이었다.


이 시대 여인들은 보통 초상화에서 티끌 하나 없이 하얗고 매끈한 얼굴로 묘사되었던 반면, Lucrezia의 얼굴은 홍조가 띠는 자연스러운 피부 톤으로 매끄럽게 표현되어 실제 사람인 듯한 현실성이 돋보인다. 이는 피렌체에서 습득한 자연주의 연구를 바탕으로 한 인물 묘사로, Leonardo의 표현능력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현대의 시각으로 보면 당연한 것들이 당시엔 모두 새로운 시도였으며, 도전으로 이뤄낸 성과였다.


드레스는 고급스러운 원단에 기하학적 패턴이 금사로 나눠져 있고, 스퀘어 네크라인 위에는 식물 문양 모티브가 금사로 정교하게 수놓아져 있지만, 당시의 기준으로 봤을 땐 화려하거나 사치스러운 차림새는 아니다. 하지만 왕의 여인이기에 유행 아이템을 고급스러운 소재로 세련되게 연출하고 있다.


15세기 말 밀라노 공국의 패션의 가장 큰 특징은 탈부착식 소매다.

당시 드레스의 몸통 부분을 빈틈없이 몸에 꼭 맞춰 입게 되면서 불편한 움직임은 절개로 해결했다. 드레스는 만나는 면을 서로 엮어주는 많은 끈으로 완성되었고, 소매는 아예 따로 만들어 몸통과 끈으로 묶어주었다.

신 앞에 몸매를 감추던 시대를 벗어나 사람의 몸을 먼저 생각하는 르네상스 시대였기 때문에 가능해진 패션이다.



Camicia / 당시 유행했던 탈부착 소매 사이로 끄집어 내 연출한 Camicia, 15C


몸통과 소매를 끈으로 엮어주면서 생긴 틈 사이로 속에 입은 Camicia(셔츠, 슈미즈)를 꺼내 드레스의 한 부분처럼 장식했는데, 가장 먼저 피부에 닿는 속옷 개념의 Camicia는 가볍고 부드러운 리넨이나 실크로 만들어 풍성한 부피감을 표현할 수 있었다. 하여 이 속옷을 누가누가 더 많이 풍성하게 꺼내는지 경쟁하게 되었고, 옷감을 많이 소비하면서 Camicia의 볼륨은 점점 커져갔다.

그렇게 Camicia는 사치품이 되었다. 당시 실크로 만든 Camicia는 기사의 갑옷만큼이나 비쌌다.


결국 1498년에 풍성하게 연출하는 Camicia금지령이 떨어지지만 유행은 막을 수 없었다. 언제나 평민들과 구분 지을 수 있는 방법을 찾던 귀족들로 인해 소매는 점점 커지고 소재도 화려해졌으며, 리본이나 보석 등을 달아 장식했다.



몸통과 소매를 이어주는 매듭 모양의 리본 / 목걸이에 걸려있는 리본


몸통과 소매 부분을 이어주고 목걸이에도 걸려있는 매듭 모양의 실크 리본은 리본 장식을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Beatrice가 유행시킨 아이템으로, 머리장식 Coazzone에 이어 Lucrezia를 아름답게 꾸며주고 있다.


실크 리본의 다소 딱딱한 주름과 리넨의 가볍고 부드러운 주름, 소매의 두꺼운 직물의 묵직하면서 부드러운 주름 등 Lucrezia의 드레스에서 표현된 직물의 다양한 주름은 Leonardo가 피렌체에서 그림의 기본을 익힐 때부터 특별한 관심을 보이며 연구한 부분이다. Verrocchio의 수하생으로 있을 때 Leonardo는 직물의 자연스러운 주름 모양을 표현하려 직접 점토로 모형을 만들어 수련했다.


1400년대 피렌체 화가들에게 옷감의 표현 능력은 중요한 부분이었다. 두꺼운 모직부터 있는 듯 없는 듯 살결이 다 비치는 실크 베일까지 다양한 질감의 직물이 발달했던 피렌체에서는 자연스러운 직물 표현 능력을 중요시 여겨 수련생들의 교육에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나무 난간 뒤의 그녀


나무 난간은 보는 사람과 초상화의 공간을 분리해준다.

이것은 마치 Lucrezia 또한 관찰자가 되어 그림 너머의 우리를 보고 있는 느낌을 선사한다. 그녀의 몸통은 경직되어 있고 손은 감춰져 있다. 난간은 탈출로가 없는 폐쇄된 공간을 의미한다. 이 난간은 Lucrezia와 관객 사이에 거리를 두고 싶어 한 의뢰인의 요청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어두운 배경과 이러한 구성 형식은 플랑드르 화풍*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상반신만 그려진 모델과 관객 사이가 석조 난간으로 구분되는 구도



나무 난간


몇 해 전까지도 그림에 대한 논란의 중심은 이 난간이었다. Leonardo의 그림이라기엔, 과감히 모델 앞에 배치한 이 난간의 ‘전례없는 구성적 이상’ 때문에 학자들 사이에서는 그의 그림이 맞는지에 대한 논란이 이어져왔다. 난간은 입체감이 부족하고 그림자가 없는 등 결과적으로 완성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는데, 작은 세부사항에까지 깊은 의미를 두며 완벽을 기하는 Leonardo의 스타일과 구별되는 점은 진품 여부 논란에 힘을 실어주었다. 하여 이 나무 난간은 Leonardo의 조수에 의해 그려졌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했다.



기만적으로 고풍스러운 그녀

Leonardo는 Lucrezia의 포즈를 수정했다.

몸통은 더욱 측면으로 돌리고 고개는 좀 더 정면으로, 시선은 더 왼쪽으로 향하게 하여 의도된 포즈와 시선처리로 절제되고 권위 있는 성숙한 여인을 표현하였다.


Beatrice의 친언니 Isabella d'este가 라이벌 아닌 라이벌로 여긴 동생의 궁정 상황을 알고 싶어 밀라노에 심어놓은 이가 Isabella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Ludovico는 아내를 속이고 있으며..
그는 매우 겸손하고 세상에서 가장 조심스럽게 Lucrezia와의 관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Ludovico의 정부가 되었을 때 Lucrezia는 이미 결혼한 상태로, 그림을 그릴 당시 30~38세였던 Lucrezia는 Ludovico의 어렸던 다른 여인들과는 다른 성숙한 태도와 고혹적인 아름다움으로 Ludovico에게 다가왔다.


초상화 속 Lucrezia의 자세는 경직되고 표정은 다소 차가운 듯 절제되어 있으나, Leonardo는 그 뒤에 감춰진 그녀만의 강렬한 에너지를 붉은 색상과 빛으로 극대화시켰다.

왼쪽 상단에서 여인의 얼굴과 어깨에 떨어지는 빛으로 생긴 뚜렷한 그림자는 엄숙한 분위기를 조성해주며, 얼굴을 비추는 밝은 빛은 어두운 배경과 대비되어 관찰자가 오로지 여인의 모습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녀의 초상화는 이러한 1490년대 초반 그림자와 빛에 대한 Leonardo의 연구 결과를 보여주며, 또한 [Monna Lisa]로 꽃 피운 그의 특별한 기술인 Sfumato의 연마 과정도 보여준다. 배경과 모델 사이의 ‘부드러운 전환’을 위해 그는 Sfumato*기법을 매우 점진적으로 적용했는데, 이는 모나리자보다 10여 년 더 앞선 시도로 그 의미가 남다르다.


*Leonardo가 개발한 기법으로, 색과 색 사이의 경계선을 흐려 부드럽게 처리하는 방법




여인의 강렬한 시선에 감탄과 궁금증을 자아내는 Lucrezia의 초상화는 전성기 르네상스 예술의 훌륭한 예로 꼽힌다.


Lucrezia와 Il Moro의 사랑은 1499년 밀라노를 점령한 프랑스와 베네치아에 의해 끝이 난다. 당시 공작의 둘째 아이를 임신 중이던 Lucrezia는 Mantova로 피신을 가 Mantova의 후작부인 Isabella d'Este의 비호 아래 안식처를 찾았다. Isabella는 밀라노의 공작부인이었던 Beatrice의 친언니로, 제부의 정부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편의를 봐주었다. 그녀가 친분을 이어가며 편의를 봐준 동생 남편 정부들의 공통점은 Leonardo의 초상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

'르네상스의 여자'로 문화와 예술을 사랑했던 Isabella는 Leonardo가 그린 자신의 초상화를 그토록 가지고 싶어 노력했으나.. 결국 Leonardo가 그려준 자신의 초상화 스케치로 만족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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