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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DA Feb 08. 2023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얼굴

; 그 이름은 모나리자, Monna Lisa



멍한 응시나 의식적으로 시선을 돌렸던 화가의 전작들과는 달리, 미소를 머금은 채 고요한 눈빛으로 관객을 관찰하고 있는 듯한 여인의 초상화



Ritratto di Lisa Gherardini, da Leonardo da Vinci, 1503-1519, Parigi, Musée du Louvre


그녀는 단연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얼굴일 것이다.

500년이 넘게 흐른 오늘날까지도 서양 예술의 상징으로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그녀의 힘은 무엇일까?..

그녀가 사뭇 궁금해진다.





Leonardo da Vinci의 4대 여성 초상화, 그 마지막

La Gioconda? Monna Lisa? Mona Lisa?

모나리자는 왜 이름이 여러 개일까?

[The Mona Lisa(모나리자)]는 초상화에 부여된 국제적인 이름으로, 이탈리아에서는 [La Gioconda]라 불린다. 모나리자가 된 이유에는 Giorgio Vasari*가 자신의 저서 [Le Vite]에 그렇게 적어놓은 데서 유래됐다.

* Giorgio Vasari - 16세기 화가이자 건축가, 미술사학자로 르네상스 시대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에 대한 책 [Le Vite (미술가 열전)]을 저술함



Leonardo는 Francesco del Giocondo를 위해 그의 아내 Monna Lisa의 초상화를 그렸고..



Monna는 'Madonna'*의 약자다. Madonna는 성인 여성을 정중하게 가리키는 '숙녀', 결혼을 했다면 '부인'정도의 의미를 가진 용어로, 중세 후기부터 쓰이던 다소 예스러운 칭호이다.

* Madonna = Mia donna, 성모 마리아 또는 신분이 높은 여성에 대한 존경의 의미를 가진 고대 경칭


영어로 Mona로 표기가 되면서 [Mona Lisa]가 공식적인 이름이 되었지만, 'n'이 빠진 모양새를 모욕적으로 여기는 이탈리아에서는 제대로 된 표기인 [Monna Lisa]로 쓰거나, 본래 통용되던- 남편 성으로 부르는 호칭인 [La Gioconda (Giocondo의 부인)]라 부른다. 프랑스에서도 [La Joconde]다. 작품명이야 후대에 정해진 것이니 바뀔 수야 있지만 출신국의 단어를 제대로 따르지 않는 건 당연히 모욕적일만하다.



그녀는 Lisa Gherardini?

모나리자에 대한 끊임없는 논쟁의 중심은 '과연 그녀는 누구인가'일 것이다. 5세기가 지난 지금도 초상화 속 여인의 신원은 불분명하다.

보통 그녀를 피렌체의 부유한 상인 부인인 Lisa Gherardini로 인식하는 강력한 근거는 Vasari가 저술한 책이다. 하지만 사실 그가 묘사한 모나리자의 모습은 루브르 박물관의 여인과는 좀 차이가 있다. Vasari는:



피부에서 털이 나는 모양을 보여주는 자연스러운 눈썹과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는 불그스름하고 부드러운 구멍이 있는 코, 붉은 입술과 생기 넘치는 얼굴의 색조..



를 가진 젊은 여인으로 묘사했고 이 모습은 우리가 볼 수 있는 다소 음침한 색조를 띄는 루브르의 모나리자와는 분위기가 다르다. 하여 Vasari는 모나리자를 실제로 본 적이 없으며 과장된 상상력으로 묘사했을 것이라 인식되어 왔다. [아일워스(Isleworth)의 모나리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Isleworth Lady Lisa, 16세기 초


Vasari가 장밋빛으로 묘사한 여인의 모습은 [아일워스의 모나리자]와 비슷한데, 그는 이 초상화를 직접 보았을 확률이 높다. 초상화는 영국의 예술가이자 수집가 Hugh Blaker가 1913년 Somerset의 오래된 귀족의 저택에서 발견했다. 그가 초상화를 구입해 자신의 스튜디오가 있는 Isleworth로 옮기면서 공식적으로 [아일워스의 모나리자]*가 되었다.

* 현재 소유자는 [Earlier Mona Lisa]로 변경


루브르의 모나리자보다 앞서 제작되어 Leonardo가 미완성 상태로 둔 모나리자의 초기버전으로 분석되며, 부분적으로 Leonardo에 의해 그려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 California대학교의 물리학자 John Asmus는, 동일한 화가가 아일워스와 루브르 모나리자의 얼굴을 그렸다는 확실성을 99% 입증하는 과학적 테스트를 실행, 하지만 여전히 학자들 사이에서는 논쟁 중


아일워스의 모나리자 / Raffaello Sanzio, Ritratto di Giovane donna, 1504


[아일워스의 모나리자]의 배경에는 양 옆으로 기둥이 있는데, 이는 1504년경 화가 Raffaello가 피렌체에 머물던 시기에 그린 스케치와 -모델의 포즈와 배경, 머리스타일- 매우 유사하다. Raffaello는 당시 Vecchio 궁의 홀에서 작업 중인 대가 Leonardo를 보았고 그가 그린 초상화 속 여인에 영감을 받아 스케치를 남겼다. 이후 Raffaello는 두 점의 여인의 초상화 또한 비슷한 구도와 분위기로 그려냈다.



Raffaello Sanzio, Lady with Unicorn, 1505-05 ca. / Maddalena Strozzi의 초상화, c.1506.


르네상스 시대에 거장의 그림을 모방하는 것은 오마주(Hommage)존경과 경의를 표하는 행위였다. 예술작품의 성공은 모조품과 패러디로 측정할 수 있는데 모나리자는 탄생부터 현대까지 끊임없이 모방되고 패러디되었으며, 절도·훼손 등 사건사고에서도 중심에 있었다. 그것은 모나리자만이 갖는 힘이 되었다.  



Cicero의 'Epistolae ad familiares'(1477) 속 Agostino의 손글씨


그녀가 Lisa Gherardini로 인식되는- 비교적 최근에 밝혀진 근거로는, 2005년 독일학자 Armin Schlechter가 발견한 문서다. 그는 오래된 문서를 조사하던 중 한 문서의 여백에 손 글씨로 쓴 주석을 발견했는데 이는 피렌체의 관리 Agostino Vespucci가 1503년 10월에 쓴 것으로, “Leonardo가 Lisa del Giocondo의 초상화를 작업하고 있다”라고 언급한 내용이었다. 500여 년이 넘도록 이어져온 수수께끼가 해결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는 그저 Leonardo가 Lisa del Giocondo라는 피렌체 여인의 초상화를 그렸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루브르 박물관의 모나리자가 같은 여인이라는 건 확신할 수 없다는 게 박물관측의 입장이다.


한편, Leonardo의 조수 Salaì가 1525년 사망하면서 작성된 소장품 목록에는 [La Gioconda]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루브르 박물관의 모나리자는 이미 1519년 François I세의 왕실 컬렉션에 인수되었기 때문에 Salaì가 소유하고 있던 모나리자와 루브르 박물관의 모나리자는 다를 확률이 높다. 학자들은 이미 두 개의 모나리자가 존재한다고 주장해 왔었다.



오래된 귀족가문 Gherardini집안의 딸 Lisa와 실크 사업으로 성공한 부유한 상인 Giocondo집안의 아들 Francesco의 결혼

Lisa는 Gherardini di Montagliari라는 오래된 귀족가문의 자손이다. 피렌체 공화국의 건국가문 중 하나로 중요한 역할을 하며 1100년부터 피렌체 정치에 참여했으나, 세력싸움에서 밀려나며 14세기에 그들의 가족은 도시에서 추방되었다. 선조들은 토스카나의 넓은 땅과 큰 건물을 소유했고 조상들 중 일부는 영주이기도 했으나, 많은 재산은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자손들과 함께 사라졌다. Lisa의 아버지 Antonmaria는 6개의 농장을 소유한 상인이었지만, 종종 자금부족에 시달려 세 번째 결혼으로 얻은 Lisa가 막 태어났을 무렵에는 딸에게 책정해 줄 지참금조차 없을 정도였다.


내세울 건 오래된 가문의 이름뿐이었지만 그래도 효력은 있었는지, 첫째 부인이 죽은 후 맞이한 두 번째 부인은 Medici 가문과 친밀하고 힘 있는 Rucellai 가문의 여인이었다. 그녀 또한 아이를 낳다가 일찍 죽었지만 Rucellai가문과의 교류는 계속 이어졌다. 이러한 영향 때문인지 Lisa는 어린 시절 Lorenzo de’ Medici의 딸 Contessina와 아들 Giuliano의 놀이 친구로 지낼 수 있었다.

이러한 친분은 Lisa에 대한 첫 기록인 Antonio De Beatis가 언급한 “Giuliano de' Medici가 의뢰한 피렌체 여인”이라는 구절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둘은 어릴 적 친구이자 애인으로 Giuliano*가 그림을 의뢰했다는 설이 있다.

* Giuliano는 현대에도 꽤 유명한 인물인데, 그는 바로 미술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기본으로 그리는 데생용 석고상- 고수머리의 잘생긴 ‘줄리앙’이다.


Lisa의 아버지는 오래된 가문을 내세워 상류 사회에 발 디딜 기회를 엿보았고, Lisa보다 14살 많은 홀아비지만 부유한 상인이었던 Francesco del Giocondo와 결혼시킬 기회를 잡았다. 그렇게 딸을 시집보내면서 170 fiorino*와 작은 땅 정도의 지참금을 들려 보냈는데, 이는 당시 기준으로 볼 때 상당히 적은 지참금이었다.

* 당시 보통 부유한 상인 집안 딸들의 지참금은 500~1,500 fiorino 정도


Giocondo가문은 피렌체에서 뽕나무 재배부터 실크직물의 모든 생산 과정에 관여하는 사업체를 가지고 있었으며, 양모 무역 사업도 병행하며 피렌체 직물산업에 크게 기여하고 있었다. Francesco는 욕망 많은 사내로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실크 산업을 바탕으로 피렌체 사회에서 영향력을 넓혀나갔다. 16살인 Lisa와 재혼했을 당시 30살이던 Francesco는 피렌체 정부에서 여러 개의 중요한 직책 또한 맡고 있었는데, 1510년 경찰문서에 따르면 그는 파렴치하며 상당히 무자비한 사람이었다.  



초상화를 그린 이유

더 많은 이들이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하면서 부유한 상인들은 돈을 많이 내면 초상화를 그릴 수 있게 되었지만, 그래도 벽은 높았다. 일단 초상화는 왕족 · 성직자 · 귀족들의 문화였기 때문에, 당시 보통 사람들은 단순히 돈이 많다고 해서 초상화를 그린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Giocondo는 돈도 많고 야망도 큰 사내였다.

지역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할 만큼 부와 명예를 축적한 자신의 높아진 사회적 위상을 드러내 줄 장치가 필요했다. 당시만 해도 여전히 귀족의 특권으로 여겨졌던 초상화는 좋은 예였을 것이다. 마침 이사한 큰 집에 귀족들의 집처럼 벽을 장식할 안주인의 초상화가 있으면 구색을 갖출 수 있을 것 같았다.



Monna Lisa를 그리고 있는 Leonardo da Vinci, Cesare Maccari, 1863


반면, 궁정화가로 활동하면서 대부분 공작가나 귀족 집안의 의뢰로 초상화를 그렸던 Leonardo가 상인의 아내를 그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재정적인 문제였을 것이다.

당시 Leonardo는 밀라노 공작 Ludovico Sforza의 몰락으로 17년이라는 긴 세월- 밀라노궁정에서의 안락했던 생활을 끝내고, 프랑스군에 점령당한 밀라노를 떠나 쫓기다시피 피렌체로 돌아온 후였다. 프랑스군에 의해 감금된 상황에서 밀라노의 군주 Ludovico가 Leonardo를 챙겨줄 여유는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Leonardo는 피렌체로 돌아와 수도회에서 제공한 Santissima Annunziata 성당의 임시 숙소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물론 이탈리아의 가장 위대한 궁정에서 활동한 대가로 성공해 돌아온 Leonardo를 피렌체 사람들은 환영했지만, 르네상스 문화를 꽃피운 공화국 피렌체에 화가가 Leonardo만 있는 건 아니었다. 50세가 가까운 나이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Leonardo는 돈과 일이 필요했다. 따라온 수행원들도 부양해야 했다.

인맥도 넓고 피렌체 사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Francesco는 Leonardo가 하고 싶었던 Vecchio궁전의 ‘Salone dei Cinquecento’ 작업에 참여할 수 있도록 힘써주었고, 그 대가로 부인의 초상화를 그려주었을 가능성이 높다.



상인의 아내에서 이상화된 미의 여신으로

모나리자가 입고 있는 옷은 16세기 초 피렌체 패션에 속하지만 밀라노 패션 또한 섞여있다. 드레스의 네크라인을 장식하고 있는 자수문양은 'Nodi Vinciani(Vincian 매듭)'로 1490년대 초 Sforza궁정에서 유행한 'Vincji'라 불리던 자수다. Leonardo가 밀라노의 Sforza 궁정에서 일하던 당시 디자인한 이 자수문양은 [담비를 안은 여인]의 네크라인에서도 볼 수 있다.


모나리자 드레스 네크라인의 자수 / Vincian Nodi


Leonardo는 독특한 매듭문양에 큰 관심을 보이며 연구했고 종종 그만의 매듭문양을 여성 초상화 속 네크라인에 자수형태로 그려 넣었다. Lisa의 드레스 네크라인에 있는 문양은 'Vincian 매듭'에 있는 세 가지 특정 모티브를 조합한 결과다.

이러한 특정 문양은 그림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Leonardo의 그림 속에 의미 없이 존재하는 것들은 없기 때문에, 이 문양은 모델이 밀라노의 Sforza가문에 속함을 나타내는 표식이라고 보는 전문가들도 있었다. 하지만 모나리자의 의복은 여러 스타일이 혼재되어 있기 때문에 이 자수장식은 Sforza궁정의 표식으로 그려졌다기보다는 Leonardo가 그린 그림에 나타나는 그만의 시그니쳐라 볼 수 있다.



Botticelli, Smeralda Bandinelli, 1470-75


모나리자는 네크라인 밑으로 잔주름이 촘촘히 들어간 얇고 투명한 베일이 겹쳐진- 겉으로 보기엔 넉넉해 보이는 품의 드레스를 입고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1502년 아들 Andrea를 출산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그려진 그림이라 주장되기도 했다. 이 경우 그녀에게 신비스러운 이미지를 부여해준 미소는 자애로운 어머니의 미소로 이해되었다.

15세기 후기 Botticelli의 그림에서도 주름진 투명 베일이 겹쳐진 형태의 드레스를 임신한 여성이 착용한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지만 2004년 적외선 반사경으로 조사한 결과, 투명 베일 안으로 몸통이 꼭 맞는 16세기 초의 전형적인 드레스 Camora를 입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베일에 가려졌지만 당시 유행했던 탈부착식 소매 사이로 빼꼼히 나온 Camicia가 비치는 것 또한 볼 수 있다.


풍성한 볼륨감을 자랑하는 얇고 투명한 베일은 시대를 초월한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부여하기 위해 후에 첨가된 것으로 분석된다. 16세기 초 Leonardo는 다양한 직물의 자연스러운 주름을 묘사하는데 몰두했는데, 1508년에서 1513년 밀라노에 머무는 사이 초상화를 다시 찾아 Camora 위에 베일로 된 오버드레스를 추가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Leonardo는 특히 투명베일의 자연스러운 드레이프 묘사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Monna Lisa, 1503-1519 / Virgin of the Rocks, 1495-1508


베일로 형성된 드레이프 드레스는 보통 이상화된 여인의 드레스에서 많이 보인다.

당시 화가들은 고대 여신이나 님프를 묘사할 때 종종 얇은 직물로 풍성하게 드레이프 된 드레스를 착용한 모습으로 표현했다. 모나리자의 왼쪽 어깨 위에 멋스럽게 걸쳐진 천의 존재를 학자들은 처음엔 스카프로 인식했으나, 16세기 초 Leonardo가 비슷한 시기에 그린 [Vergine delle Rocce (암굴의 성모)] 속 천사의 모습에서 유사한 형태를 볼 수 있는데, 비슷한 맥락으로 본다면 모나리자를 이상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완벽을 기하는 성격 탓에 오랜 시간 그림을 그리고 종종 그림을 외면한  방치해 놓는 것으로 유명했던 Leonardo 모나리자를 평생 가지고 다니면서 수정을 반복했다. 시간에 지나면서 얼굴이 변화한 루브르의 초상화는 모델의 부재에 따라 점점 화가의 상상에 따른 이상화 되었다고 보는 시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화가는 머리스타일부터 의상 · 앉아있는 자세*까지 모두 고결한 여성의 특징 상징적으로 구현했다.

* 왼손 위로 오른손을 포개어 놓은 자세는 당시 결혼에 대한 충성의 상징



최신 스타일의 패셔너블한 모나리자 - 드레스와 머리 베일

전체적으로 어두운 색상의 드레스와 아무런 장신구를 착용하지 않은 채 검은색 베일을 쓰고 있는 Lisa의 차림새를 옛 학자들은 상복으로 여겼다. 하지만 이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화학반응으로 그림이 검게 변색된 결과일 뿐이다.


짙은 회색의 몸통과 황갈색 소매로 보이는 드레스는 연속적으로 칠해진 바니쉬와 먼지 층 때문에 어두워졌으며, 색소 분석 결과 실제로는 - 네크라인이 금실자수로 장식된 양홍색(Carmine red)의 몸통에 노란색 탈착식 소매가 달린 실크드레스였다.

당시 피렌체 여인들은 밝은 색상의 드레스를 선호했다. 피렌체는 직물 산업이 발달했기 때문에 다채로운 색상의 실크는 모두 피렌체에서 생산되었다. Lisa의 남편은 피렌체 실크 사업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부인에게 최신스타일을 제공했을 것이다.



Raffaello의 스케치 / Raffaello, Strozzi 초상화 / Pascal Cotte가 제시한 Monna Lisa 속 숨겨진 초안


베일로 된 오버드레스 안에 입은 드레스(Camora)의 형태는 당시 Leonardo의 초상화를 따라 그린 것으로 알려진 Raffaello가 그린 여인들의 드레스와 비슷하다. 2015년 Pascal Cotte가 분석한 결과에 의하면 완성된 모나리자 속에는 숨겨진 세 가지 초안이 있는데, 그가 제시한 그림에서 베일로 가려진 드레스의 자세한 형태를 볼 수 있다.



Monna Lisa / Isabella d'Este


밀라노부터 다른 궁정들을 거쳐오며 최신 유행을 알고 있던 화가에 의해 앞서가는 스타일로 연출된 모나리자의 머리는, 자세히 보면 완전히 풀어헤친 머리가 아니다. 이는 얼마 전 Leonardo가 스케치만 그려주고 도망친 Isabella d’Este의 머리스타일과 비슷하다. 곱실거리는 옆머리를 좀 더 빼주고 나머지 머리는 모아 뒤로 보내 얇은 망사로 된 보닛에 넣어 둥근 형태의 머리 모양으로 정리한 스타일이다.

Lisa의 곱실거리는 옆머리는 많이 나와있는데, Leonardo는 특히 곱슬머리를 좋아했다. 성모마리아의 머리 스타일 또한 곱실거리는 옆머리로 표현했던 그는 곱슬머리를 이상화에 적합한 우아한 스타일이라고 여겼다.


그 위로 검은색의 투명 베일을 써 머리스타일을 차분하게 정리했는데, 흐릿하게 그림의 경계를 없앤 Sfumato의 정점을 보여주는 그녀의 얼굴에서 유일하게 보이는 선은 머리에 쓰고 있는 투명 베일의 윤곽이다. 베일은 당시 유혹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머리카락을 가리기 위한 장치로, 기혼 여성은 종종 베일로 머리를 가려 정숙한 여인임을 나타냈다.

다만, 당시 피렌체에서는 검은색 베일이 드물었는데 이는 스페인 패션에 큰 영향을 받았던 밀라노 공국에서 돌아온 화가 Leonardo의 선택이거나, 최신 트렌드에 민감한 직물 상인인 남편 Francesco가 부인의 아름다운 모습을 위해 제공했을 가능성이 있다. 16세기 초 북부 이탈리아에서는 스페인 패션의 영향으로 블랙드레스가 유행했는데, 복잡하고 긴 염색 과정이 필요했던 검은색은 당시 부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부잣집 안주인이지만 보석이 없는 모습 또한 Leonardo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Leonardo의 초상화 속 여인들은 모두 보석이 거의 없는 수수한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겉의 화려함 보다 내적인 미를 추구하며 모델이 된 여인들의 미덕을 강조하기 위해 평범한 드레스를 활용하는 Leonardo 초상화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초상화의 신비스러운 면모에 일조한 눈썹과 모호한 미소

모나리자를 둘러싼 몇 가지 미스터리는 작품의 매력 포인트로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며, 아직까지도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원천이 되고 있다.


모나리자의 눈썹이 없는 모습은 그림의 신비스러운 면모에 일조했다.

당시의 유행이었다는 설도 있지만 좀 더 정확히 따져보면, 눈썹이 하나도 없고 헤어라인까지 면도해 깔끔한 미를 추구했던 건 중세시대 말쯤 퍼졌던 지나간 유행이었다. 핏기하나 없어 보이는 창백한 피부가 미적 포인트였던 당시 여인들은 눈썹은 물론 잔머리까지 모두 뽑아 없앴다. 하지만 초상화가 그려진 16세기 초에는 헤어라인도 정상적으로 돌아왔으며 눈썹은 비교적 가늘게 정리되긴 했지만 존재했다. 당시 눈썹이 하나도 없는 모습은 오히려 매춘부들의 패션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런 추측과 가설은 이제 필요 없는데, 과학의 발달로 본래 그림에는 눈썹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2007년 프랑스 과학자 Pascal Cotte이 초고해상도로 초상화를 스캔해 분석한 결과, 눈썹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흐려졌거나 서투른 복원으로 인해 여러 번 칠해진 바니시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함께 사라졌다고 한다.


Cecilia Gallerani의 미소, 1488-90 ca. / Monna Lisa의 미소 1503-1519


19세기 프랑스 시인 Théophile Gautier가 '매혹적이며 이해할 수 없는 미소'라 표현한 모나리자의 미소.

낭만주의 시인이나 작가들은 그녀의 미스터리한 미소와 모호한 느낌을 주는 표정을 팜므파탈의 원형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모나리자의 미소가 크게 부각되었을 뿐, 신비스러운 이 미소는 이미 Leonardo의 여성 초상화 속에서 시도된 바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발전된 화가의 독보적인 Sfumato*기법으로 정확한 윤곽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그녀의 표정은 시각에 따라 변하는 듯 보이며 그림에 신비스러움을 부여해 주었다.

* Sfumato - 색과 색 사이의 경계선을 흐려 부드럽게 처리하는 미술 기법


초상화에 표정을 담아낸다는 개념이 없던 시기 웃는 듯한 여인의 표정은 생소하지만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녀를 신비로움에 가둔 모호함 가득한 얼굴은 수많은 연구와 해석을 낳았고, 아이를 낳은 후 부종과 갑상선 기능 저하를 겪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결과라는 매우 현실적인 분석까지도 등장할 만큼 현대까지도 이 미스터리를 풀기 위한 연구는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꿈보다 해몽이라고 사람들이 다양한 해석을 붙이는 이 미스터리한 미소는 그저 화가 개인의 발전된 기량으로 그려낸 여인의 얼굴로, 화가는 부여한 적 없는 미스터리일지도 모른다.




모나리자는 서양문화의 회화를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

그림의 본 고장 이탈리아에서는 아직도 모나리자의 정체성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다. 각자만의 다양한 근거를 가지고 모나리자의 모델임을 주장하니, 아마 그녀가 누군지는 다빈치가 살아 돌아오지 않는 한 절대 밝혀지지 않을 미스터리일 것이다.

이제 과학까지 합세된 끊임없는 학자들의 연구에도 불구하고 루브르 박물관측이 인정한 설은 없다. 루브르 측은 모나리자를 그저 신비한 모습 그대로 남겨두고 싶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모나리자에 끌리는 포인트가 바로 그 부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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