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이름은 모나리자
멍한 응시나 의식적으로 시선을 돌렸던 화가의 전작들과는 달리, 미소를 머금은 채 고요한 눈빛으로 관객을 관찰하고 있는 듯한 여인의 초상화
그녀는 단연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얼굴일 것이다.
500년이 넘게 흐른 오늘날까지도 서양 예술의 상징으로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그녀의 힘은 무엇일까?
그녀가 사뭇 궁금해진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4대 여성 초상화, 그 마지막
La Gioconda? Monna Lisa? Mona Lisa?
모나리자는 왜 이름이 여러 개일까?
[The Mona Lisa{모나리자}]는 초상화에 부여된 국제적인 이름으로, 이탈리아에서는 [La Gioconda]라 불린다. 모나리자가 된 이유에는 바사리{Giorgio Vasari}*가 자신의 저서 [미술가 열전{Le Vite}]에 그렇게 적어놓은 데서 유래됐다.
* 16세기 화가이자 건축가, 미술사학자로 르네상스 시대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에 대한 책 [미술가 열전]을 저술함
레오나르도는 프란체스코{Francesco del Giocondo}를 위해
그의 아내 몬나 리자{Monna Lisa}의 초상화를 그렸고..
몬나{Monna}는 '마돈나{Madonna}'의 약자다. 마돈나는 성인 여성을 정중하게 가리키는 '숙녀', 결혼을 했다면 '부인'정도의 의미를 가진 용어로, 중세 후기부터 쓰이던 다소 예스러운 칭호이다.
영어로 Mona로 표기가 되면서 [Mona Lisa]가 공식적인 이름이 되었지만, 'n'이 빠진 모양새를 모욕적으로 여기는 이탈리아에서는 제대로 된 표기인 [Monna Lisa]로 쓰거나, 본래 통용되던- 남편 성으로 부르는 호칭인 [La Gioconda {조콘도의 부인}]라 부른다. 프랑스에서도 [La Joconde]다. 작품명이야 후대에 정해진 것이니 바뀔 수야 있지만 출신국의 단어를 제대로 따르지 않는 건 당연히 모욕적일만하다.
그녀는 리사 게라르디니?
모나리자에 대한 끊임없는 논쟁의 중심은 '과연 그녀는 누구인가'일 것이다. 5세기가 지난 지금도 초상화 속 여인의 신원은 불분명하다.
보통 그녀를 피렌체의 부유한 상인 부인인 리사{Lisa Gherardini}로 인식하는 강력한 근거는 바사리가 저술한 책이다. 하지만 사실 그가 묘사한 모나리자의 모습은 루브르 박물관의 여인과는 좀 차이가 있다. 바사리는
피부에서 털이 나는 모양을 보여주는 자연스러운 눈썹과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는 불그스름하고 부드러운 구멍이 있는 코, 붉은 입술과 생기 넘치는 얼굴의 색조..
를 가진 젊은 여인으로 묘사했고 이 모습은 우리가 볼 수 있는 다소 음침한 색조를 띄는 루브르의 모나리자와는 분위기가 다르다. 하여 바사리는 모나리자를 실제로 본 적이 없으며 과장된 상상력으로 묘사했을 것이라 인식되어 왔다. [아일워스{Isleworth}의 모나리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바사리가 장밋빛으로 묘사한 여인의 모습은 [아일워스의 모나리자]와 비슷한데, 그는 이 초상화를 직접 보았을 확률이 높다. 초상화는 영국의 예술가이자 수집가 휴{Hugh Blaker}가 1913년 서머셋{Somerset}의 오래된 귀족의 저택에서 발견했다. 그가 초상화를 구입해 자신의 스튜디오가 있는 아일워스{Isleworth}로 옮기면서 공식적으로 [아일워스의 모나리자]*가 되었다.
* 현재 소유자는 [Earlier Mona Lisa]로 변경
루브르의 모나리자보다 앞서 제작되어 레오나르도가 미완성 상태로 둔 모나리자의 초기버전으로 분석되며, 부분적으로 레오나르도에 의해 그려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물리학자 존{John Asmus}은 동일한 화가가 아일워스와 루브르 모나리자의 얼굴을 그렸다는 확실성을 99% 입증하는 과학적 테스트를 실행, 하지만 여전히 학자들 사이에서는 논쟁 중
[아일워스의 모나리자]의 배경에는 양 옆으로 기둥이 있는데, 이는 1504년경 화가 라파엘로{Raffaello Sanzio}가 피렌체에 머물던 시기에 그린 스케치와 -모델의 포즈와 배경, 머리스타일- 매우 유사하다. 라파엘로는 당시 베키오{Vecchio}궁의 홀에서 작업 중인 대가 레오나르도를 보았고 그가 그린 초상화 속 여인에 영감을 받아 스케치를 남겼다. 이후 라파엘로는 두 점의 여인의 초상화 또한 비슷한 구도와 분위기로 그려냈다.
르네상스 시대에 거장의 그림을 모방하는 것은 오마주{Hommage}로 존경과 경의를 표하는 행위였다. 예술작품의 성공은 모조품과 패러디로 측정할 수 있는데 모나리자는 탄생부터 현대까지 끊임없이 모방되고 패러디되었으며, 절도·훼손 등 사건사고에서도 중심에 있었다. 그것은 모나리자만이 갖는 힘이 되었다.
초상화를 그린 이유
더 많은 이들이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하면서 부유한 상인들은 돈을 많이 내면 초상화를 그릴 수 있게 되었지만, 그래도 벽은 높았다. 일단 초상화는 왕족 · 성직자 · 귀족들의 문화였기 때문에, 당시 보통 사람들은 단순히 돈이 많다고 해서 초상화를 그린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리사의 남편 조콘도는 돈도 많고 야망도 큰 사내였다.
지역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할 만큼 부와 명예를 축적한 자신의 높아진 사회적 위상을 드러내 줄 장치가 필요했다. 당시만 해도 여전히 귀족의 특권으로 여겨졌던 초상화는 좋은 예였을 것이다. 마침 이사한 큰 집에 귀족들의 집처럼 벽을 장식할 안주인의 초상화가 있으면 구색을 갖출 수 있을 것 같았다.
반면, 궁정화가로 활동하면서 대부분 공작가나 귀족 집안의 의뢰로 초상화를 그렸던 레오나르도가 상인의 아내를 그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재정적인 문제였을 것이다.
당시 레오나르도는 밀라노 공작 루도비코{Ludovico Sforza}의 몰락으로 17년이라는 긴 세월- 밀라노궁정에서의 안락했던 생활을 끝내고, 프랑스군에 점령당한 밀라노를 떠나 쫓기다시피 피렌체로 돌아온 후였다. 프랑스군에 쫓기는 상황에서 밀라노의 군주 루도비코가 레오나르도를 챙겨줄 여유는 없었을 것이다.
물론 밀라노 궁정에서 활동한 대가로 성공해 돌아온 레오나르도를 피렌체 사람들은 환영했지만, 르네상스 문화를 꽃피운 공화국 피렌체에 화가가 레오나르도만 있는 건 아니었다. 50세가 가까운 나이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레오나르도는 돈과 일이 필요했다. 인맥도 넓고 피렌체 사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조콘도는 레오나르도가 하고 싶었던 작업에 참여할 수 있도록 힘써주었고, 그 대가로 부인의 초상화를 그려주었을 가능성이 높다.
상인의 아내에서 이상화된 미의 여신으로
모나리자가 입고 있는 옷은 16세기 초 피렌체 패션에 속하지만 밀라노 패션 또한 섞여있다. 드레스의 네크라인을 장식하고 있는 자수문양은 '빈치안 매듭{Nodi Vinciani}'으로 1490년대 초 Sforza궁정에서 유행한 '빈치{Vincji}'라 불리던 자수다. 레오나르도가 밀라노 궁정에서 일하던 당시 디자인한 이 자수문양은 [담비를 안은 여인]의 네크라인에서도 볼 수 있다.
레오나르도는 독특한 매듭문양에 큰 관심을 보이며 연구했고 종종 그만의 매듭문양을 여성 초상화 속 네크라인에 자수형태로 그려 넣었다. 리자의 드레스 네크라인에 있는 문양은 '빈치안 매듭'에 있는 세 가지 특정 모티브를 조합한 결과다.
이러한 특정 문양은 그림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레오나르도의 그림 속에 의미 없이 존재하는 것들은 없기 때문에, 이 문양은 모델이 밀라노 궁정의 스포르차{Sforza}가문에 속함을 나타내는 표식이라고 보는 전문가들도 있었다. 하지만 모나리자의 의복은 여러 스타일이 혼재되어 있기 때문에 이 자수장식은 스포르차 궁정의 표식으로 그려졌다기보다는 레오나르도가 그린 그림에 나타나는 그만의 시그니쳐라 볼 수 있다.
최신 스타일의 패셔너블한 모나리자
전체적으로 어두운 색상의 드레스와 아무런 장신구를 착용하지 않은 채 검은색 베일을 쓰고 있는 리자의 차림새를 옛 학자들은 상복으로 여겼다. 하지만 이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화학반응으로 그림이 검게 변색된 결과일 뿐이다.
당시 피렌체 여인들은 밝은 색상의 드레스를 선호했다. 피렌체는 직물 산업이 발달했기 때문에 다채로운 색상의 실크는 모두 피렌체에서 생산되었다. 리자의 남편은 피렌체 실크 사업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부인에게 최신스타일을 제공했을 것이다.
베일로 된 오버드레스 안에 입은 드레스 가무라{Gamurra}의 형태는 당시 레오나르도의 초상화를 따라 그린 것으로 알려진 라파엘로가 그린 여인들의 드레스와 비슷하다. 2015년 파스칼{Pascal Cotte}이 분석한 결과에 의하면 완성된 모나리자 속에는 숨겨진 세 가지 초안이 있는데, 그가 제시한 그림에서 베일로 가려진 드레스의 자세한 형태를 볼 수 있다.
밀라노부터 다른 궁정들을 거쳐오며 최신 유행을 알고 있던 화가에 의해 앞서가는 스타일로 연출된 모나리자의 머리는, 자세히 보면 완전히 풀어헤친 머리가 아니다. 이는 얼마 전 레오나르도가 스케치만 그려주고 도망친 이사벨라{Isabella d’Este}의 머리스타일과 비슷하다. 곱실거리는 옆머리를 좀 더 빼주고 나머지 머리는 모아 뒤로 보내 얇은 망사로 된 보닛에 넣어 둥근 형태의 머리 모양으로 정리한 스타일이다.
리자의 곱실거리는 옆머리는 많이 나와있는데, 레오나르도는 특히 곱슬머리를 좋아했다. 성모마리아의 머리 스타일 또한 곱실거리는 옆머리로 표현했던 그는 곱슬머리를 이상화에 적합한 우아한 스타일이라고 여겼다.
초상화의 신비스러운 면모에 일조한 눈썹과 모호한 미소
모나리자를 둘러싼 몇 가지 미스터리는 작품의 매력 포인트로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며, 아직까지도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원천이 되고 있다.
19세기 프랑스 시인 테오필{Théophile Gautier}이 '매혹적이며 이해할 수 없는 미소'라 표현한 모나리자의 미소. 낭만주의 시인이나 작가들은 그녀의 미스터리한 미소와 모호한 느낌을 주는 표정을 팜므파탈의 원형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모나리자의 미소가 크게 부각되었을 뿐, 신비스러운 이 미소는 이미 레오나르도의 여성 초상화 {흰 담비를 안은 여인}속에서 시도된 바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발전된 화가의 독보적인 스푸마토{Sfumato}*기법으로 정확한 윤곽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그녀의 표정은 시각에 따라 변하는 듯 보이며 그림에 신비스러움을 부여해 주었다.
* 색과 색 사이의 경계선을 흐려 부드럽게 처리하는 미술 기법
초상화에 표정을 담아낸다는 개념이 없던 시기 웃는 듯한 여인의 표정은 생소하지만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녀를 신비로움에 가둔 모호함 가득한 얼굴은 수많은 연구와 해석을 낳았고, 아이를 낳은 후 부종과 갑상선 기능 저하를 겪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결과라는 매우 현실적인 분석까지도 등장할 만큼 현대까지도 이 미스터리를 풀기 위한 연구는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꿈보다 해몽이라고 사람들이 다양한 해석을 붙이는 이 미스터리한 미소는 그저 화가 개인의 발전된 기량으로 그려낸 여인의 얼굴로, 화가는 부여한 적 없는 미스터리일지도 모른다.
모나리자는 서양문화의 회화를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
그림의 본 고장 이탈리아에서는 아직도 모나리자의 정체성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다. 각자만의 다양한 근거를 가지고 모나리자의 모델임을 주장하니, 아마 그녀가 누군지는 다빈치가 살아 돌아오지 않는 한 절대 밝혀지지 않을 미스터리일 것이다.
이제 과학까지 합세된 끊임없는 학자들의 연구에도 불구하고 루브르 박물관측이 인정한 설은 없다. 루브르 측은 모나리자를 그저 신비한 모습 그대로 남겨두고 싶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모나리자에 끌리는 포인트가 바로 그 부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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