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담비를 안은 여인
한참 사랑에 빠진 소녀는 입가에 은근한 미소를 띤 채, 솔직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화폭 너머의 누군가를 응시하고 있다. 사랑받는 이의 충만한 자신감이 그림 밖으로도 뿜어져 나오는 듯하다.
고개를 돌려 갑자기 방으로 들어온 누군가를 쳐다보는 순간을 포착한 듯, 자연스러움이 돋보이는 초상화 속 여인의 시선 끝에는 누가 있었을까?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4대 여성 초상화, 그 두 번째
그녀의 초상화는 동시대 여느 여성 초상화와 구별되는 강렬함이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의 밀라노 시대라 일컫는 1482년에서 1499년 사이, 그는 두 점의 여인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중 하나인- 후대에 [담비를 안은 여인{Dama con l'ermellino}]*라 이름 붙여진 이 초상화는 그가 밀라노의 궁정화가로 활동하던 초기에 그린 것으로, 당시 밀라노 공국의 실질적인 공작** 루도비코{Ludovico Maria Sforza(Il Moro)}에게 의뢰받아 그린 당대 최고의 ‘심리적 초상화’다.
*'담비를 안은 여인' 혹은 '흰 족제비를 안은 여인', 담비{Ermellino}는 북방 족제비의 흰 겨울 털
**루도비코는 조카인 공작 갈레아초{Gian Galeazzo Maria Sforza}를 대신해 섭정을 하며 실질적인 공작이 됨
레오나르도가 처음 심리적 초상화를 시도한 [지네브라 데 벤치]에서 지네브라의 초점 흐린 시선에 담겨있던 영혼의 움직임은, 여인의 초상화에선 반대로 또렷한 시선과 옅은 미소에 집중되어 있다.
여인의 얼굴엔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듯 눈에 띄지 않는 미소가 입술에 맴돌고 있는데, 다빈치의 여성 초상화 중 가장 유명한 [모나리자{Monna Lisa}]의 신비로운 포인트로 꼽히는 ‘웃는 듯 아닌 듯한 미소’는 10년도 더 전 이 여인의 초상화에서 먼저 시도되었다.
담비는 모든 것을 담고 있다
화가 레오나르도의 인간적인 면모까지..
한 대 맞으면 아플 것 같은 근육질의 다부진 체격을 가진 담비는 사실 처음부터 존재하지는 않았다.
상징성을 담아 그림 속에 주인공에 대한 단서들을 숨겨놓는 레오나르도가 이번에 선택한 것은 담비였다. 그리스어로 갈레{Galèe}인 담비는 여인의 성 갈레라니{Gallerani}를 암시함과 동시에 여인의 애인인 밀라노의 실질적인 공작 루도비코를 상징하는 동물로, 화가는 공작과 정부가 함께 있는 그림을 그릴 수 없는 대신 루도비코를 상징하는 담비*를 그려 넣어 표현했다.
*초상화가 그려지기 직전 루도비코는 나폴리 왕의 담비{Ermellino} 기사단이 됨
비록 상징이지만 이렇게 함께 있는 모습을 노골적으로 표현한 것도 놀라운데, 여성을 보호하려는 것처럼 근육을 세우며 움직이려는 담비를 저지하는 듯한 여인의 모습 또한 놀랍다.
공작을 상징하는 담비를 눌러 통제하는 손동작에서 당시 레오나르도가 심취해 있던 인체 해부학적인 분석과 관계 속에서 우위를 드러내는 여인의 심리적 메시지를 동시에 볼 수 있다. 이는 당시 궁정에서 그녀의 위치를 나타내기도 한다. 여인은 루도비코가 공식적인 정부로 삼은 첫 여인 첼리리아 갈레라리{Cecilia Gallerani}로, 궁정의 대소사에 참여하고 관여하는 위치에 있었다.
아마도 루도비코 본인, 또는 자신과 공작의 관계를 은근히 알리기 위한 체칠리아의 요청에 의해 그려졌을 공작을 상징하는 이 담비는 초상화의 처음 버전엔 없었다. 두 번째엔 회색의 작은 족제비로 그려졌으나 최종적으로 자연적인 크기보다 몸집이 더 크고 과장된 근육질의 담비로 변형되었다.
이렇게 새로 태어난 '팔근육이 돋보이는 담비의 용맹하고 건장한 모습'에서 우리는 화가 레오나르도의 인간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그도 당시엔 권력자들에게 잘 보이려 노력하는 보통의 화가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담비는 또한, 임신을 상징하기도 한다. 1491년 둘 사이에서는 아들이 탄생했다. 초상화가 그려질 시기는 1488~90로 추정되기 때문에, 초상화가 그려지는 동안 실제로 그녀는 임신하고 있었을 확률이 높고, 이 경우 레오나르도는 체칠리아의 임신을 상징하기 위해 그녀를 보호하려는 듯한 모습의 담비로 표현했을 수 있다.
그녀는 똑똑했고 어린 나이임에도 우아했다
체칠리아는 대화가 잘 통하는 소녀였다. 그저 예쁘기만 한 여느 궁정 여인들과는 달리 총명했던 그녀는 생각이 트여있는 부모님 덕분에 형제들과 같은 교육을 받아 지적이었으며, 라틴어를 정확하게 구사했고, 류트를 연주하는 시인이자 가수였다. 루도비코는 그런 그녀에게 매료되었다.
궁정 여인이었던 신분에 비하면 꽤나 수수한 차림새인 그녀는 사실 밀라노 공국의 최신 패션으로 스타일링한 세련된 차림새다. 이는 모두 스페인 스타일로 당시 밀라노 공국 패션의 중심은 스페인이었다. 스페인 패션은 그 자체로 특권의 표시였다. 예나 지금이나 역시 사람들은 쉽게 가질 수 없고 값비싼 다른 나라 스타일을 선호하는 듯하다.
정보 교류의 방법은 인편이 전부였던 시기, 국외의 패션이 퍼지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결혼이었다. 외국과의 국혼은 외교·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이벤트였지만, 두 나라 간의 패션 교류와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엔 나폴리 왕국*의 공주가 있었다. 원래 밀라노 공작인 갈레아초**와 결혼해 막 밀라노로 건너온 나폴리 공주 이사벨라{Isabella d'Aragona}와의 친분 덕분에 체칠리아는 스페인의 최신 패션을 가장 먼저 입는 혜택을 누리게 된다.
* 당시 스페인 점령기를 보내던 나폴리 궁정은 스페인 문화와 패션이 성행
**루도비코의 어린 조카이자 밀라노 공작
패션 리더답게 체칠리아는 한쪽 어깨에만 겉옷을 걸치고 있는 모습이다. 이는 최신 스페인 스타일 스베르니아{Sbernia}로 소매 부분에 아몬드 모양으로 절개가 나 있는 것이 특징인 겉옷이다. 절개가 있는 부분으로 팔을 꺼내 속에 입은 드레스의 화려한 소매 부분을 자랑할 수 있었다. 물자가 풍부해지고 돈이 많아지자 두어 벌로 해결되던 옷은 세분화되고 다양해졌다. 겉옷의 종류는 다양해졌으며 강렬한 색상으로 염색한 의상도 많이 나왔다. 색상은 곧 부의 상징이었다. 상류층일수록 복잡한 무늬와, 밝고 강렬한 색상으로 염색된 직물을 선호했다. 이는 경제의 발전으로 이어지는데, 복잡한 염색 기술의 발전에는 하수 시스템의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에 국가의 성장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부자연스러운 머리 모양은 잘못된 복원의 결과물
그림은 오랜 세월을 견뎌오기도 했지만, 전쟁 중에는 나치 손에 들어가 지하에 갇히고 구둣발에 차여 뒤꿈치 자국이 생겼을 정도로 홀대받아 보존상태가 좋지는 못했다.
그녀의 머리 모양은 어딘가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초상화는 복원 시 잘못된 점이 크게 두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이 머리 모양(코아조네)이다. 그림의 보존 상태도 좋지는 못했지만, 복원가의 이 시대 머리장식에 대한 이해도도 부족했던 듯하다. 가장자리가 금실로 장식된 투명한 베일은 이마 부분을 제외하고는 갑자기 사라져 버렸고, 복원가의 투박한 붓터치로 덧칠해진 머리카락은 어색하게 턱을 감싸고 있는 모양새가 되었다.
14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 사이, 밀라노 궁정에서 턱 밑으로 몇 가닥 머리카락을 묶는 스타일이 유행하기는 했으나 그 모양은 조금 다르다. 밀라노 여인들은 스페인에서 온 머리스타일에, 귀밑머리 몇 가닥을 모아 턱밑으로 보내 얼굴을 감싸는 모양으로 창의성을 발휘해 조금 독특한 스타일로 즐겼다.
조사 결과 원본에서의 실제 머리는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이 뺨에서 목 밑으로 자연스럽게 흐르는 형태였으며, 머리를 감싼 베일은 자연스럽게 내려와 코 높이 부분에서 뒷덜미 쪽으로 향했고, 자세히 보면 살짝 그 흔적이 남아있다.
머리를 감싸고 있는 투명 베일은 검은색의 이마 끈으로 고정되어 있는데, 이 이마 끈으로 인해 복원가의 두 번째 잘못이 야기된다. 초상화 왼쪽 상단에는 글귀가 쓰여 있는데, 이 것은 Leonardo가 쓴 것이 아닌 수세기 후 폴란드에서 추가된 것으로 추정된다.
LA BELE FERONIERE
LEONARD D'AWINCI
초상화가 폴란드 왕자에 의해 폴란드로 넘어간 뒤 추가된 이 글귀는, 다빈치가 몇 년 후에 그린 [La bella ferronnière]로 명명된 초상화 속의 여성과 같은 여인인 줄 착각한 복원가가 그림 왼쪽 상단에 ‘La bella ferronnière Leonard d’awinci’*라 적어 넣은 것으로 추측한다.
*Leonard d’awinci는 폴란드어 표기
체칠리아의 초상화는 그 아름다움과 사진기로 순간포착을 한 듯한 생동감이 느껴지는 혁신적인 구도로 미술계를 들썩이게 했다. 전통적인 여성 초상화의 틀을 깬 [지네브라 데 벤치]의 초상화를 그리고 난 후 10여 년이나 흐른 뒤 그려졌지만, 체칠리아의 초상화는 여전히 당시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일반적인 초상화의 틀에서 벗어난 레오나르도 다 빈치만의 새롭고 혁신적인 구도의 초상화였다.
그림은 고된 세월을 버티며 몇몇의 나라를 거쳐 폴란드에 정착해, 폴란드의 가장 위대한 예술 보물이 되어 현재 크라쿠프{Kraków} 국립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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