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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빠진, 강제결혼의 희생양

; 미국의 모나리자, 지네브라 데 벤치

by MODA

Ginevra dè Benci -


초점 흐린 눈빛으로 멍하니 한 곳을 응시하고 있는 여인



Ginevra de' Benci, by Leonardo da Vinci, c. 1474-1478


아무나 초상화를 그릴 수 없는 시대, 길이 남을 초상화를 그리면서 화려한 치장은커녕, 수수한 모습으로 등장한 여인의 묘-한 표정에 눈길이 멈춘다.







미국의 모나리자


모델의 묘한 표정과 몽환적인 분위기가 눈길을 사로잡는 이 초상화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가 아직 베로키오{Andrea del Verrocchio}의 수하생으로 있을 시기에 그린 것으로, 레오나르도의 그림에 대한 학구적인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작품이다. 모나리자로 꽃 피운 다빈치의 초상화 스타일이 바로 이 그림에서 시작되었다.



Leonardo의 손 모양 스케치들


몽환적인 분위기뿐만 아니라 원래 그림은 모나리자와 비슷한 구도로, 모나리자처럼 손 부분까지 있었으나 후대에 불분명한 이유로 그림의 1/3 가량이 소실되었다. 만약 소실되지 않았다면 모나리자와 더 유사했을 이 여인의 초상화는 미국이 소장*한 단 하나뿐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 그림으로, 실제 '미국의 모나리자'라 불리며 미국이 애지중지 아끼는 보물이 되었다.


*현재 미국 워싱턴 국립 미술관{National Gallery of Art}에 소장


레오나르도의 초상화는 그림 속 주인공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주인공이 누구인지 암시하는 요소를 곳곳에 넣고, 얼굴 표정과 제스처로 인물의 심리적인 상태를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마치 수수께끼를 풀 듯, 화가가 심어놓은 요소들을 따라가다 보면 초상화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찾아낼 수 있다.



단순한 의상만으로 자신을 드러낸 그녀는 당대의 신여성 지네브라 데 벤치{Ginevra dè Benci}

레오나르도는 본인이 주인공에 대한 단서를 남기는 가장 기본적인 방식을 택했다. 그림 속에 주인공 이름을 암시하는 무언가를 그려 넣는 것이다.

여인의 뒷배경을 장식하고 있는 검은 물체는 '순결'을 상징하는 향나무속{Ginepro}으로 여인의 이름 지네브라{Ginevra}를 암시해주는 말장난이다.



뒷 배경의 향나무속
로마 여인, 1C / 같은 시기 피렌체 여인과 지네브라 데 벤치, 1474 ca.


수수해 보이는 그녀는 사실 더 어렵다는 꾸민 듯 안 꾸민 듯한 스타일의 정석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의 패션을 굉장히 세련되게 보여주고 있는 중이다.


생기라곤 하나도 없어 보이는- 창백함이 돋보이는 피부 톤과, 면도로 거의 없애 버린 가는 눈썹15세기의 대표되는 미적 포인트였다. 하얗고 털 없는 모습이 더 순결하고 깨끗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여인들은 세심하게 털을 없앴다. 이는 중세시대부터 이어져 온 영향으로, 불과 10년 전만 해도 눈썹은 거의 없고 이마도 변발 수준으로 밀었으니, 지네브라의 초상화는 인간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기 시작한 르네상스답게 비교적 자연스러운 모습을 찾은셈이다.





화려하진 않지만 매우 정교해 보이는 갈색 드레스는 금실로 만든 띠로 마무리되어 있다. 생활복의 가장자리 장식까지 금실로 했다는 건 그녀가 매우 부자라는 의미다.

다소 깊게 내려간 사각 형태의 목선은 당시 아름다운 모습이라 생각했던 여인의 둥근 어깨를 강조해주기 위한 장치였다. 과도하게 내려간 목선으로 드러난 가슴 부위는 실크나 리넨으로 된 코베르치에레{Coverciere (Partlet)}로 가렸는데, 이는 예쁜 목선을 가리기 싫었던 여인들로 인해 새로 생겨난 패션이다.



드레스의 네크라인이 목 밑에서 3.5cm를 넘지 않아야 한다



라는 당시 피렌체의 법령에, 아름다운 네크라인을 포기할 수 없었던 여인들은 있는 듯 없는 듯 다 비치는 천을 덧대어 걸침으로 대응했다. 금지는 그저 새로운 패션을 만들어 낼 뿐이다.



기본 가무라와 임산부를 위해 옆트임까지 한 가무라 / 이탈리아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드레스 가무라


지네브라가 입고 있는 드레스 가무라{Gamurra}는 당시 피렌체 여인들이 집에서 입었던 생활복이었다. 상체는 몸에 붙고 허리선이 높은 기본 드레스로, 보통 앞을 터 끈이나 단추로 닫아주었다. 리넨부터 실크까지 다양한 직물로 만들어 계급에 상관없이 모두 입었으며, 외출 시에는 보통 위에 -신분의 차이를 더 드러내 줄 화려한- 겉옷을 따로 걸쳤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녀가 굉장히 남다른 여성임을 알 수 있다. 당시만 해도 흔하지 않았던 초상화를 그리면서 별다른 치장도 없이 여인이 스스로 선택한 수수한 드레스를 입는 방식으로 '자기표현'을 했다는 것은, 혹 평범한 드레스를 선호했던 화가의 요청이었다 하더라도, 15세기 중반을 살아가고 있는 젊은 여인에게는 새로운 '도전'이었을 것이다.


목에 걸쳐진 검은 띠처럼 보이는 것 또한 당시 유행했던 머플러로, 집에 손님이 왔을 때 홈드레스 위로 살짝 걸치는 숄과 같은 개념으로 애용되었다. 당시 여인들은 색색별로 머플러를 가지고 있었다. 지네브라가 걸치고 있는 머플러가 애도나 금욕을 상징하는 어두운 검은색*인 이유는 그녀의 우울한 심리를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사제복의 영대처럼, 교단의 평신도 자매로 수도원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표식이라는 설도 있음



그녀는 우울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강제 결혼이라는 현실에 얽매여 있던 지네브라는 당대 시인으로 활약한 매우 지적인 여성으로 피렌체 문화계의 유명인사였다. 당시 피렌체의 수장이던 로렌초{Lorenzo il Magnifico}는 그녀를 '피렌체에서 가장 교양 있고 세련된 여성 중 한 명'이라 평했다.

그녀는 메디치{Medici}가의 주요 동업자였던 매우 부유한 은행가의 자녀로, 마음속에 품은 연인이 있었지만 집안이 맺어준 15살 많은 홀아비와 결혼한 상태였다. 초상화를 그릴 당시 그녀의 나이는 아름다운 16~17세였지만, 실제로 몸과 마음이 아팠다.


그녀가 마음속에 품었던 연인은 바로 피렌체 주재 베네치아 대사인 베르나르도 벰보{Bernardo Bèmbo}였다. 사랑 없는 가문끼리 맺어지는 결혼이 원인이었는지... 당시 사람들은 '플라토닉 사랑'과 가슴에 귀부인 한 명쯤은 품고 사는 '기사도적 사랑'에 푹 빠져있었는데, 지네브라와 벰보 또한 유명한 플라토닉 연인이었으며, 플라토닉 연애답게 서신을 주고받으며 사랑을 키웠다.



초상화 뒤 엠블럼 속 숨겨진 벰보의 모토 / 벰보의 엠블럼


그림의 주인공을 지네브라로 추측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초상화 뒷면에는 엠블럼이 하나 그려져 있는데, 후대에 적외선 조사로 엠블럼 속에 숨겨진 글귀 'Virtus et Honor'를 발견하게 된다. 이는 바로 벰보의 모토였으며, 글귀를 감싸고 있는 월계수와 종려나무벰보의 상징이었다. 그러니까 이 초상화는 벰보가 남몰래 의뢰한 연인의 초상화일 확률이 높다.


이러한 그녀의 사정을 알고 있던 오빠 친구* 레오나르도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강제 결혼으로 인한 억압된 삶에 고통받는 한 여인의 우울하고 공허한 마음을 담아내 묘사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 지네브라의 오빠와 레오나르도는 친구사이로, 레오나르도는 1474-1480년 사이 벤치 저택에 자주 방문하여 그림을 그림



레오나르도 다 빈치 '4대 여성 초상화'의 시작


우리에겐 다소 생소한 이 지네브라의 초상화의미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지네브라의 초상화는 '레오나르도의 4대 여성 초상화' 중 첫 번째 초상화로, 여러 가지 그만의 초상화 스타일이 처음 시도되어 우리에게 잘 알려진 [모나리자]의 시작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보통 약혼이나 결혼을 앞두고 가문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 화려하게 꾸민 인형 같은 모습으로 무표정의 측면이 주를 이뤘던 당시의 여성 초상화는 달리, ‘마음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그림을 추구하며 연구에 열심이던 젊은 화가 레오나르도는 이 그림에서 5가지 새로운 시도를 한다.

: 당시 실내에 갇혀 있던 여인의 초상화를 야외 배경으로 이끌었고, 손에 익지 않던 유화를 시도했으며 상류층 여인을 장신구 없는 모습으로, 정면을 향한 3/4 옆얼굴을, 심리상태가 드러나는 표정이 담긴 심리적 초상화로 그려냈다. 여인을 인형 같은 상품이 아닌 감정을 드러내는 하나의 인격체로 표현한 것이다.


천재 화가의 실험적인 시도로 르네상스 여성 초상화의 관습을 깨트린 그림 [지네브라 데 벤치] 이후, 단순하게 차려입은 여성의 정면 초상화는 트렌디한 스타일로 자리 잡아 보편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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