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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주인공은 나야 나!

; 프란체스카 스콜라리

by MODA



여기 현존하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이중 초상화가 있다.



Donna con un uomo al davanzale, da Fra Filippo Lippi, 1440 ca.


언뜻 보면 여성 초상화로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왼쪽에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있는 남자도 보이는 이중 초상화.

그림의 회화적인 요소 - 남성 모델까지도 - 들이 모두 여성에게 종속되어 있는 이 이중 초상화 속에서 여인은 명백한 '주인공'이다.






그림의 연대나 주인공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한 가장 쉬운 단서는 보통 모델의 차림새다. 등장인물의 차림새는 그림이 그려진 시기와 주인공의 사회적인 지위를 알려주며, 착용한 보석으로 가문을 유추해 낼 수도 있다. 15세기 초·중반 피렌체 상류층의 전형적인 복장을 하고 있는 모델의 모습은 작품이 그려진 시기가 1430~1440년대임을 알려주며, 여인의 화려한 머리장식과 장신구들은 초상화가 결혼과 관련되어 있음을 나타내 준다.


여성이 대부분의 자리를 차지하고, 남자는 창문으로 살짝 들여다보는 구경꾼 같은 특이한 배치는 남편보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여성의 초상화임을 구도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려진 시기가 15세기 초·중반이라는 점을 감안하고 본다면, 이런 여성 중심적인 구도는 꽤나 파격적인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여인은 결혼 중


어떤 이들에게 호화로운 결혼식자신과 가문의 명예를 만천하에 드러낼 수 있는 이벤트일 것이다. 15세기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더 확고한 개념이었다.

여인은 당시 사치스러운 의복의 최고봉이었던 우플랑드{Houppelande}를 입고 있다. 우플랑드는 남녀 모두 입은 14-15세기의 특징적인 의상으로, 꽤나 화려하고 장식적인 겉옷이었다. 방대한 양의 천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과시하기 좋아하고 구분 짓기 좋아하던 귀족이나 부유층들이 즐겨 입었다. 우플랑드는 중세시대의 영향을 받은 패션으로, 사라지기 전 막바지 안간힘을 쓰며 버티고 있었다.


조선시대의 활옷과 족두리로 신부복임을 알 수 있는 것처럼, 당시의 피렌체에서는 여성의 화려한 드레스와 머리장식, 목걸이 그리고 머리와 어깨에 착용하는 보석 브로치가 그러했다. 무엇보다 결혼식에는 보석이 중요했다. 값비싼 보석을 착용하는 것은 신부의 명예와도 관련이 있었다.


당시 결혼을 앞둔 아들에게 어머니는 이런 편지를 써 보냈다.



보석을 준비해 아름답게 꾸며 놓거라. 우리가 너의 아내감을 찾았으니..
네가 일에 명예가 있는 것처럼, 그녀 또한 부족함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보통 결혼 몇 달 전 신랑은 신부에게 옷과 보석을 선물했는데, 함처럼 작은 상자에 담아 신부의 집으로 배달되었다. 남편이 아내의 의복을 준비함으로써 앞으로 아내를 돌보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착용한 결혼 관련 보석들


여인의 머리장식은 옷만큼 사치스럽고 고급스럽다.

머리 위 중간에 꽂은 큰 보석 브로치와 어깨 브로치 그리고 목걸이는 결혼 상태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시각적 표식으로, 당시 피렌체의 사치 방지법에 따라 결혼식날부터 3년 동안만 함께 착용이 가능했다.

헤어라인을 따라 전통적인 결혼 선물이자 순결의 상징인 진주가 줄지어 장식되어 있는 '두 개의 뿔 모양' 머리장식은, 중세시대의 대표적인 머리스타일인 '에냉{Hennin}'의 일종으로 유행의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다.



이탈리아 셀라와 다른 유럽의 뿔머리 머리장식, 15C


말의 안장 모양이라 셀라{Sella}라 불리기도 한 프랑스에서 건너온 저세상 스타일 같은 이 머리장식은, 이탈리아로 와서 소시지처럼 생긴 패딩 롤 기를란다{Ghirlanda}를 얹은머리로 진화해 크기가 점점 커졌으며, 1430년대부터는 긴 천까지 얹어 장식했다.

15세기 남성들 사이, 동방에서 온 터번 패션이 유행하자 자신을 다른 평민들과 구별하고 싶었던 부르주아 여성들도 머리에 무거운 천을 얹고 다니며 부를 과시했고, 이를 본 더 높은 계급의 귀족 여인들은 부르주아 여성들과 구별되기 위해 가볍고 화려한 실크 베일을 얹고 다녔다. 베일은 커튼처럼 기를란다의 양 옆으로 내려왔는데, 한쪽 천이 훨씬 길어 허리까지 늘어져있었다.


이 사치스러운 머리장식 '에냉'은 도덕주의자들과 종교인들의 비판과 미움을 한껏 받다가, 15세기 중반쯤 외국에서 온 스타일이라는 이유로 피렌체 정부의 법으로 금지되어 사라지게 되지만... 사실 유행의 끝자락이기도 했다. 유행은 언제나 법보다 빨랐다.





Lealtà



우플랑드 소매 하단의 커프스 부분에는 레알따{Lealtà}라는 모토가 금실과 작은 진주로 장식이 되어있는데, 자수로 드레스에 가문의 엠블럼이나 모토를 새기는 것은 이 시기 매우 유행했던 패션으로 당시에는 사치 방지법으로 인해 소매의 커프스 부분에만 허용되었다. Lealtà는 이탈리아어로 충실 또는 헌신이라는 의미로 약혼이나 결혼에 신부가 가져야 할 미덕이었다.




여인의 이름은 프란체스카 스콜라리{Francesca di Matteo Scolari}


이 부유해 보이는 여인은 스콜라리{Scolari} 가문과 연관이 있다.



스콜라리 가문의 문장


남성 모델의 손 밑에 있는 문장은 바로 스콜라리 가문의 문장으로, 그림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실마리를 풀 수 있는 첫 번째 단서를 제공한다. 하여 여인은 적어도 스콜라리 가문과 관련된 여인임을 알 수 있다.

문장이 남성의 손 밑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남성이 스콜라리 집안사람일 것이라는 설이 있으나, 문장은 여인이 차지하고 있는 내부 공간에 확고하게 자리하고 있다.


그림이 그려질 시기에 결혼했던 스콜라리 집안사람은 둘로, 여자인 프란체스카 스콜라리와 남자인 로렌조 스콜라리{Lorenzo di Rinieri Scolari}였다. 문장이 남성의 손 밑에 있다는 점을 근거로 과거에는 초상화의 모델을 로렌조와 그의 부인 아뇰라{Agnola(Angiola)}로 식별했으나, 최근 연구에 따라 모델은 프란체스카와 그의 남편 보나코르소{Bonaccorso Pitti}라는 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프란체스카는 상류층부터 잘 정착된 피렌체 가문들 중의 하나인 스콜라리 집안의 후손으로, 그녀의 아버지 마테오{Matteo Scolari}는 금융 및 정치가인 엘리트였다. 룩셈부르크의 지기스문트{Sigismund}황제에 의해 귀족이 된 유명한 무역상이자, 군인이었던 그는 피렌체 공화국 시민들로부터 '인민의 기사'로 추대를 받기도 했다.

한마디로 굉장히 부유하고 막강한 신흥 귀족 집안의 자녀였던 것이다.




머리&어깨 보석과 스콜라리 가문의 영토


프란체스카의 어깨에 달려있는 브로치프란체스카 어머니의 소유였던 브로치와 일치하며, 후에 딸인 프란체스카에게 물려주었을 확률이 높다. 귀족 가문들은 가지고 있는 재산을 꼼꼼하게 작성해 놓은 목록이 있었는데, 그 목록은 집안의 식기부터 보석 하나하나까지 포함되었다.

그림에는 두 개의 창이 있는데, 하나는 남성이 안을 들여다보고 있고 다른 하나는 밖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창문을 통해 보이는 풍경은 그녀가 속한 스콜라리 가족 소유의 영지와 건물을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초상화는, 이렇게 과할 정도로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차림새로 그녀의 귀족 혈통을 강조하면서 존엄성을 이어받은 존귀한 가문의 후손이라는 점을 암시해주고 있다.




프란체스카의 초상화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이중 초상화'이자, 왕족이 아닌 상인·영주 및 지도자에 의해 의뢰된 첫 번째 사례 중 하나로 간주된다. 프란체스카의 초상화는 특히, 여성의 혈통을 강조하며 계보를 드러내는 기록으로 여겨질 수 있다. 리피{Fra Filippo Lippi}의 초상화 이후, 피렌체에서 그려진 대부분의 여성 초상화에는 여성의 개인적인 상징과 족보가 명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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