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가운 도시의 남자
역사 속에서 귀걸이를 한 남자들을 찾는 건 특별한 일도,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하지만, 이 남자의 귀에 걸려있는 커다란 진주귀걸이는 어떠한 이야기를 담고 있을 것만 같은 기대가 듭니다.
가장 오래된 -문서화된- 귀걸이는 남자의 것이었습니다. 수메르 왕의 것이었죠.
과거에는 남성들이 훨씬 더 많은 보석을 착용하기도 했습니다. 한 무더기의 보석을 착용한 남자는 존경을 받았습니다. 오늘날에는 값비싼 시계가 그 비슷한 역할을 대신하고 있죠.
물론 보석은 시대와 나라별로 다른 의미를 내포했습니다.
고대시절 남성들의 귀걸이는 구별의 표식이나 부적으로, 이집트에서는 권력의 상징이었지만 불과 몇 세기 후, 로마에서 귀가 뚫린 남성은 가난하고 하급층에 속한다는 의미이기도 했죠.
전쟁의 시절에는 전투에서 용기와 소속을 강조하기 위한 용도로도 활용되었습니다.
귀걸이는 초상화의 연대를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이기도 합니다.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로마 시대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는 장식품으로 사랑받던 귀걸이는, 중세시대에 잠시 사라지게 됩니다. 교회가 반대했습니다. 신의 완벽한 창조물인 인간의 몸에 구멍을 뚫을 순 없었죠. 그것은 남녀모두에게 하느님의 뜻에 반하는 매우 불경스러운 행위로 간주되었습니다.
졸지에 불순한 상징물이 된 귀걸이가 다시 나타난 것은 탐험과 계몽의 시대, 르네상스였습니다. 콜럼버스의 배가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했을 때 진주의 시대는 열렸죠. 아메리카 대륙에는 금, 진주 등 다양한 보석들이 풍부했습니다. 콜럼버스는 섬 원주민들이 모아놓은 귀한 진주들을 가위, 바늘, 단추 등 신문물들과 교환했습니다. 이후 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한 유럽은 본격적으로 엄청난 보석들을 약탈하기 시작했습니다.
아프리카 서해안의 노예들은 진주를 캐기 위해 아메리카 대륙으로 끌려가 고통을 받았습니다. 맨몸으로 깊은 바닷속으로 들어가 손으로 직접 캐야 얻을 수 있는 작업은 상어의 공격을 받거나 익사하는 등 큰 위험과 대가를 치러야 했죠.
10,000개의 조개에서 겨우 하나의 진주를 얻을 수 있었기에, 그 희소성으로 진주는 궁극적인 지위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당시 유럽 전역에서 진주에 열광했기 때문에 진주어업은 빠르게 성장했지만, 무분별한 채취로 해양 생태계는 크게 훼손되었습니다. 아름다운 결과물만 취하는 유럽은 좋았겠지만, 생산지는 해변에 버려진 진주조개 잔해가 썩어가면서 나는 엄청난 악취와 파리떼로 황폐화되는 환경을 견뎌야 했습니다.
르네상스의 사람들은 '바로크: 일그러진 진주'라 불리던 크고 불규칙한 진주로 장식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 금세공인들은 매우 혁신적이고 뛰어난 기술을 바탕으로 독특하고 놀라운 작품을 만들어냈죠.
특히 영국 남자들은 보석을 매우 사랑했습니다.
헨리 8세는 보석을 좋아해 화려하게 자신을 꾸미는 것으로 유명했으며, 그의 궁정에는 보석이 넘쳐났습니다. 군주의 호의를 얻기 위한 궁정의 남자들은 군주의 취향에 따라 화려한 옷과 보석으로 꾸몄습니다. 자신을 주권자의 눈에 띄게 만드는 것이 그들에겐 중요한 임무 중 하나였습니다.
그의 딸 엘리자베스 1세 또한 보석 사랑은 유별났습니다. 여성의 몸으로 동시대 남성 군주들보다 취약해 보일 것을 염려한 여왕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보석으로 덮다시피 했죠. 특히 진주로 온몸을 휘감았습니다. 수천 개의 진주가 드레스 위에 꿰매어졌고, 크고 좋은 진주로만 엮인 목걸이를 7줄 이상 걸기도 했습니다.
순수함과 순결의 상징이었던 진주는 '처녀여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엘리자베스 1세의 상징이 되었죠. 진주는 곧 그녀였습니다. 주군의 취향에 따라 그녀의 궁정에서는 남녀 모두 주로 큼지막한 진주나 보석이 달린 귀걸이를 애용했습니다.
특히, 그녀의 시대부터 17세기까지 영국남자들 사이에서는 한쪽에만 차는 진주 귀걸이가 유행했습니다.
하나의 큰 진주는 신사의 공손함과 허세의 표식이었습니다.
차가운 도시의 남자
진주 귀걸이의 그들은 패셔너블한 차가운 도시의 남자들이었습니다.
그중 '월터 롤리: Walter Raleigh'경은 그들의 패션 리더 격이었죠.
그는 엘리자베스 1세가 총애하던 신하였습니다. 큰 키에 검은 머리칼을 휘날리던 파란 눈의 매력적인 청년은, 재치 있고 감각이 뛰어난 화려한 그만의 스타일로 여왕을 현혹시켰습니다. 화려한 복장에 큼지막한 진주 귀걸이가 돋보이는 초상화에서도 남다른 그의 패션센스를 엿볼 수 있죠. 군주에 대한 자신의 헌신과 특별한 관계를 과시하듯 그는 여왕의 흑백 색상의 옷을 입고 여왕을 상징하는 수많은 진주로 장식했습니다.
지주층 출신이었던 그는 군인이자 시인, 정치가, 역사가, 탐험가로 활동했으며, 한때 옥스퍼드 대학교를 다니기도 한 똑똑한 이였습니다. 노골적으로 야망을 드러내고 자신감 넘치는 태도의 롤리 경을 총애한 여왕은 높은 지위와 많은 부를 하사했습니다.
그는 배를 타기 위해 길을 걷던 여왕이 진흙 길 앞에서 주저하자 자신의 벨벳 망토를 길에 덮어 여왕의 눈에 들었다는 동화 같은 이야기로 유명하죠. 잘생긴 청년의 호의에 매우 흡족했던 여왕은 청년을 궁정으로 불러들였고, 궁정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사건이 일어났다고 추정되는 시기로부터 약 80년 후 출판된 책 [History of the Worthies of England]에 처음 등장한 이 에피소드는 사실 그저 낭만적인 전설일 뿐이지만, 이야기는 꽤나 오랫동안 진실처럼 여겨져 후대에 많은 그림을 낳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처녀여왕의 낭만적인 사랑이야기에 열광했기 때문이죠.
사실 두 사람의 관계는 로맨스보다는 매우 가까운 군신관계였으나, 그가 여왕의 시녀와 비밀 결혼으로 아이까지 낳자 매우 분노한 여왕이 그의 가족 모두를 런던타워에 투옥시켰던 일화도 있으니, 여왕이 어떤 부분에서 분노를 느낀 것인지는 여왕 본인만이 알 것입니다.
실제 두 사람이 만나게 된 계기는 1850년 아일랜드에서 일어난 봉기를 진압한 후, 월터 롤리가 기밀특사로 아일랜드에 대한 문서를 전하는 임무를 맡아 여왕을 알현하면서였고, 그는 곧 여왕에게 총애를 받는 인물이 되어 주로 식민지를 탐사하고 건설하는데 앞장섰습니다.
남성들의 한쪽 귀걸이*의 역사는 오래되었습니다.
고대의 이집트인, 그리스와 로마인들에게 하나의 큰 진주 귀걸이는 ‘바다의 부’를 상징했습니다. 본격적으로 항해의 시대가 열리면서 선원들 사이에서는 피어싱 문화가 성행했는데, 고대부터 귀를 뚫으면 더 잘 볼 수 있다는 믿음, 혹은 금 귀걸이가 익사나 배의 침몰을 막는다는 부적 같은 역할이었습니다. 사고로 익사할 경우 해변으로 떠내려온 시신의 매장 비용을 지불하는 기능을 수행하기도 했죠. 선원들은 시신이라도 고향으로 돌아가길 바라는 마음에 귀걸이에 고향이름을 새겨놓기도 했습니다.
선원들의 이러한 관습에 영향을 받아 당시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이나 월터 롤리 경과 같은 탐험가들이 항해 중 획득한 귀걸이를 착용한 모습으로 나타나자, 한쪽 귀걸이는 그들의 도전정신과 선구자적인 이미지를 연상시켜 주는 상징이 되었고, 남성들에게 매력적으로 비쳐 영국의 귀족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게 되죠.
월터 롤리 경은 한쪽 귀에 두 개의 진주 귀걸이를 하고 다니는 모습으로 유명했는데, 이는 진주로 상징되는 여왕에 대한 그의 충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여왕과의 긴밀한 관계를 자랑하는 정치적인 의도가 섞인 노골적인 과시였습니다. 특히, 거대한 크기의 진주를 남들처럼 하나도 아닌 두 개를 동시에 착용하면서 관습을 무시하고 자신만의 특별한 위치와 자격을 주장하는 거만한 행태를 보였습니다.
이 한쪽 진주귀걸이 패션은 이후 찰스 1세의 통치가 끝날 때까지 지속되었습니다.
*한쪽 진주 귀걸이에 대한 아주 현실적인 이유는, 그만큼 큰 진주는 드물었고 천연진주라 비슷한 크기나 모양을 찾기 매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역사 속 많은 일들은 항상 의외로 단순하고도 매우 당연한 이유로 행해지곤 하죠.
진주 귀걸이는 17-18세기에는 이상한 목적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인신매매로 유럽으로 끌고 온 흑인 소년들에게 진주 귀걸이를 채워 함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의 하얀 피부색을 강조하고 부를 과시하기 위해 배경이나 하나의 소품처럼 흑인노예들을 함께 그림에 등장시키는 것이 유행한 것이었죠.
이때, 흑인 노예들은 인간이 아닌 그들의 재산이었기에 화려하게 치장시켰는데, 귀에는 크고 하얀 진주귀걸이를 채웠습니다. 검은 피부색과 대조되는 하얀 진주귀걸이는 백인 우월주의에 입각한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대한 시각을 반영한 매개체였습니다.
20세기 중후반, 남성들의 한쪽 귀걸이는 동성애자들 사이에서 은밀한 상징으로 활용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대부분 왼쪽 귀에, 미국인들은 오른쪽 귀에 귀걸이를 착용하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그저 미적인 용도나 개인의 취향에 따라 귀걸이를 착용할 뿐, 더 이상 사회적인 상징이나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