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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DA Jan 31. 2019

당신과 나의 은밀한 대화의 도구 III

: 부채; 扇; うちわ


아마도 따가운 햇살로부터 피부를 보호하기 위함이 그 시작이었을 부채는 장소나 시기와 상관없이 거의 모든 인류의 공통적인 유산이죠. 서양 여인들의 대화 도구가 된 접부채를 탄생시킨 동양에서도 부채는 매우 친숙한 물건입니다.  



'겉모습에 미혹되지 말라'는 스승의 가르침을 잊지 않기 위해 제갈량은 자신을 유혹하던 학 꼬리의 깃털로 부채-학우선(鶴羽扇)-를 만들어 가지고 다녔고, 아름다운 자태로 날아다니던 하늘에 사는 선녀들은 손에 부채를 들고 우아한 동작으로 선녀춤을 추며 어린이들의 마음을 빼앗았으며, 이몽룡은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춘향이 앞에 나타났었지요.


동 서양 모두 초기 부채는 실용적인 목적보다는 권력의 상징으로써 종교의식에 쓰이거나 왕족들의 그늘을 위한 도구였으며, 전장에서는 무기나 지휘봉이 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동양에서는 귀족들의 과 풍류를 위한 훌륭한 액세서리로, 서양에서처럼 대화의 도구로 쓰이기보다 그 자체로 다양한 상징적 의미를 지니는 액세서리로 애용되었죠.



중국에서는 고대 도교의 신화 ‘팔선(八仙)’중 제일 큰 형인 종리권(鍾離權)의 상징으로, 긴 수염의 배불뚝이에 앞섶은 풀어헤친 그는 한 손에 깃털 부채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이 부채를 휘두르면 죽은 자도 살아나고 구리나 돌은 금 은으로 바뀌었죠. 그 부채 참 탐나네요.. :)

또한, 부채는 남녀 사이의 애정과 이별을 상징하기도 했습니다. 사랑을 담아 주고받은 부채를 한 몸과 같이 지니고 다니다 그 사랑이 끝나면 상대에게 전함으로 인사를 대신했던 것이죠. 고대시절 일본에서는 부채에 신성한 영이 깃든다 생각했는데, 신성하게 인간을 지켜줘 무병장수하며 삶을 풍요롭게 해 준다 믿었습니다. 에도시대엔 부채가 새해의 상징이라 접부채를 서로에게 선물했으며, 이는 장수와 행복을 기원하는 의미였습니다.



기산풍속도첩 중 ‘장가 가고’, 19c


우리나라 전통 혼례식에선 신랑과 신부가 차선(遮扇)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온 뒤 부채를 거두는데 이는 처녀, 총각이 부채를 거둠으로써 동정을 주고받았다는 상징이었습니다. 중국의 한 지방에서는 신부와 신랑이 부모의 집을 떠나기 전 마지막 단계로 집 앞에서 부채를 놓고 떠나는 풍습이 있는데, 이는 이 지방 방언으로 부채 ‘선(扇)'과 '성(姓)'의 발음이 같아 자신의 원래 성을 두고 남편의 성을 새로이 놓음으로써 영원히 함께 살아간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었죠. 14세기 일본 무로마치 시대부터 입기 시작한 일본 전통 결혼 복장은 남녀 모두 부채-금이나 은으로 된-를 들었는데, 이는 신혼부부의 행복과 밝은 미래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글과 그림의 등장


예로부터 동양의 선비들은 풍류를 즐기다 갑자기 시상이 떠오르면 시를 한 수 지어 부채 위에 쓰고 그림 그리기를 즐겨했죠.


후한(25-220) 말, 당시의 최고 사관이었던 양수(楊修)가 조조(曹操)의 부채에 그린 그림을 그 시작으로 볼 수 있는데, 그림을 그리게 된 연유가 재밌습니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붓을 든 양수는 실수로 먹 한 방울을 그것도 하필이면 조조의 부채에 떨어트렸고, 겁이 난 그는 재빨리 기지를 발휘해 점 위에 다리를 그려 넣어 파리로 완성시켜 위기를 모면하게 되죠. 비록 아름다운 그림은 아니었지만 아름다운 예술로의 길을 터준 이 파리를 시작으로 위진 시대(220-240)부터는 부채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 크게 유행하게 됩니다.


그려진 그림은 그 상징하는 바가 중요했는데, 예를 들면 여성들은 자신들의 순결함과 우아함을 상징하는 꽃이나 새가 그려진 부채를 들었고, 생일엔 국화나 학, 거북이 등 장수와 행운이 깃든 삶을 상징하는 그림이 그려진 부채를 선물했습니다. 나비 한 쌍이 행복한 결혼 생활을 상징했다면, 한 마리는 교만하고 바람기 있는 여성의 상징이었죠.



그렇다면 글자는 언제부터 썼을까요?

기원전 전한성제(孝成皇帝) 때부터 선비들이 부채 위에 시조를 쓰고 친구들과 편지처럼 주고받았다고는 하지만 가장 초기의 기록은 ‘역대명화기(歷代名畫記)’ 중 동진 왕조(317-420)의 중국 최고의 서예가 왕희지(王羲之)가 처음으로 부채 위에 글씨를 썼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시작은 이렇습니다.



여름이 끝나가는 어느 밤, 다리를 거닐다 손님 하나 없이 부채를 파는 늙은 노파를 본 왕희지는 측은한 마음이 들어 가만히 다가가 가격을 물었고, ‘20’이란 대답에 노파의 부채 위에 각각 5 글자씩 쓰기 시작했습니다.




문맹이었던 노파는 그저 깨끗하던 부채가 지저분해진 것 같아 마음이 언짢았으나.. 반신반의하며 그의 말에 따라 장으로 나가 펼쳐놓았고, 놀랍게도 부채는 날개 돋친 듯 순식간에 팔려 나갔습니다. 왕희지가 글자를 써준 저장성 사오싱시에 있는 그 다리는 ‘서예 다리’라 명명되어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비단이나 종이가 주 재료였던 동양의 부채는 학자들의 훌륭한 캔버스가 되어주었고, 시와 그림으로 장식된 부채는 그 주인의 개성을 잘 드러내 주는 액세서리로써 언제 어디서나 함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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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그란 형태의 단선은 주로 아녀자들을 위한 소품으로 우리나라나 중국에서는 주로 그녀들의 멋과 우아함을 드러내는 용도로 애용되었다면, 일본에서는 여성들이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무례하다 여겨 얼굴을 가리는 목적으로 사용되었는데, 특히 웃을 때나 음식물을 씹을 때 가려야 했죠. 접선선비들의 멋과 풍류를 위한 도구로 애용되었는데, 외출 전 마지막 단계를 완성하는 필수품으로 그들의 신분을 나타내 주는 일종의 상징과도 같았습니다. 우리네 선비들은 계절과는 상관없이 한 손에 쥘부채-접선-을 들고 다니며, 시상이 떠오르면 부채 위에 적기도 하고 들려오는 가락이 흥겨우면 부채로 장단도 맞추고.. 혹 곤란한 상황이 오면 부채로 얼굴을 가리기도 하는 등 부채는 그 주인과 희로애락을 함께하는 둘도 없는 친구였습니다.


흥미로운 건 우리나라나 중국의 선비들이 소매 속이나 허리띠에 부채를 끈으로 묶어 매달아놓고 다녔다는 점입니다. 엘리자베스 1세 시절 부스띠에나 허리띠에 끈으로 부채를 연결해 다니는 게 유행이었는데, 문화의 유사성은 재밌고도 놀랍습니다.


그렇다면 이 접선은 언제, 어디에서 나타났을까요?




접부채의 등장


권력의 상징으로써 크기로나 사용된 재료로나 그 존재감을 과시하던 부채는 드디어 언제 어디서나 가지고 다닐 수 있는 크기로 변신을 꾀합니다. 펼치면 부채가 되고 접으면 작은 막대기가 되는 이 획기적인 발명품은 대략 7~9세기경 신라 또는 고려, 혹은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한 때는 중국으로부터 단선을 수입해 사용하기도 했던 우리의 기술 좋은 선조들은 나무를 깎아 살을 만들고 종이를 붙인 접선을 만들어 중국에 수출하기에 이르죠. 하여 송나라 시대를 거쳐 명나라 시대에는 고려의 부채가 ‘고려선’이라 불리며 크게 유행하게 됩니다. 고려의 부채는 당시 누구나 갖고 싶어 하는 명품 중 명품이었습니다.     




고려는 참 싫어했지만 아름답고 기품 있는 고려의 부채는 참 좋아했던 북송시대 명문장가 '소동파(蘇東坡)'는 부치면 향까지 나는 고려의 백송선(白松扇)을 손에 쥐고 감탄하며 이렇게 말했죠.


부채는 선비들에게 계절에 상관없이 들고 다니던 낭만 서린 ‘멋스러움’의 상징으로, 조선시대에는 ‘합죽선(合竹扇)’을 언제 어디서나 마치 한 몸처럼 지니고 다녔습니다. 당시의 사대부 남정네들에게  '첩(妾)'으로 불리기도 했죠. 음의 기운을 가진 대나무와 한지로 만들어진 합죽선은 마치 여인처럼 다뤄졌고, 해서 부채는 남에게 빌려주지도 후대에 물려주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사후엔 죽부인과 부채는 함께 묻어주었다고 합니다. 덕분에 유물로써의 부채를 찾는 건 어려운 일이 되었습니다.



'춘색만원', 신윤복, 간송미술관

대나무 겉껍질을 얇게 켜 두 겹으로 붙인 뒤 한지를 접어 발라 완성한 합죽선은 만드는 방식 또한 우리만의 고유한 것이었지만, 가장 특별한 점은 손잡이 부분의 곡선이었습니다. 항상 손 위에 있기 때문에 쥐고 있는 손에 편하게 들어맞는 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했죠. 선조들의 뛰어난 감각이 돋보이는 인체공학적 디자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김홍도의 풍속화를 보면 얼굴을 가린 선비-김홍도 자신이라는 설도 있는-가 자주 등장하는데, 상황을 돕는 조력자로서 존재의 가치를 높였던 부채의 쓰임새를 볼 수 있습니다.    


곤란한 상황을 피하려 얼굴을 가리는 경우도 있었지만, 신분제 사회에서 상대를 배려해 신분을 감춰주려는 사려 깊은 의도도 있었습니다. 양반이 지나가면 신분이 낮은 이들은 길을 비키거나 심지어 타고 가던 말에서 내려야 했는데, 이러한 수고로움을 덜어주기 위해 부채로 얼굴을 가렸던 거죠.



비슷한 시기 혹은 조금 더 앞선 시기에 일본에서도 접는 형태의 부채가 만들어지는데.. 

가장 오래된 접부채는 몇 개의 나무 날을 붙여 만든 부채로 747년 일본 나라시에서 발견되었고, 869년부터 시작된 교토의 기온축제에서 축제 지휘관이 접부채를 사용했다고 일본은 주장합니다. 중국의 송사(宋史)에 헤이안 시대의 수도승 'Chōnen'이 988년 중국 황제에게 접부채-나무부채(hiōgi) 20개와 2개의 종이부채(kawahori-ōgi)-를 선물했다고 나와 있는 것을 보면 적어도 확인할 수 있는 선에서는 일본에서도 900년대엔 접는 형식의 부채를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현존하는 헤이안 시대의 부채를 보면 삼각꼴 모양의 단순한 형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초기의 부채는 몇 개의 나무날을 붙여 만든 나무 부채와 5개의 대나무 뼈대에 글이나 그림을 그린 종이를 붙여 만든 종이 부채였습니다.  



일본에서의 부채는 다양한 역할을 했는데, 특히 사무라이들에게 부채는 패션의 완성이었으며, 평화가 찾아와 옆구리에 검은 끼고 있지만 사용할 줄 몰랐던 사무라이들이 수두룩했던 에도시대에는 부채만 배에 갖다 대는 ‘부채 할복’이 통용됐었죠. 또한, 그들의 예법은 부채를 무릎 앞에 가로놓고 앉으면 앞에 앉은 사람보다 아래 있다는 예의의 표시인데, 이를 따라 다도(茶道)에서도 겸손의 표현으로 인사할 때 무릎 앞에 놓고 차를 마실 땐 발 뒤에 놓습니다. 서로의 영역을 선으로 그어주는 역할도 했던 이 부채는 아무리 더워도 사용되지 않습니다. 


헤이안 시대에는 남자가 사랑하는 그녀에게 부채에 와까(和歌:일본 시)를 적어 선물했으며, 현대에도 전통혼례를 할 때면 일본의 신부들은 손에 부케대신 부채를 들죠. 행복한 미래를 상징하고 재앙으로부터 보호해준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신랑 또한 부채를 드는데, 이는 헤이안 시대부터 결혼할 남녀가 평소 자신들이 쓰던 부채에 마음을 담아 서로 주고받았던 풍습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접이식 부채의 기원에 대해서는 두 나라의 주장이 공존하지만, 고려나 일본에서 탄생되어 중국을 거쳐 세계로 뻗어나갔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부채는 유물로 발견되기가 어려운 까닭에, 진위를 가리기 어려운 설이나 특히 그 시절 모호한 일본의 사료만으로 원조를 가려내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당사국인 두 나라의 주장은 제외하고 제 삼국인 중국에서 남긴 기록만을 보면, 일본은 10세기 말에 종이부채를 중국에 소개했고 고려는 그 이후인 11세기입니다. 


역사 속에서 유추를 해보자면.. 5세기에 일본으로 대거 건너간 백제 도래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간단한 형태의 부채가 일본 상인들에 의해 고려로 흘러들어온 뒤, 뛰어난 고려의 장인들을 만나 더 발전된 형태로 만들어져 중국을 통해 세계로 퍼진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만들어진 시기는 비슷한데, 부채를 만드는 기술과 모양이 다르며 유럽으로 퍼진 부채의 형태를 보면 고려선에 더 가까우니.. 역사가들도 각각 다른 평가를 내리고 있는 실정이죠.




* 왕우군(왕희지) : 우군 장군이라 왕우군으로도 불림.









사진출처: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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