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유럽의 모나리자, Meisje met de parel
그녀가 누군지 아무도 모르지만, 누구나 아는 그녀
입을 살짝 벌린 채 고개를 돌려 어깨너머로 바라보는 소녀의 모습은 시대를 초월하는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모나리자와 마찬가지로 정보가 없는 신비한 소녀의 정체는 작품의 인기를 높이는 데 한몫했다. 네덜란드의 황금시대에 그려진 이 무명의 소녀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 우리의 눈을 응시하며 끌어당긴다. 시선에 사로잡힌 그 순간 우리는 관찰자를 넘어서 그림에 관여하게 되는 심리적 대상이 된다. 이는 [모나리자; Monna Lisa]와 매우 닮아있다. 모델의 감정을 포착하여 담아내는 화가의 방식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떠오르게 하며, 실제 그녀는 '북유럽의 모나리자'라 불리기도 한다.
터번을 두른 소녀의 이국적인 모습
베르메르 소녀의 터번은 그 형태와 색이 독특하다. 특히 터번의 형태는 화가가 연출한 스타일로 짐작된다. 단순하지만 감각적인 스타일로 연출된 머리장식은 묘하게 세련된 느낌마저 선사한다.
유럽에서 오스만 제국의 패션은 이미 르네상스 시절에 유행했었고, 동방에서 만들어낸 고품질의 이국적인 물품들은 베네치아를 통해 유럽으로 들어와 유럽인들의 집안 곳곳을 장식한 지 오래였다.
그중 터번 패션은 15-16세기 유럽 남성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돈 있고 힘 있는 남성들은 머리에 천을 한 보따리씩을 얹고 다니며 위엄을 과시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은 유럽의 주요 경제 및 문화 세력이었다. 발달된 문명에서 온, 이 머리가 강조되는 머리장식은 철학과 지식이 중요했던 유럽 르네상스 인들에게 위대한 지식의 근원처럼 여겨졌다.
이러한 터번은 이국주의의 상징으로 유럽의 화가들이 애용하는 소품이 되었다. 이국적인 분위기의 연출과, 풍성하고 주름진 직물의 표현으로 화가들은 자신의 기량을 뽐낼 수 있었기 때문에 선호했다.
소녀의 황토색 재킷 또한 터번의 영향으로 이국적이라 뭉뚱그려 표현되지만, 사실 당시 네덜란드 여인들이 입었던 재킷의 형태다. 화가는 넓고 힘찬 붓터치로 큰 주름을 가진 두툼하고 투박한 옷감 -아마도 모직물- 을 표현했다. 몸통에 붙여진 소매의 소매산 뒷부분에 보이는, 넓은 간격으로 접어서 생긴 두툼한 팬시턱은 당시 여인들의 드레스나 겉옷의 소매에서 볼 수 있으며, 이는 소매 뒷부분에 큰 볼륨감을 주려는 장치였다.
바로 이 터번과, 형태가 제대로 보이지 않아 이국적인 옷처럼 보이는 상의는 그림의 정체성에 영향을 주었다. 그림은 실존인물의 초상화가 아닌 머리와 얼굴 표정에 대한 연구인 트로니(Tronie)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비평가들은 베르메르가 다른 그림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생각하는데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그려지기 약 10년 전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트로니로 유명했던 플랑드르 예술가 미키엘(Michiel Sweerts)의 [작은 꽃다발을 들고 있는 터번 소년]에서 영감을 받았을 것이라 추측한다. 어두운 배경은 인물의 입체감을 높이기 위해 당시 초상화에서 널리 표현되었으며, 소년의 노란색 터번과 군청색의 숄은 [진주 귀걸이의 소녀]를 떠올리게 한다.
혹은 당시 유럽을 사로잡은 -베르메르도 잘 알고 있었을- 베아트리체 첸치*를 묘사한 그림에서 영감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베아트리체의 터번과 뒤를 살짝 돌아보는 포즈가 닮아 있다. 당시 유럽 전역으로 퍼진 바로크풍의 화가 귀도 레니(Guido Reni)의 사본을 구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 자신을 학대한 아버지를 죽이고 1599년 참수당해 억압받는 순수함의 상징이 된 이탈리아의 귀족 여인
소녀는 누구?
주로 집 안을 배경으로 가정환경 속의 여인들을 묘사하는 그림을 그린 네덜란드의 16세기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Johannes Vermeer)는, 일기나 개인적인 기록을 남기지 않아 그림에 대한 정보는커녕 화가에 대한 정보도 부족한 실정이다. 살아있는 동안 자신의 동네에서만 유명했던 화가는 19세기말 재발견되기 전까지 거의 무명이었기에 그림에 대한 정보도 찾기 어렵다. 이렇게 남은 미스터리는 보통 다양한 가설로 채워지기 마련이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베르메르의 장녀 마리아로 추정되기도 한다. 그녀가 베르메르의 다른 그림 속의 소녀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녀의 얼굴은 그림마다 조명이나 포즈가 다르기 때문에 비교하기는 어려우며, 반복되어 묘사되는 특징적인 부분 같은 결정적인 증거도 없기 때문에 가설에 불과하다.
그리고 소녀 마리아에게는 또 다른 의혹이 있다. 미술사가이자 교수인 벤자민 빈스톡(Benjamin Binstock)에 따르면, 마리아는 아버지가 그린 그림의 1/5을 그렸으며, 이 그림들은 모두 비슷한 종류의 귀걸이를 한 소녀를 묘사하고 있다. 베르메르의 그림 중 몇몇은 베르메르의 그림을 모방한 듯 매우 유사하지만, 회화의 기술적 수준이 낮은 결과물을 보였기 때문에 학자들에게 의심을 심어주었다.
실제 얼마 전, 베르메르의 그림 중 하나인 [플루트를 가진 소녀]가 베르메르의 작품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다. 2022년 10월 NGA(National Gallery of Art)는 과학적 조사로 밝힌 여러 근거 중 화가의 기법과는 다른 거친 질감으로 표현된 점 등을 밝혀내며, 그림은 견습생이나 화가의 기법에 익숙한 이가 그렸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베르메르는 견습생 없이 혼자 작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견습생으로 등록할 필요가 없는 자녀들 중 누군가 아버지를 따라 그림을 그렸을 가능성이 높다. 학자들은 그 누군가가 베르메르의 장녀 마리아일 것으로 추정한다. 그녀가 그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들은 비록 회화적 기술은 부족하지만, 심리적인 통찰력과 표현력은 아버지를 능가한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1654년경에 태어난 마리아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그려진 시기 10살 남짓한 나이로, 아버지의 화실에 모델로서 참여를 시작으로 자연스럽게 붓을 들었을 것이다. 그녀가 그림을 그린 이유에는 재능도 있었겠지만, 당시 악화된 가정의 재정적인 문제로 인한 것일 수 있다. 베르메르의 가족은 대가족이었고, 베르메르의 그림 그리는 속도는 매우 느렸다. 그는 정확성을 추구하며 일 년에 겨우 두어 점을 그렸을 뿐이다. 전문가들은 그녀가 아버지의 견습생이 된 시기를 대략 18살 무렵으로 추측하며, 소녀가 그린 그림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팔린 것으로 짐작한다. 이는 그녀가 그림에 대해 영원히 침묵해야 할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당시 남자의 경우 10~12세경 연습생으로 화가 밑으로 들어가 훈련과정을 거쳤으며, 시간이 지나 제자에서 벗어난 이후에는 스승과 정식 계약을 맺고 작업을 하지만, 작품은 스승의 이름으로 서명되는 것이 시대의 관습이었다.
당시 네덜란드의 중산층 여성들은 남편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며 종교의 가르침대로 소녀, 결혼적령기, 신부, 아내, 어머니, 과부로서의 삶을 살았다. 여성들의 활동범위는 가정 내였다. 바느질, 자수, 도예와 같은 소일거리를 했지만 생계를 위한 일은 아니었다. 당시 소수의 여성 예술가가 존재했고 몇몇은 매우 성공적으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일반적으로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비판적인 반응이 주를 이뤘던 시대였다. 마리아의 경우엔 가족의 생계와도 직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에 자신의 이름을 내세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아래 그녀 회화의 기술적 오류는 가려졌고 쌓이는 빚도 갚을 수 있었다. 비밀은 지켜져야 했다.
후대에 와서도 그림이 마리아의 작품으로 드러날 경우 그것은 그림의 ‘가치의 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에, 안 그래도 얼마 없는 화가의 그림들 중, 베르메르의 그림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길 바라는 이는 없을 것이다.
마리아는 결혼 이후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초상화인가.. 트로니(Tronie)인가..
제대로 된 정보가 없는 초상화들이 그렇듯, 밝혀내는 건 학자들의 몫이다. 그렇기에 논란은 숙명이다.
초상화라 주장하는 학자들은 그녀가 화가의 큰 딸 마리아나 집에서 일하던 소녀라 추측하고, 트로니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배경이 없으며 소녀의 눈썹이나 속눈썹등의 묘사가 없다는 점*과 그녀의 이국적인 패션을 들어 이상화된 인물의 그림으로 추정한다. 그림을 소장하고 있는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측 입장 또한 후자와 같다. 네덜란드에도 터번은 최근 발달한 무역으로 들여와 인기를 끌었지만, 17세기 네덜란드 소녀들의 패션은 아니었다. 특별하게 연출된 모습인 것이다. 그리고 화가의 사후 작성된 유품 목록에는 ‘터키 스타일로 그려진 두 개의 트로니’가 있었는데, 학자들은 소녀의 초상화가 그중 하나일 것으로 추측한다.
* 하지만 2018-2020년 미술관의 정밀한 연구에 의해 소녀에게는 섬세한 속눈썹이 있었고, 배경에는 녹색 커튼이 있었다는 것이 밝혀짐. 적어도 그림을 위해 어떤 모델이 있었음을 시사함.
네덜란드어로 'Tronie; 트로니'는 대략 '얼굴'을 의미하며, 초상화처럼 보이지만 특정한 유형의 캐릭터나 상상 속 인물을 그린 이상화로, 17세기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회화 스타일이다. 렘브란트에 의해 대중화된 네덜란드의 특징적인 예술로 약 40년 동안 유행했으며, 지금은 사라진 용어이다. 특별한 복장을 입고 과장된 표정이나 제스쳐가 특징인 머리와 얼굴 표정에 대한 연구로, 지금의 캐리커처라 할 수 있다. 트로니는 고급 회화가 아니었다. 그림에도 계급이 있다면 트로니는 낮은 계급에 속했다. 애초에 공개 시장을 위해 제작된 트로니는 저렴한 가격으로 대량 판매가 목적이었기 때문에, 구매자의 시선을 한 번에 사로잡아야 하는 힘이 필요했다. 이는 소녀를 이국적이고 매혹적으로 그려낸 이유에 해당될 것이다.
주인공이 된 진주 귀걸이
전통적으로 진주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위와 권력의 상징이었다.
다른 보석들과는 달리 가공할 필요 없이 그 자체로 완성품이었던 진주는, 그 완벽한 아름다움과 희소성으로 오랜 시간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왕족과 귀족들만이 독점적으로 착용했다.
17세기에도 진주는 부와 권력, 중요한 지위의 상징이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일반 시민들도 진주를 원하기 시작했고, 실제 이를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점차 돈이 계급이 되는 사회가 되면서 사람들은 이 돈으로 얻어진 사회적 지위를 과시적으로 드러내고 싶어 했다. 당대의 화가들은 여인들이 목걸이를 차며 귀걸이를 거는 모습, 화장대 위의 보석들을 자연스러운 구도로 연출하여 화폭에 담아내었다.
진주는 베르메르의 서명만 있을 뿐 연대를 알 수 없었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연대를 알려주기도 하는데, 베르메르가 진주를 모티브로 그림을 그렸던 1665-68년 경으로 추정한다.
가짜 진주의 유혹
소녀의 귀걸이는 그 크기가 남다르다. 두어 번의 붓놀림으로 완성된 진주 귀걸이는 자세히 보면 고리 부분이 없다. 하여 화가의 예술적인 과장과 상상의 산물로 보기도하는 소녀의 진주 귀걸이는 가짜일 확률이 높다. 일단 그 크기가 자연에서 나왔다고 보기엔 어려울 정도로 크며, 만약 있다 하더라도 그리 넉넉하지 못했던 화가에게 그만한 진주를 살 여유는 없었다. 부와 권력의 상징으로 누구나 갈망하던 진주가 모조품으로 탄생하게 된 데에는 원하는 것을 기어이 손에 쥐고 싶은 인간의 심리에 따른 당연한 결과였다. 당시에는 모조 진주가 다량으로 생산되어 왕족이나 귀족들만 했던 진주 장신구를 일반 여성들도 착용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모조 진주의 역사는 꽤나 깊다. 고대 로마인들은 유리구슬에 은을 입힌 뒤 다시 유리를 입혀 흉내를 냈으며, 진주 특유의 무지개 빛깔을 내기 위해 물고기 비늘이나 자개를 활용하기도 했다. 특히 16세기 베네치아의 유리 제조업자들의 능력은 매우 탁월해 유사한 인공진주를 많이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값싼 유리진주도 흔했다. 그리고 진주 귀걸이가 아닌 물리적인 근거를 제시한 주장도 나왔다. 네덜란드의 물리학자 빈센트(Vincent Icke)교수는 그림 속 귀걸이가 만드는 연백색 반사광은 진주가 만들어낼 수 있지 않다는 점에 근거하여, 페인트칠한 유리 또는 은(은도금)으로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림을 소장하고 있는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도 진주귀걸이는 가짜일 수 있다는 입장에 있다.
하지만 진주가 진짜이건 아니건 진주는 터번을 제치고 명실상부 그림의 주인공으로 자리를 차지했으며, 소녀는 우리에게 영원히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