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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DA Jan 10. 2024

왕녀의 드레스

; Margarita Teresa


이 다섯 살 남짓한 어린 소녀는, 아마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소녀일 것이다.


Infantin Margarita Teresa, Diego Velázquez,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1656


어른과 같은 드레스를 갖춰 입고 꼿꼿한 자세와 위엄 있는 표정으로 관객을 보고 있는 소녀는, 17세기 중반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대제국 스페인의 왕녀다운 기품이 서려 있다. 작고 여린 어깨 위에 짊어진 왕가의 의무에 짓눌려 있는 듯한 어린아이의 진지한 태도에서 애처로움마저 느껴지는 듯하다.





작고 귀여운 소녀: 스페인의 마르가리타 테레사 ‘Margarita Teresa de España’

1651, 후계자가 필요한 스페인 제국 왕가에 기다리던  생명이 태어났다. 아이의 이름은 할머니의 이름을 물려받아 '마르가리타: Margarita'로 지어졌다. 혈통을 지키기 위해 근친을 이어온 합스부르크 왕가의 아이들은 아프거나 요절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부모는 아이를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 성녀 ‘테레사: Teresa’ 이름 또한 부여했다. 유전병이나 단명의 정확한 원인을 몰랐던 그들은 신께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동시대 사람들에게 작은 천사 묘사된 왕녀는 작고 연약했지만, 우려스러웠던 외모도 정상적인 아이로 태어나 부모의 기쁨이 되어주었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페르디난트 3세(Ferdinand III)는 스페인으로 시집간 딸 마리아나의 출산소식을 듣고 아이를 자신의 아들과 짝 지워주기 위해 사위에게 갓 태어난 손녀의 초상화를 보내 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귀엽고 깜찍한 마르가리타의 모습에 반한 할아버지는 지속적으로 손녀의 초상화를 요구했다.



나는 손녀의 초상화에 매우 만족합니다.
굉장히 기쁘며, 그녀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왕가의 아이들은 어린 나이에도 성인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지배계층의 위엄과 고귀함을 강조하기 위해 격식 있는 차림새와 침착한 태도 속에서, 동그란 눈의 순진해 보이는 표정만이 유일하게 유아임을 드러내 주고 있다. 스페인 왕족들은 어린 시절부터 차갑고 위엄 있는 태도를 갖도록 교육받았고, 그중에서도 무표정은 필수적인 특징이었다.


마르가리타 왕녀 3~4세 무렵

화가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는 아이의 귀엽고 순수한 매력을, 밝은 빛과 온화한 색감 그리고 부드러운 곡선으로 화폭에 담아냈다. 밝고 옅은 색감의 드레스 또한 전통적으로 기대하는 신붓감의 순수하고 온순한 여성적인 미’를 강조해준다. 초상화의 목적인 결혼을 위한 혈통의 증명을 위해 화가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특징인 동그란 눈, 둥근 볼, 도톰한 입술의 작은 입 등 곡선을 강조하여 표현했다. 왕녀의 드레스는 성인여성의 미니어처 버전으로, 화려하고 세련되게 꾸며졌다.



권력의 무게를 견뎌라! 거대한 드레스

이제 왕녀로서의 임무를 수행해야 할 나이가 된 다섯 살 아이의 꼿꼿한 태도는, 존경받는데 익숙해진 듯 제법 위엄이 서려 있다. 



왕녀는 탁자를 짚는 포즈에서 벗어나 양팔을 뻗어 형성된 대칭적인 삼각형 프레임의, 질서와 안정감을 선사하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왕족의 초상화는 고귀하고 위엄 있는 이미지를 전달하기 위해 신중하게 계산된 작업이었다. 동시에 전통적으로 여성에게 기대하는 순종적이고 여성스러운 특성 또한 담아내야 하는 작업으로, 벨라스케스는 왕녀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각도를 택함으로써, 그림을 의뢰한 오스트리아 왕가가 기대하는 순종적인 여성의 이미지를 반영했다.


부스토(Busto)로 몸통을 조이고, 양옆으로 넓어진 속치마로 받쳐진 치마 바스키냐(Basquiña)는 옆으로 퍼져 걸을 때에도 주의를 요해야 했으며, 모든 활동에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을 정도로 불편한 옷이었다.

당시 스페인 여성들은 매우 종교적이고 엄격히 통제되는 삶을 살고 있었다.



스페인 여성들은 먼저 그들의 아버지와 남편, 그다음은 교회,
그리고 마지막으로 패션과 그에 대한 완고한 법칙에 의한 포로로 잡혀 있다.



ㆍGuarda + Infante – ‘아이를 보호하는..’

15세기부터 등장한, 드레스의 치마 부분을 엉덩이부터 균일하게 커지는 종모양으로 만들어준 치마 지지대인 베르두가도(Verdugado)는 여전히 여인들의 큰 사랑을 받고 있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종 모양이었던 지지대는 여러 번 그 모습을 바꾸었다. 특히 프랑스로 건너가서 그 형태는 다소 특이하게 변형 -옆으로 넓어지는- 되어 애용되다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와 스페인 여인들에 의해 좀 더 과장된 새로운 형태로 탄생되었다. 


이 새로운 형태는 과르딘판테: Guardinfante’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스페인어로 ‘보호’인 ‘Garda’와 ‘아기’를 의미하는 ‘Infante’가 만나 ‘아기를 보호한다’는 의미였다. 드레스는, 여인들이 큰 형태의 치마 속으로 부정하게 임신한 배를 숨기기 위해 입는다는 소문을 달고 다니면서 이러한 황당한 이름으로 불렸다. 프랑스의 영향을 받았다고는 하나 스페인 스타일로 재탄생되었고, 스페인어로 이름까지 붙여진 이 속치마는 이상하게도 프랑스에서 건너온 나쁜 아이템이 되었다.



결혼하지 않은 스페인 소녀들의 차림새, 1598 (좌) / 마요르 광장, 마드리드, c. 1634 (우)


당시 스페인 여인들은 수수하고 보수적인 의복으로 온몸을 가리는 것도 모자라, 외출 시에는 검은 베일로 얼굴까지 덮어 남자를 유혹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했다. 이에 반해 프랑스에는 패션과 남녀 관계에 있어 열린 마음으로 좀 더 느슨한 관계가 허용되는 자유사상이 펼쳐지기 시작했고, 주변국가들도 이에 영향을 받아 여인들의 활동범위가 넓어지는 등 시대는 변하고 있었다. 스페인의 도덕주의자들은 스페인 여인들도 이러한 영향에 휩싸일까 두려웠다. 여성을 통제하려는 교회와 남성들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행해진 반대에, 당시 스페인과 사이가 좋지 못했던 프랑스는 좋은 명분이 되어 주었다. 스페인의 도덕주의자들에겐 멀리 있는 프랑스 여인들에게 오명을 뒤집어씌우는 편이 훨씬 쉬웠을 것이다.


드레스의  형태부터 마음에 들지 않아 하며 거부감을 느끼던 스페인의 남성들은 당장에 들고 일어섰다. 수수하게 입고 가정에 충실한 여인 이상적인 여성상이었던 시대에, 남성들은 부인들이  드레스를 입고 집안일을 하지 못할 까봐 걱정이 되었고,  나아가 값비싸고 많은 천이 필요한  사치를 조장하는 드레스를 입는 풍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인들의 옷까지 통제하고 싶었던 남자들은 여인들이 명령을 거부하며 계속  패션을 즐기자, 드레스를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무기로 여겨 아예 없애고자 했다.



법원 감옥, 마드리드, 1660년경


우리의 왕께서는 자신의 몸을 공개적으로 남용하도록 당국의 허가를 받은 여성
-매춘부- 을 제외하고, 그 어떤 지위나 계급의 여성도 ‘과르딘판테’
또는 그와 유사한 의상을 입을 수 없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결국 왕까지 나서 금지령이 내려졌고, 100개가 넘는 드레스가 법원 감옥의 발코니에 걸려 공개 처형을 당했다. 하지만, 스페인의 지도자들이 그렇게 두려워하던 변화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종교와 남성들의 통제에 순응하는 삶을 살았던 스페인 여인들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주체성을 가지고 자신들만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졸지에 뱃속의 아이를 숨기기 위한 도구이자 매춘부들만 입는 옷이 되어버린 과르딘판테를, 여성들은 여전히 사랑했다. 금지령은 하나의 신호탄이 되어, 과르딘판테의 인기를 실감케 하고 날개를 달아주는 역할을 했을 뿐이었다.

금지령은 왕의 집에서부터 지켜지지 않았다. 특히 마르가리타 엄마인 마리아나 왕비는 남편이 내린 금지령이 무색하게 과르딘판테를 궁정복으로 입었으며, 그녀의 시대에 크기는 점점  커졌고 인기는 최절정을 이루었다그렇게 과르딘판테는 화려하게 부활하여 시대의 주인공이자 스페인을 대표하는 드레스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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