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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DA Jan 24. 2024

남편의 그리움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초상화

; 포르투갈의 이사벨



이 여인의 초상화에는 한 남자의 가슴 절절한 사랑이야기가 담겨있다.



그림 1. La emperatriz Isabel de portugal, Tiziano Vecellio, Museo del Prado, Madrid, 1548


황실의 위대함과 막강한 부를 반영하는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의복을 입고, 현명함을 드러내 주는 책을 한 손에 든 채, 황제 권력의 상징인 쌍두 독수리로 장식되어 있는 휘장 앞에 앉아 제국의 황후로서 위엄을 드러내 주고 있는 그녀의 이름은, ‘포르투갈의 이사벨: Isabel de Avis y Trastâmara’이다.





추억이 만들어낸 초상화

여인의 초상화는 사실 주인공이 죽은 지 9년이나 지난 후 그려진 모습으로, 남편의 기억 속에 아름답게만 남은 부인의 이상화와 같은 초상화다.

'카를 5세: Karl V'는 사랑했던 부인의 이른 죽음에 크나큰 충격과 슬픔에 빠졌고, 그녀를 추억할 만한 마음에 드는 초상화가 없다는 사실에 당혹했다. 주변을 수소문해 부인의 초상화를 찾아보았으나 자신이 기억하던 아내의 모습이 아닌 것에 실망한 카를 5세는 결국 새로운 초상화를 그리기로 결심했고, 자신이 선호하던 이탈리아 화가 '티지아노: Tiziano Vecellio'에게 그림을 의뢰한다.

당시 티지아노는 실제보다 훨씬 멋진 모습으로 그리지만, 충분히 누구인지 인식할 수 있는 선에서 초상화를 그려내는 능력으로 유럽의 통치자들 사이에서 매우 인기 있었다.


그림 2. 티지아노가 1545년 그린 포르투갈의 이사벨이 담긴 인쇄물


첫 번째 그려진 초상화는 퇴짜를 맞았다. 의뢰인은 매우 깐깐했다. 카를 5세 외에 모두가 기억하는 황후의 매부리코를 화가 티지아노가 그대로 그렸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화가에게 코의 수정을 요구했고, 2년 이상을 기다린 후에야 수정된 초상화(그림 2)를 받아 볼 수 있었다. 이 초상화는 티지아노가 그린 여러 점의 황후 초상화의 기본 모델이 되어주었다.


티지아노가 두 번째로 그린 초상화(그림 1) 속 이사벨은 화려하면서도 기품과 위엄이 넘치는 군주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카를 5세는 아내가 경건하고 현명한 군주이자, 자신이 느꼈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여인의 모습으로 묘사되길 바랐다. 황제의 낭만적인 추억으로 완성된 황후의 얼굴은, 먼저 그려진 초상화보다 좀 더 다듬어져 굴곡진 부분 없이 수려한 외모를 선보였다.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얼굴에 곧게 뻗은 코, 하얀 피부에 붉게 물든 뺨은 르네상스가 추구하던 고전적이고 이상적인 아름다움이 반영되었고, 코를 제외한다면 동시대 사람들이 황후를 표현한 모습과 닮아 있었다.


부부는 서로 사랑했지만, 함께 한 시간은 13년으로 그리 길지 않았다. 게다가 그중  반년 이상을 전쟁과 통치 이유로 떨어져 지냈기 때문에 부부는 항상 서로가 애틋했다.

특히, 이 부부의 사랑이 특별한 이유에는 '서로 다른 시간의 기다림'에 있다. 부부에게는 서로 모르지만 각자 서로를 그리며 기다린 시간이 있었다. 이사벨은 결혼 전 9여 년간*을 홀로 조용히 카를 5세를 기다렸고, 카를 5세는 이사벨의 이른 죽음 후 당시 황제로서는 드물게 재혼도 거부한 채 19년간 이사벨을 그리워하다 눈을 감았다. 초상화는 카를 5세의 그리움과 탄식 속에서 탄생된 결과물이었다. 그는 남은 생애동안 검은 옷만 입은 채 죽은 아내를 애도했고, 티지아노가 그린 이사벨의 초상화들을 들고 다니며 그녀의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사벨은 14살의 나이부터 본 적도 없는 카를 5세를 자신에게 맞는 배우자로 마음에 품고 기다렸지만, 카를 5세에게 이사벨은 그저 정략결혼을 위한 여러 신붓감 후보 중의 한 명으로 결혼식날 얼굴을 직접 보기 전까지 이사벨에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조건에 맞춘 결혼이 성사되던 날, 이사벨은 당시 신부로는 매우 늦은 나이인 23살이었다.



패션의 아이콘


포르투갈 리스본(당시 주요 항구 도시)의 옛 지도, 1598


포르투갈의 왕녀였던 이사벨은 스페인 궁정의 패션 아이콘 되었다. 백마를 타고 스페인에 입성한 첫날부터 이사벨은 스페인 국민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당시 호화롭기로 유명했던 포르투갈 궁정에서  왕녀는 흰색 새틴 원단의 슬래쉬 사이로 금색의 안감이 드러나는 드레스를 입고, 진주와 깃털로 장식된 흰색 새틴 모자를  매우 아름다운 모습이었다고 전해진다. 15세기부터 시작된 식민 지배를 통해 리스본 항구에 들어오는 이국적이고 화려한 물품들에 익숙했던 이사벨은, 앞서가는 감각과 취향으로 스페인을 사로잡았다.



드레스 디테일 - 드레스에 달린 수많은 작은 진주들과 금실 자수, 진주 줄이 달린 보석 펜던트 목걸이, 허리끈


이사벨 황후는 스페인의 궁정복 차림새로, 진한 붉은색 벨벳 드레스의 금실 자수 위에는 작은 진주들이 박혀, 화려함 속에서 황후의 권위와 아름다움을 반영하고 있다. 15세기말부터 시작된 유럽 제국들의 아메리카 정복과 식민지화로 보석의 유입은 엄청나게 증가했고, 진주목걸이, 큼직한 보석 펜던트에 이어 드레스의 가장자리 정도만 장식했던 보석은 드레스 전체로 퍼졌다. 드레스의 몸통과 스커트가 각각의 프레임으로 모양을 형성하자, 허리를 장식해 주는 구슬이나 보석으로 장식한 허리끈도 유행하게 된다. 많은 보석이 달린 드레스는 무거워졌다. 목부터 발끝까지 감싸는 단단하고 경직된 형태의 드레스는 신체의 움직임을 최소화시켰다. 상류층들은 이러한 거추장스러운 의복을 택함으로써 일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적 지위와 특권을 드러냈다.


이사벨은 어머니의 재단사였던 이를 함께 스페인에 데려왔고, 재단사는 황후를 위한 의류 작업실을 열어 황후와 그녀의 숙녀들을 위한 의상을 디자인하고 제작했다. 작업실은 의복과 관련된 높은 기술을 지닌 많은 하인들로 구성된, 현대의 ‘오뜨 꾸뛰르: Haute couture’* 의 현장과 다를 바 없었다. 이런 황후의 패션에 대한 감각과 열정은 핏줄의 영향이었는지도 모른다.



*프랑스어 ‘Haute: 고급, 상류의’, ‘Couture: 바느질, 양장점’의 조합어로, 독창적인 패션의 고급 맞춤형 의복을 의미한다.




ㆍ드레스 라인의 혁명, 베르두가도: Verdugado


15세기 여성의 드레스는 큰 변화를 맞이했다. 중세시대의 수직적인 라인에서 벗어나, 몸통과 스커트 부분이 극명하게 나뉜 드레스로 대혁신이 일어난 것이다. 극도로 뻣뻣해 보이는 상체는 원통형 깔때기 모양의 단단한 코르셋으로 눌러 가슴과 허리의 곡선을 없앴고, 허리 아래로는 스커트 지지대인 ‘베르두가도: Verdugado’를 착용해 종 모양의 실루엣을 이루었다. 이제 여성의 몸은 인공적인 형태의 억압에 갇혀 20세기 초까지 풀려나지 못한다. 코르셋 역사의 시작이었다.

고대 스페인어로 ‘잎이 무성한 숲’이라는 의미의 베르두가도는, 엉덩이 라인에서 치마를 확장시켜 주는 장치로, 갈대 · 고리버들 · 유연한 나무, 철사 등을 링모양으로 만들어 천에 고정시킨 속치마였다. 마치 새장처럼 치마를 지탱해 주는 베르두가도는 여인들의 사랑을 받으며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그림 5. 헤롯의 연회, 1475 / 세례 요한의 참수, 1490 / 포르투갈의 이사벨, 16c - 속 베르두가도


일반적으로 ‘스페인 드레스’로 알려진 1468년경에 개발된 이 새로운 드레스의 탄생 비화에는, 카스티야의 왕비였던 '포르투갈의 후아나: Juana de Portugal'가 등장한다. 후아나는 사촌인 ‘카스티야의 무능자’ 엔리케 4세와 결혼해 7년 만에 공주를 낳았으나, 성적 취향이나 기능에 대한 의심을 받았던 왕 엔리케 4세의 진짜 자식이 맞는지 논란이 일어났고, 결국 왕은 후아나를 왕실에서 추방해 알라에호스성에 가두게 된다. 하지만 감금 기간 동안 후아나는 그곳에서 만난 애인의 아이를 가졌고, 불러오는 배를 감추기 위해 드레스의 실루엣을 변형시켰다. 치마에 단단한 고리 버들이나 나무로 만든 후프를 고정시켜 복부부터 넓은 공간이 형성되는 독창적인 형태를 만든 것이다. 

초기의 베르두가도는 후프를 겉치마 안쪽에 고정한 형태였다. 그 자체로 드레스의 치마 부분이었기 때문에 다채로운 색상과 새틴 또는 실크, 태피터와 같은 비싼 원단으로 만들어졌다. 이후 후프가 달린 치마 위로 또 하나의 드레스를 걸쳐 이단 치마처럼 입었으나(그림 5. 세례 요한의 참수) 점점 후프가 달린 치마는 속치마가 되었고, 그 위로 화려하게 장식된 겉 스커트 ‘바스키냐: Basquiña’를 걸치는 것으로 의복의 형태가 굳어졌다.

새장 모양이었던 베르두가도는 16세기 초 중반 무렵부터 원추형의 베르두가도로 변형되어 인기를 끌었으며,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특히 영국으로 건너가 16세기 튜더 왕조 패션의 필수품이 된다.


임신을 숨기기 위해 만들었다는 베르두가도의 탄생 비화는 사실, 확인이 불가능한 전설이다. 2021년 '마크: Mark D. Johnston'의 연구에 따르면, 이는 사실이 아닌 당시 극심했던 카스티야 귀족 중 두 파벌 간의 싸움이 만들어낸 정치적 선전이었다. 왕에 반대하는 귀족 무리들은 왕의 명예를 실추시켜 끌어내리려는 목적으로 갖은 추문을 만들어냈고, 태어난 후계자 또한 부정하게 만들어 대가 끊기게 했다. 

하지만, 이렇게 퍼진 이야기는 후대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여성들의 사랑을 받으며 널리 퍼진 베르두가도는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꼬리표처럼 붙은 ‘부정한 방법으로 임신한 배를 감추기 위해 생겨난 패션’이라는 핍박을 받으며 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했지만, 종국에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드레스의 원형이 된다. 그리고 개발자로 알려진 후아나는 바로 이사벨의 고모할머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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