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늦게 해본 생각
난 말의 무게를 잘 몰랐다. 한마디로 천 냥 빚을 지기도 갚기도 한다지만 머리로만 알 뿐. 마음으로 아는 건 아니었다.
쉽게 말을 내뱉었다. "뭐 어때. 저것도 별 거 아니고, 이것도 별 거 아닌데. 결국 다 아무것도 아닌 걸. 다 무의미하고, 나도 너도 세상도 다 쓸모 없어. 고통도 상처도 그냥 작은 티끌일 뿐이고. 내가 너에게 상처를 줬어? 그게 뭐? 멀리서 보면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아."
또 종종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들었다.
말도 안되는 그런 말들과, 무게감 없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 곁에 머무르면 더 그렇다. 처음 대학에 들어가서 남자 선배가 여자 선배 다리에 아무렇지 않게 앉고, 남자 선배가 아무렇지 않게 내 손을 잡고 나를 안고 또 종종 허락없이 몸에 손을 댈 때. 모두가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니까. 이상하게 생각하면 이상한 거구나 싶었다. 또 종종 누군가의 신체에 대해 함부로 말하고, 상대의 허락없이 성적인 발언을 하고, 어떤 강요를 아무렇지 않게 내밀 때 무게감 없이 상처를 남발하는 모습 앞에서 나는 종종 무기력했고, 종종 개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너 왜 그래? 너가 이상한 거야."
정말 그런가?
무엇이 정상이고 비정상인지 더는 알 수 없는 혼돈 속에서 사람이 무겁게 써야 하는 말들을 아주 가볍게 농담처럼, 어느 누군가의 고통을 아주 가볍게 유머처럼 가볍게 써버리면 마치 그 일들이 별것이 아닌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물론 그것은 유머의 장점이기도 하고 고통을 줄이기 위해 유머를 쓴다는 걸 나도 알지만 지금 하려는 말은 그런 게 아니다. 그래서 힘들다.
누군가가 실제로 어떤 깊은 고통을 겪고 그 고통을 작게 만들려고 가벼운 농담을 하는 것
그리고
실제로 가볍게 허공에 떠다니는 말일 뿐 사실은 상대의 고통에 대한 일말의 존중심 하나 없이 내뱉는 말을
종종 분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마음과 모두의 고통을 한마디 말에 담을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기 때문에, 또 상대가 그 말을 한 의중을 깊게 파고들지 않는 이상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종종 더 시간을 내서 말들 앞에서 생각해 보는 거다.
말. 그리고 무게. 말이 어떤 무게를 가질 수 있을까.
난 전쟁으로 가족을 잃거나, 힘겨운 일을 겪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상황을 겪은 이에 대한 존중감을 가지고 희망을 전하는 유머를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정말? 그 고통의 깊이를 모르는 내가 그에 대해 가벼운 말을 할 수 있나? 내가 그 고통을 아나?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 고통에 대해 존중감을 가지고 희망을 전하는 유머를 할 수 있지? 그런 시도 자체가 어느 부분은 경박함이 되어버리지는 않을까?
"나 알아 네가 겪은 고통. 그거 별 거 아니야. 그걸 이겨내지 못한다면 너에게 문제가 있는 거야."
"전쟁? 그게 뭐. 필요하면 전쟁도 하는 거야."
그 외의 수많은 이해가 결여 된 말 말 말. 겪어보지 못해 모른 채로 내뱉는 말 말 말. 어쩌면 그저 자신이 겪은 세상의 전부로 모든 걸 이해한다 착각하는 건 아닌가. 표면적으로만 이해한 작은 조건들만으로 모든 현상을 이해했다고 착각하는 건 아닐까.
누가 어떤 고통을 이겨내고 이겨내지 못하고는 분명 시간이 걸리는 일일텐데. 전쟁으로 실제 삶이 빼앗긴 사람이 어떻게 필요하면 전쟁도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가끔은 말을 내뱉고 실제로 경험하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큰 착각을 해왔던지. 어쩌면 지금 내가 모른 채로 누군가의 고통을 내가 겪은 고통의 틀로만 이해해버린 채로 사실은 전혀 티끌만큼도 이해하지 못하는 걸 이해한다고 착각해 버리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들을 하다가 하다가 어느 지점에 도달하자 답을 잃어버렸다. 완전히 같은 조건에서 완전히 다른 내용물을 발견하고, 완전히 같은 내용물인데 완전히 다른 조건을 지닌 상황들을 마주하고 길을 잃어버렸다. 모든 것이 너무도 주관적이라는 말이 어쩌면 맞는 것 같이 느껴져서.
답이 있다면 더 존중할 수 있을텐데. 더 조심할 수 있을텐데. 답이 없어서 더 괴롭다.
답은 없고 서로를 이해하는 길이란 멀고 험해서 답답해지면 질문한다. 과연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린 비록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기란 어렵겠지만 나는 깨달았다.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때, 실은 상대를 이해할 수 없다는 걸 깨달게 되고, 깨달고 나면 받아들임의 문제가 되고, 그것은 존중과 연관이 있다는 걸.
아무것도 모를 때는 몰랐다. 고통의 무게를 잘 몰랐다. 내가 겪은 고통이 전부이고, 나의 고통에 빠져서 왜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지 생각하며 분노하면서도 실제로는 나도 상대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했다. 모순적인 모습을 스스로 뉘우치지 못한 채로... 나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으면서 나에게 고통을 준 이들을 용서하기 힘들어서 용서하기 싫어서 미워하고 미워하고 또 울고 울고 분노하고 분노해 마음의 장작이 재가 되고 나서야. 시간이 지나 그 위로 바람이 불고, 다시 새살이 돋아나듯 미생물이 기어다니고, 또 그 자리에 자라난 어린 새싹이 자라나고 나서야 내가 얼마나 많은 순간 교만한 말을 내뱉고 교활한 생각을 하고 상대를 존중하지 못했는지 깨달았다.
그 지점에 도달하고 나서야. 수많은 고통을 되돌아보면서 어떤 작은 회복이 일어났다. 그 순간 존중이 피어났고, 교활함이 죽었다. 모든 사람에 대한 어떤 존중. 우리가 그런 존중의 태도를 지닐 수 있다면 우린 얼마나 더 상대를 진심으로 대할 수 있을까.
그 지점에 애써 도달하고자 용서를 강요하지도, 나를 아프게 하지도 않았다. 비교와 순위를 다투는 불안감 속에서의 억지 성장에 길들여진 한 인간에게 그저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일어난 용서와 회복 앞에서 좀 더 명확하게 진정한 강인함에 대한 이해도가 생겨났다. 어떤 정의롭고 의로운 것에 대한 이해. 어떤 불합리함 앞에서, 교만하고 가벼운 말 앞에서도 자연스럽게 지켜지는 강인함에 대해서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물론 용서와 회복 뒤로도 분노와 미움이 굴레처럼 반복되지만 이 작고 작은 내게 그런 자연스러운 성장의 시간을 삶의 굴레가 허락하길 바랄 뿐이다.
말의 무게도 그 지점에서 깊어지는 게 아닐까. 아무것도 없는 마른 장작더미 같던 마음이 불타 사라지고, 또 모든 게 사라진 줄 알았던 자리에서 생물이 자라나듯이, 풍요로움으로 강해진 어떤 무게가, 삶에 대한 어떤 깊은 이해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게 아닐까. 그 지점에서는 상대를 향한 무시도, 무지도, 교만한 마음도 사라지고 진정 깨끗한 마음으로 존중이 무엇인지 배우게 되는 것이라고.
고통, 용서, 사랑, 생명 그 모든 것이 굴레처렴 조금 겹쳐지며 성장을 이뤄내고, 거듭하는 오해 속에서도 아이가 점점 성장하듯 말도 자연스레 무게를 갖게 되었다. 자연스레 무게감을 가지게 되면서 누군가의 실수도 조금은 덜 미워하게 되었고, 쉽게 판단하고 헐뜯는 말이 아닌 조금 더 깊은 마음을 드러내는 말로써 입에 담으려 신경 쓰며, 나는 이제 마음 속에 그 깊이감을 기억하며 살고 싶어졌다.
그러니까 말. 그것은 꼭 허공에만 흩어지는 것이 아닌 어떤 깊은 무게를 드러낼 수 있는 아름다운 결정체가 아닐까.
오늘의 감사 23.08.21
강요하지 않고 나를 내버려 둔 채로도
조금 더 존중하며 사랑하면서도
삶이 내게 더 많은 것을 허락하고
더 깊고 큰 강인함을 비춰줌에 감사한다.
그안에서 나도 조금씩 새로운 것들을 배워나가고 이해하며 성장하는 중이다.
당신에게도 오늘이 평온함 안에 따스한 성장이 이뤄지는 하루가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