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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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시간이 멈췄을 때 나는 곧바로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원래 좀 무딘 편이라서 그저 평소보다 사람이 더 차분하게 느껴졌고, 평소보다 지하철이 더 늦게 오는 듯했다. 지하철을 기다린지 20분이 넘었는데도 오지 않아서 핸드폰과 전광판 화면을 여러 번 번갈아봤다. 뉴스에 “3호선”을 검색했지만 시위라던지 마라톤이라던지 하는 내용 같은 건 뜨지 않았다. 이어폰을 빼고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야 뭔가 이상하다는 걸 감지했다.
- 뭐지?
주위를 둘러봤지만 핸드폰을 보는 사람, 의자에 앉은 사람, 서서 기다리는 사람이 미동도 않은 채로 마네킹처럼 서있었다. 무슨 몰래카메라인가. 그런데 나같이 평범한 사람을 두고 이런 몰래카메라를 할 이유가 있는가 생각하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동생이었다.
- 여보세요.
- 언니. 언니? 언니! 언니지?
동생은 잔뜩 흥분해서는 당연한 말을 물었다. 나는 귓가에 울리는 동생 목소리와 함께 멈춘 사람들을 유심히 쳐다보며 스쳐 지나갔다. 소름이 돋았다.
- 그럼 나지. 누구겠어.
- 언니. 잘 들어. 시간이 멈췄어.
- 그니까. 이게 무슨 일이야? 대체 무슨 일이지?
사태파악이 되지 않았다. 사람들의 눈앞에 손을 흔들었다. 눈동자에는 그 어떤 미동도 없었다. 그러는 동안 동생은 주저리주저리 말을 이어나갔다.
- 아니. 내 생각엔 언니랑 나랑만 시간이 멈춘 거 같아. 내가 친구들이랑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고모 큰엄마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친척들 사람들한테 다 전화 돌려봤거든? 근데 지금 딱 언니만 받았어!
-...... 그럼 내가 제일 마지막으로 전화 건 사람이네? 이 새끼야.
- ㅎㅎ... 언니. 욕하지 마. 언니 집에 올 거지?
- 응. 근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네. 한 다섯 시간에서 여덟 시간? 걸릴지도 몰라.
- 그래 언니. 괜찮으니까 천천히 와. 그럼 난 그냥 내일 점심쯤에 만나는 걸로 생각하고 있을게.
- 그래. 곧 봐. 사랑해.
- 응. 나도
자전거를 탄 사람, 걸어가는 무리, 하늘의 새, 차 모두 움직임이 없었다. 모든 생명을 담은 빈껍데기만이 가득한 공간은 경적소리 하나 없이 고요했다. 잠시 눈을 감고 숨을 들이켰다. 미소가 흘러나왔다.
그 뒤로는 내가 무얼 했는지 굳이 모두 설명하고 싶지 않다. 인사불성이 되었다는 점. 편의점을 부수고 직상상사 바지에 오줌을 지린 것 같이 비타 500을 쏟아부었다는 점이 인사불성이 된 내가 한 짓 중에서 가장 비폭력적인 일이었다. 두 시간쯤 이어진 이 폭동에 대해서 더는 할 말이 없다. 핑크빛으로 물든 하늘이 아름다웠다. 귓가에 편안한 노래를 틀자 노을빛과 함께 마음이 조금씩 행복해졌다.
동생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걸어가는 건 어려우니까 자전거를 타는 게 좋을 듯싶다. 때마침 타이트한 옷을 입은 여자가 올라탄 자전거가 보였다. 예쁜 빨간색 자전거였다. 조심스레 쭈그리고 앉아 여자의 발을 자전거 페달에서 떼어냈다. 갑자기 어깨 위를 누군가 콕콕 찔렀다. 타이트한 옷을 입은 자전거 주인이었다.
- 어... 어...? 아.. 아 그게.. 어....
- 저기요!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나는 너무 놀란 탓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채로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 여자가 갑자기 말하기를 멈췄다. 눈동자도 나를 쏘아다 내려본 채로 멈췄다. 너무 놀라서 손이 떨렸다. 이어폰을 빼고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고요했다. 움직이는 사람이 없었다. 어떻게 이 여자는 움직이는 걸까. 여자 눈앞에 손을 흔들어보았다.
- 어? 저....
자전거주인은 동그랗게 눈을 뜬 채로 미동이 없었다. 조심스레 손가락으로 그 여자를 찌르자 여자의 입이 움직이며 음성이 짧게 끊어지며 울려 퍼졌다.
- 손 떼
손을 떼자 여자의 입모양이 "떼"에서 멈췄다. 다시 손을 대자 여자가 움직였다.
- 세
다시 손을 떼자 여자의 입모양이 "세"에서 멈췄다.
- 우와.
손가락으로 여자의 다리를 찔렀다 뗐다를 반복하자 여자의 음성이 스타카토로 울려 퍼졌다.
- 요!
- 지
- 금 뭐
- 하
- 시
- 는 거
- 예
- 요!
잠시 여자를 넋을 놓고 올려다보았다. 조심히 여자에게서 떨어져 몸에 먼지를 툭툭 털고 따릉이를 타고 집으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