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뭐지?"
찢긴 나무 틈새로 옅은 노을빛이 스며들었다. 나는 애써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 비릿한 냄새의 정체를 알아야 했다. 나무 틈새로 노을빛이 옅게 비추었다. 순간, 내가 잘못 보았나 했다. 노을의 붉은색 때문에 잘못 보았나 했다.
아니다.
잘못 본 게 아니다...
피.
피다.
붉디붉은 피가 나무 벽에서 흘러내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나는 나무 위로 손을 얹었다. 나무 벽이 가슬거리지 않았다. 사람 피부처럼 부드러웠다. 벽에 닿은 손바닥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지렁이 같이 뭉클한 게 손바닥에서 꿈틀거렸다. 불쾌한 감촉.
나는 재빨리 손을 떼어내었다. 손을 댔던 자리에서 길고 긴 물체가 자라 나무 벽 한편을 매웠다. 다 자란 모양이 마치... 뿌리 같다. 미어지는 비릿한 냄새 사이로 미묘한 꽃 향기가 진동했다. 그때, 나무 벽이 느리게 울렸다.
“너 말을 할 줄 알아?”
나무였다.
호두나무 이후로 말하는 나무는 처음이었다.
“그럼. 나무들은 모두 말을 하는 걸.”
나무는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그럴 리가.
그럼 대체 왜 이제껏 아무도
내게 대답하지 않은 거야?”
“설마 정말로 기억하지 못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무는 말했다.
"너에 대한 괴담 때문이야.
넌 이 숲에 떨어지면서 기억의 전부를 잃었는지 모르지만 너에 대한 괴담은 이 세계에서 아주 유명해."
"괴담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너로 인해 수많은 나무가 고통받고 있어.
너로 인해서 자라난 가시가
나무의 뿌리를 감고 자라
이 숲에 번져나가고 있어.
그 가시는 뿌리를 통해서
우리 가슴에 가득했던
사랑과 영혼을 빨아먹으며 자라나지.
그 때문에 이 숲에는 피를 흘리는 나무가 많아.
네가 깨어난 모습을 보고 처음엔...
거짓말인 줄 알았어.
믿을 수가 없었어.
네가 말을 걸었을 때 우리는 두려웠어.
네가 두려워서 쉽게 대답하지 못했던 거야."
"하지만...
그 가시와 내가 대체 무슨 연관이 있길래 그래?"
"들리는 말로는 네가 바로…”
그때 어디선가 바람이 불었다.
쉬-잇
쉬-잇
쉬-잇
나무는 무언가를 말하려다 말고 되려 물었다.
"대체 꽃은 어떻게 피운 거지?
네가 나를 만지자 내 몸에서 꽃이 자랐어."
나는 나무 틈새를 내다보았다. 꽃들이 나무 위로 무성했다. 달빛을 받아 환하게 빛나는 하얀 꽃이었다.
"나도 잘 모르겠어. 벽을 만지는데 뿌리가 자랐어."
“혹시 내게 조금만 더 꽃을 피워주지 않을래?”
나무가 물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벽 위로 손을 얹었다.
"또 가능할지는 모르겠어.
일단 한번 해볼게."
나무 벽의 찐덕이는 핏물 사이에서 또다시 뿌리가 자랐다. 틈 밖을 내다보자 달빛을 받아 환하게 빛나는 하얀 꽃들이 뭉게뭉게 피어났다. 뿌리도 계속해서 핏물을 빨아먹으며 나무 벽 위로 수북하게 자랐다.
“나에게도 꽃을 피워줄 수 있을까?”
“나도.”
“나도.”
나무들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답이 없던 나무들이 어디선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나는 통로로 내려갔다. 뿌리는 어두워서 더는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통로 어디에선가 나무가 불렀다.
"프스. 여기! 이쪽이야."
나는 차례로 나무에 갔다. 나무들은 모두 피를 흘리고 있었다. 똑같이 벽에 손을 올렸고, 얼마 가지 않아 핏물을 빨아먹는 뿌리가 자랐다.
"너희는 왜 이렇게 피를 흘리는 거야?
"너의 가시 때문이지."
"혹시 나에 대한 괴담을 말하는 거야?"
나무들은 입을 모아 대답했다.
"그래. 맞아."
"대체 내 괴담이 뭐길래 그래?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그건..."
바람이 불었다. 나무는 바람 소리를 듣고 뜸을 들였다. 그제야 나는 이 소리가 바람소리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나무들은 목소리를 낮게 낮추었다.
“어쩌면, 넌
이 숲에 꽃을 피우기 위해
다시 깨어난 걸 거야.
만약 네가 꽃을 피워준다면
나무들도 널 믿고
너를 숲의 일원으로
받아 주겠지.
너의 죄도 용서받게 되는 거야.
그러면 너도 이 숲에서
우리와 함께 행복하게 지낼 수 있어.”
다행히도 그날 밤. 나무들은 내게 머물 공간을 마련해주었다. 나무들은 나와 괴담에 대한 이야기는 해주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질문에는 대답을 해주었다. 이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이 세계의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알려주었다.
꿈속의 세계에서는 모든 이의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고 했다. 누군가에게는 눈 깜박할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한평생이 되기도 했다. 나무들의 말로는 다른 이들의 시간은 모두 제각각이지만 오직 나무들만은 같은 시간을 공유한다고 했다. 뿌리로 얽혀 서로의 삶과 행복을 나눈다고 했다.
나는 밤새 나무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밤새 함께 시간을 보내니 신기하게도 온 몸을 깊숙하게 진동하던 슬픔도 외로움도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행복했다. 고요하고 어두운 나무 속도 더는 두렵지 않았다.
나는 꽃을 피울 수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상상이었지만 끔찍했다.
'나무들은 계속 내가 무서워 말을 걸지 않았을 테지.
밤새 이 어둠을 홀로 떠돌아다녔을 테지.
그러면 마치...
버려진 기분이었을 거야.'
나는 나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좋았다. 가슴이 행복으로 벅차올랐다.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이 기분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숲의 모든 나무들에게 꽃을 피워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다만 이 행복이 사라지진 않을까 두려웠다.
<사랑하는 그대에게>
- 제1 장, 끝 -
내가 나를 잘 모를 때
상대가 나에 대해 잘 안다고 이야기할 때
나를 잘 안다는 그 사람의 말과
나를 잘 모르는 나의 생각 중에서
우리는 무얼 믿어야 하죠?
과연 이 숲에서 어떤 일이 엘림을 기다리고 있을까요?
어른이의 그림동화 <사랑하는 그대에게>
다음 시간에 다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