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의 그림동화 2편

제1막 - 사랑하는 그대에게 (2)

by 모다


어둠에 눈이 익자 차츰차츰 주변이 보였다.

나는 나를 에두른 나무 벽을 둘러보았다.

벽이 온통 나무껍질로 뒤덮인 원통 모양의 방이었다. 창도 문도 없었다.

몸을 일으켜 벽을 만지자 이상하리만치 가슴이 아프다.

내가 움직이자 갑자기 벽이 덜덜 떨렸다.


“드디어 일어났어.”

누군가 말했다.


그 여자 목소리가 아니었다.

아련하고 슬픈 목소리.

어디서 들어본 듯 익숙하면서도 낯선 목소리.

누구지.

그런데 왜일까.

며칠이고 말을 하지 않았던 것처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상하다. 목구멍이 완전히 말라붙어 목이 텁텁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는 계속해서 방을 가르며 울려 퍼졌다.


“줄곧 그대를 기다려왔다.

씨앗이 자라 나무가 될 때까지,

여러 계절이 지나고 지나

어느 계절도 의미를 잃어버릴 때까지

줄곧 그대를 기다려왔다.”

나는 마른침을 겨우 겨우 삼켜가며 목소리를 쥐여 짜냈다. 목에서 쇳소리가 섞여 나왔다.

“누구세요?”


“나는 호두나무.

그대의 호두나무다.”


나의... 호두나무? 그럼 당신이 나무라는 거예요?”

“그렇다. 나는 그대가 깨어나 기쁘다. 나는 정말 기쁘다.”

“하지만…”


생각이 정리가 되질 않았다.

“그럼 지금 내가 나무속이라는 건가요?”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는 멈칫하며 말을 멈추었다.


“… 엘림. 혹시 기억이 나지 않는가?”

엘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것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우리는 이 꿈에 나고 자랐다. 이곳 꿈의 세계에서 자란 뒤 나는 너를 보았다. 너는 내가 이 땅에 자라기도 전에 이 자리에 잠들어 있었다. 네가 왜 잠들었는지는 모른다. 네가 깨어나면 물어볼 생각이었다. 나는 이 숲의 비바람이 널 적시고 아프게 하지 못하도록 너를 덮고 자랐다. 너를 덮고 자라며 난 네가 엘림이라는 걸 알았다. 너를 덮고 자라며 너와 마음으로 소통했다. 나는 알았다. 너는 잠들었지만 언제나 나를 꿈꿔왔다는 걸."


“잠들어요? 아닌데... 나는 아까 어떤 여자가 날 밀어서 당신 속으로 들어온 거예요.”

“여자? 난 아주 오랫동안 이 숲에 살았지만 그 어떤 여자도 본 적이 없다.”



등골이 오싹했다.


"말해요. 아까 그 여자는 어디로 갔죠?"

“거짓말이 아니야. 이 숲은 깊고 깊은 꿈속의 숲. 나고 자란 이들도 이 숲만은 잘 찾지 못하지. 혹시 너는 꿈을 꾸었는지도 모른다. 넌 너무 오래 자느라 꿈을 꾸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뒷걸음질 쳤다. 등에 나무 벽이 닿았다. 나는 재빨리 벽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이봐요. 당신 거기 없어요?”


“이봐요!"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발 밑에서 지렁이 떼 수 천마리가 지나가는 싸한 기분이 느껴갔다. 무언가 꿈틀거리는 징그러운 감촉에 놀라 자리를 옮겨 자세히 들여다보니 지렁이가 아니었다. 나무 바닥이 넓게 벌어지고 있었다. 호두나무도 얼떨떨한지 중얼거렸다.

“이게 뭐지?”


스멀거리며 생겨난 구멍 아래로 작은 길이 나타났다. 나는 통로로 내려가 보았다. 통로는 또 다른 통로로 이어졌다. 비릿한 냄새. 쾌쾌한 냄새. 철이 부식되는 듯한 냄새가 났다. 통로를 지날수록 냄새는 점점 짙어졌다.

나는 벽을 두드려보았다. 그러자 위쪽 어디에선가 스멀거리며 구멍이 생겼다.

구멍을 위로 또 다른 원통형 나무 방이 나타났다. 방금 전과 다른 점이라면 나무껍질로 도배된 벽에 누군가 도끼로 내려찍은 듯 드문드문 벽 사이가 찢겨져 있었다. 나는 갈라진 틈새를 내다보았다.


울창한 숲이 보였다.

그럼 내가 지나온 통로가 나무뿌리라는 걸까.

나는 반대편 틈새를 내다보았다.

꽃밭이 보였다.

그 여자를 만났던 노란 꽃밭이다.

그런데 왜지.

그 여자를 만났던 일이 꿈처럼 멀게 느껴졌다.

그에 비해 이 순간이 지나치리만큼 생생했다.

왜지. 정말 이상해. 하나도 말이 되질 않잖아.

정말 꿈이었을까?

내가 꿈을 꾸었던 걸까?



그런데...

잠깐.

생각해보니 이상하다.

이제까지 한 번이라도 말하는 나무를 본 적이 있던가? 혹시 다른 나무도 말을 할 수 있는 걸까.


“계세요?”


빈집에 사람 찾듯 목소리만 공허하게 나무를 울렸다. 날은 저물어갔고, 짙은 어둠이 서서히 손아귀를 팽창시키며 뻗쳐왔다. 이 나무 저 나무를 돌아다녔지만 결과는 같았다. 대답이 없었다.


나무들은 말을 하지 못한다.

오직 호두나무만 말을 할 줄 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다시 호두나무로 되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두워진 하늘 탓에 뿌리 속이 어두웠다. 나는 뿌리 어딘가를 헤매고 헤매다 일단 위로 올라가 어디쯤인지 살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벽을 두드리자 스멀거리는 소리와 함께 위로 향하는 구멍이 열렸다.



뭔가가 어깨로 뚝하고 떨어졌다.

쾌쾌한 냄새. 비릿한 냄새.


무서웠지만 그런 걸 따질 만큼 시간이 많지 않았다. 우선 올라가 지금 여기가 어디인지 봐야 해가 완전히 지기 전까지 호두나무로 돌아갈 수 있었다. 마음에 여유가 없어 일단 밖을 살펴보려 위로 올라가자 불쾌한 냄새가 콧속을 후볐다. 정신이 아득했다. 중심을 잃고 벽에 손을 짚자 손바닥이 끈-적했다.


나는 잘못 보았나 했다.

노을빛 때문에 잘못 보았나 했다.



아니. 엘림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어른이의 그림동화

<사랑하는 그대에게>


다음 시간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