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은 그저 거들뿐. 그저 오늘을 산다.
가끔 회사 사람들에게, 혹은 종종 만나는 지인들에게 이런 얘기를 듣곤 한다.
- 일에 목숨 거는 사람.
- 일 욕심 많은 사람.
- 일에 중독된 사람.
- 당연히 오늘도 일하고 있는 사람.
'일에 목숨을 걸다니? 내가?'라고 되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항상 일은 열심히 했으니까. 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일에 목숨을 걸고자 한 적이 없었다. 나는 태생이 게으르고 느린 사람이다. 3n살이지만 아직도 집에 어른 계시냐고 물으면 집에 어른 없다고 말한다는 누군가처럼, 나도 그렇다. 나이만 충분히 먹었을 뿐, 아직 게으르고 느리기 짝이 없는 어느 집의 막내딸, 거기에 머무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물론 내 또래 누군가는 벌써 오래전부터 집도 사고, 차도 샀다지만, 이미 결혼도 하고, 한 아이의 엄마, 혹은 아빠로 어엿한 어른이 되었다지만 글쎄, 나는 별로 공감이 가지 않는 딴 세상 사람들 이야기 같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지금 무책임하게 살고 있다는 건 아니다. 나는 충분히 내 몫의 돈을 벌고 있고, 일을 할 땐 내 몫의 일을 열심히 하고자 한다. 남들보다 회사가 머니까 빨리 일어나고, 남들보다 일할 때 몇 번이나 보고 또 보고, 한 번 더 미련 떨며 생각하는 습관이 있으므로 자연히 늦게 퇴근한다. 최소한 남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된다는 생각, 일은 스스로 해내야 한다는 생각, 나에게 온 일은 내가 책임을 져야 마땅하다는 생각. 그런 생각들이 타인들에게 일에 목숨을 거는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면 매우 유감이다. 일은 그저 거들뿐, 나는 그저 오늘을 사는 것에 불과하니까.
나는 참 많은 일들을 해왔다. 자영업을 하는 엄마를 따라 이런저런 일들을 도와야 했던 탓도 있었지만,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한 대가로 여러 직장을 전전긍긍하며 부유해야 했던 탓이 크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 헤매는 데에 20대를 바쳤다. 나름 진지하게 서비스 업무도 해봤고, 일반 사무 업무도 여럿 해봤다. 하고 싶던 일을 포기했으니 어쩔 수 없던 걸지도 모르지만 너무 쉽게 무기력이 찾아왔고, 너무 쉽게 항복을 외치며 흰 수건을 던지곤 했다. 그 덕에 내 이력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자기소개서에는 입바른 내용이 가득해도, 진득하게 뭐 하나 제대로 못할 것 같은 지원자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누구에게나 하고 싶은 일, 잘하는 일, 해야 하는 일이 있다는데 하고 싶은 일이 잘하는 일인 동시에 해야 하는 일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면서 대상도 없이 원망만 늘었다. 그래서 괜히 삐죽거리는 마음에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 명대사를 변형해서 외치곤 했다. '대한민국 회사들 x까라 그래!'
그렇게 일을 다니다 그만두고, 다니다 그만두길 몇 번쯤 하다 보니 이쯤 되면 나는 잘하는 게 없는, 적성이 없는 사람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나름 자존심도 무척 센 편이었는데, 그걸 인정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현실은 냉혹했고, 그 앞에 나는 그저 나약한 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민첩하게 순응할 수 있던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 하나 제대로 잘하는 게 없는 나 같은 사람은 대체 무슨 일을 해야 하는 걸까? 수 없이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진구에게는 도라에몽이 있었고, 무수히 많은 연예인들에게는 오디션 같이 가자고 조르는 친구들이라도 있어 우연히 캐스팅되기라도 하지만 나는 나를 위해 뭐든 꺼내 주는 도라에몽도 없고, 우연한 기회를 얻기도 너무 어렵지 않은가? 친구 면접 따라간다고 면접관이 '자네도 이력서를 내보게' 하진 않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말도 안 되는 투덜거림만 늘던 어느 날, 내가 믿는 신도 내가 딱하고 가여웠는지 정말이지 너무나 우연한 기회에 내게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주셨다. 용돈이라도 벌면서 이직 준비를 할 생각에 집 근처 아무 파트타임이나 찾아서 시작했는데, 그 뒤로 7년째 계속 그 업계에 종사하게 되었다. 바로 온라인 마케팅이다. 우연히 시작한 일이었지만 꽤나 적성에 맞았다. 여러 일을 경험해본 것도 도움이 많이 됐다. 정확히는 이전 회사에서 주로 했던 엑셀이나 PPT, 포토샵 기능 따위들이나 SNS 채널 관리법 등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아니다, 사실 그런 것쯤 모르고 시작해도 무관했을 터였다. 실무는 하면서 배우는 게 최고니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주 가끔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일은 처음이었다는 것이다. 점심만 먹고 나면 졸려서 허벅지 찌르기를 시전 했던 날들을 비로소 청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작은 회사였지만 젊은 대표와 또래 동료들을 만나 웃고 떠들며 일을 했던 것들도 좋았다. 내가 열심히 하는 만큼 살림살이도 늘고, 직원 수도 늘었던 것이 보람 차기도 했다. 그러다 많은 일들을 겪었고, 지금의 회사로 오기까지 순탄하지만도 않았다. 그래도 이 일이 내 천직이다, 하면서 하고 있을 뿐이다.
'천직'이라는 엄청난 단어를 사용한 데다 이야기 흐름상 어떠한 대단한 성과를 이루고 성공해야 할 것 같지만 아까도 말했듯 현실은 냉혹한 것이다. 쥐꼬리 월급은 그대로, 성과급이나 수당도 없이 야근만 밥 먹듯이 하고 있다. 그래도 이 일의 소중함을 알고, 업무적 특성이나 내 특성을 잘 알기에 참고 버텨온 것이다. 나는 다행히 주제 파악은 잘하는 편이고, 눈치도 꽤 있어서 우리 집 상황을 잘 아는데 내가 나를 먹여 살리지 않으면 꼼짝없이 굶어 죽는 시스템이라는 것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여태 그런 사람도 없었지만 만에 하나라도 결혼해서 전업주부로 살면서 자기 내조하고, 아이들 잘 키워달래는 사람이 나타난다 해도 정말 안 될 말이다.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주제 파악 하나는 잘하고 있어서 내가 결혼에 필요한 3가지-위대한 인내심과 이해심, 배려심-가 없는 3무(無) 인간이라는 걸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다. 즉, 내가 결혼을 해서 전업 주부로 산다는 것은 배우자도, 아이들도 모두 불행에 빠뜨리고 가정을 파탄낼 주범이 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내가 할 줄 아는 일, 그나마 잘하는 일을 가능한 열심히 하면서 커리어를 쌓고, 오롯이 나를 잘 먹여 살려야 하는 것이다.
정말이지 일은 그저 거들뿐, 목숨 걸고 싶은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그저 참는 자에게 복이 있다더니 참고 버티다 보니 진급해 '병아리 팀장'이 되었을 뿐이다. 나는 주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무기력하고, 나약하고, 게이르고, 답답한 사람이다. 퍽 자연스럽게 일반인 코스프레를 하며 살아야만 하는 3n살의 인간으로서 스스로를 잘 먹여 살리는 것이 중대한 미션이다. 사는 동안에는 살아야 할 것이고, 살아가는 동안에는 제 몫을 해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오늘도 산다. 성공하고 싶은 욕심도 없다. 1등이 되고 싶었던 적도 없다. 그런 경쟁이 싫어서 이기고 지는 게임은 하지도 않는다. 그저 치트키 써서 돈을 무한대로 늘려놓고 3층짜리 집만 짓고 부수고, 짓고 부수고 할 수 있는 심즈나 같은 모양 3개 맞추면 팡 터지는 시간 제한 없는 퍼즐 게임 정도만 간혹 할 뿐 경쟁은 피곤하고 진 빠지는 일이 아닌가. 그런 쫄깃한 스릴은 그만 견뎌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저 할 수 있는 일과 주어진 일들을 하고, 사는 동안은 그저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다. 나는 나의 무기력함을 존중한다. 나의 이런 나약함을 동정한다. 나의 게으름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고, 나의 답답함은 견딜 만한 가치가 있다. 치열하게 스스로를 찾아 헤맨 20대를 보내고, 겨우 30대가 되었다. 일은 열심히 하더라도, 목숨을 걸진 않을 것이다. 살아갈 날들이 아직 더 많이 남을 테니까. 그저 오늘도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