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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칸디나비아 여행 - Intro

2017년 여름

by 모다니

Intro


‘나도 북유럽 한번 가봐야지!’라고 생각한 건 2년쯤 전부터다. 90년대 유학시절, 비행기에서 KAL매거진을 뒤적이다 북유럽 여행기사를 보았다. 코펜하겐의 알록달록한 니하운(Nyhavn) 거리와 방금 사냥한 듯한 거대한 고깃덩어리 바비큐 사진. 별 감흥은 없었다. 외려 ‘이런 데를 왜 가지?’ 싶었다. 유난히 추위를 타는 나는 온통 겨울겨울해 보이는 그곳이 고생길로 보였다. 관광객을 유혹하기 위한 회심의 비주얼이 겨우 순도 100% 바이킹 시대 바비큐 덩어리라니… 물가는 엄청 비싸다는데, 프랑스나 이태리처럼 지름신을 부르는 화려한 패션템들이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지루해만 보이던 북유럽의 위상이 달라졌다. 기교 가득한 요리가 아닌 순도 100% 바이킹 시대 바비큐가 매력적인 트렌드가 된 것이다. 미디어에서도 북유럽 찬양 일색. 디자인, 인테리어, 유기농 음식, 건축, 대자연, 휘게, 그리고 트렌디 레스토랑들까지… 주위에 북유럽 휴가를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나도 그들을 선망의 눈빛으로 보기 시작했다.


막연한 동경이 구체화된 건 Noma​ [1]를 접하고 나서였다. 당시 세계 최고의 레스토랑이라는 극찬과 함께 여러 잡지에서 본 Noma는 ‘비주얼 쇼크’였다. 세계 최고라면 화려한 골드 인테리어나 샹들리에 등 전형적인 틀이 있었는데 Noma는 달랐다. 최소한 내가 아는 뉴욕, 홍콩, 동경 등의 톱 레스토랑과는 달랐다. 디럭스 레스토랑답지 않은 일상성이 느껴졌다. 투박하지만 세련된, 미니멀하지만 깊이가 느껴지는 원목 인테리어의 모던함, 그리고 프랑스 요리 같은 기교는 없지만 ‘이것이 스칸디나비안 디자인이다!’라고 외치는 듯한 푸드 비주얼과 플레이팅… 파인 다이닝을 선호하진 않지만 이런 곳이라면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가보진 못했다. 10년도 안 되었지만 세계적 북유럽 광풍 후 Noma의 인테리어나 플레이팅은 어느덧 평범하게 느껴진다.)


[1] 덴마크 코펜하겐에 위치한 미쉐린 2 스타 레스토랑으로 셰프 René Redzepi가 운영하고 있다. ‘노르딕 푸드’라는 뜻의 Nordisk Mad에서 각각 첫 두 글자를 따서 Noma라고 지었다고 한다. 2003년 오픈 후 2010년, 2011년, 2012년 그리고 2014년 Restaurant 매거진이 세계 최고의 레스토랑으로 선정한 바 있다.


북유럽이 ‘머나먼 바이킹의 나라들’이 아닌 트렌드의 선두가 되면서 스산해 보이던 북유럽 풍경조차 ‘힐링’과 ‘휘게’의 오아시스 같아 보였다. 추위에 약한 나는 여름을 공략해야 했지만 북유럽의 여름은 짧아도 너무 짧았다. 7,8월이 그나마 여름 축에 드는데 춥지 않다는 것이지 덥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코펜하겐, 스톡홀름 모두 여름 평균 온도는 12도에서 21도. 갈 수 있는 기간이 워낙 짧다 보니 2년을 기다려야 했다. 2017년 여름, 올여름조차 못 가면 ‘네버’란 생각이 들어 나는 여행책을 사고 항공편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첫 여행기록을 쓰면서 문득 궁금해져 그동안 가본 나라와 도시들을 세어보았다. 정확하지 않지만 대략 5 대륙 40여 개국 150여 개 도시. 와웃! 막상 세어보고 나도 놀랐다. 나는 20년 이상을 해외에서 살았고 국내 정착 후에도 해외출장이 잦은 편이긴 했지만 무엇보다 여행을 좋아한다. 많은 여행을 다녔지만 단체나 투어 경험은 몇 번 없다. 자유여행을 다닌다고 하여 여행 전 공부나 조사를 철저히 하는 편은 아니다. 인터넷 없이 자란 세대라 사전조사에 익숙하지 않은 게 당연하다고 믿었고 여행정보는 대부분 현지에서 해결했다. 그런데 1980년대 세계를 누비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행 에세이들을 읽으면서 나의 게으름을 자각하게 되었다. 하루키는 그 시절에도 철저한 사전조사(어떻게는 잘 모르겠다. 도서관?) 를 통해 가보지도 않은 곳을 가이드할 수 있는 수준의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재미있게 본 TV시리즈 <알쓸신잡>만 봐도 유시민 등 이미 아는 것 많은 박사님들이 준비까지 해와서 여행은 아는 것만큼 보인다를 입증해 주는 것을 보고 반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의 여행기는 그런 철두철미한 여행기가 아니다. 끌리는 대로 체험하고 궁금하면 사후에 찾아보는 게 나의 여행법에 가깝다.


2002년 여름, 이집트 여행을 갔었다. 이집트는 특이하게 비행기 게이트 앞까지 가이드가 마중을 나올 수 있고, 입국심사대까지 에스코트를 했다. 공항에 아랍어가 많이 보여 나는 가이드에게 물었다.

“여기저기 있는 글자가 아랍어 맞지요? 왜 이리 많이 쓰이죠?”

가이드는 살짝 당황하는 듯했다.

“흠… 그럼 무슨 언어를 기대했는데요?”

나는 해맑게 대답했다.

“이집트어죠. 아랍어가 많이 보이는 게 신기하네요. 공항이라 그런가요?”

“이집트에서 이집트어를 사용 안 한 건 500년이 넘었어요. 너무 늦게 오셨네요.”

이집트라면 피라미드, 스핑크스 등 고대문화에만 관심 있던 나는 이집트의 공식 국가명이 ‘Arab Republic of Egypt’라는 사실도 몰랐던 것이다.


앙코르와트를 보러 캄보디아를 갔을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앙코르와트의 엄청난 비주얼에만 꽂혀있던 나는 현재 캄보디아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유적지 이동마다 혹은 식당 등에서 ‘높으신 분’으로 추정되는 노신사의 사진이 계속 눈에 띄었다. 설마 대통령?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캄보디아 국왕이라고 했다.

‘캄보디아가 군주제였다니…’

캄보디아의 정식 국명은 ‘Kingdom of Cambodia’다.


이랬던 내가 처음으로 선행학습을 위해 책을 구입한 것이 북유럽이다. 워낙 2년을 벌렸기 때문이기도 하고, 소위 유명 유적지가 뚜렷하지 않아 사전조사 없이는 놓치는 것이 많을 것 같았다. 아니면 혼자 갈 운명이라는 걸 직감하였는지도. 여행 계획을 세울 땐 보통 숙소 먼저 알아보는데 북유럽은 비행 편부터 알아보았다. 막연히 북유럽을 가고 싶었지만 통상 북유럽이라 지칭되는 어느 곳부터 가야 할지도 몰랐다. 마음속으로는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정도로 생각했는데 찾아보니 아이슬란드, 핀란드 그리고 에스토니아도 있었다. 6개국을 한 번에 가는 건 무리 같아 3개국을 타깃으로 잡았다. 나는 장기간 여행을 선호하지 않아 최장 여행기간을 2 주남 짓으로 잡는다. 그 이상 집을 떠나면 짐도 만만찮고 고생가득이다. 사전조사를 하다 보니 노르웨이보단 핀란드가 끌렸다. 핀란드는 북유럽 디자인 메카로 급부상중이었다. 핀란드라면 에스토니아 같은 구소련 국가 이미지였는데... 진짜? 못 미더워하던 나는 유명 일본 영화 <카모메식당> [2]을 보고서야 완전히 설득되었다. 더욱이 서울-북유럽 직항은 3개국 중 놀랍게도 핀란드밖에 없었다. 덴마크, 스웨덴 직항이 없다니! 칼스버그, 이케아 직원들 참 힘들겠구나 싶었다.


[2] 여성 감독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2006년작 코미디/드라마영화로 한국에서도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무레 유코’의 소설이 원작. 핀란드 헬싱키에 일본 여성이 일본 가정 식당을 열면서 벌어지는 일본적인 잔잔한 영화인데 미술과 연출이 워낙 섬세하여 판타지처럼 다가온다.


성수기 비행기 가격은 만만치 않았다. 나의 출발일은 성수기가 시작되는 7월 중순 직전인 7월 12일. 덴마크를 시작으로 스톡홀름을 거쳐 헬싱키에서 직항으로 돌아오는 것이 좋아 보였다. 각 도시에서 5일 정도씩 보내고 약 2주 후 귀국하는 일정. 나름 힐링여행이라 여유롭게 잡는다고 잡았는데 막상 현지에 가보니 매우 타이트하고 ‘빡센’ 일정이었다. 각 도시에서 5일은 너무 짧다. 코펜하겐에서 스톡홀름까지 기차를 타려니 5시간이 넘게 걸리고 가격도 비행편의 2배가 넘어 비행기로 예약했다. 스톡홀름에서 헬싱키까지는 오버나이트 크루즈가 있어서 배편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일정이 정해졌으니 같이 갈 파트너를 구해야 했다. 싱글이라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떠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여행 갈 때마다 파트너를 구해야 하는 애로사항도 있다. 여행이 익숙하지만 ‘혼자 하는 여행’은 선호하지 않았다. (이 여행 이후 생각이 바뀌었다.) 외로움이나 안전문제보다는 평생 1번뿐일 수 있는 여행지의 100%를 즐기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유럽이라면 저녁에 근사한 식당에서 수다를 떨며 천천히 다양한 음식도 먹고 싶고, 아름다운 풍경에서 사진을 찍어줄 사람도 필요하다. 또 낯선 곳에서 여자 혼자 나이트라이프를 즐기긴 무섭기 때문에 ‘혼자 가는 여행’은 비용은 더 드는 반면 제한적인 경험만 한다고 생각했다. 3명의 친구들을 컨택했지만 거절당했다. 역시나 북유럽 2주 여행은 선뜻 가기 힘든 여행이다. 결국 내 주변에서 가장 한가한 친남동생과 가기로 하고 예약을 마무리 지었다. 그.런.데! 여행 2주 전. 남동생의 발목이 부러졌다. 솔로 여행을 꺼리는 ‘나’이지만, 이번에 못 가면 다시 1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에 혼자라도 가겠다는 큰 결심을 했다.

코펜하겐은 혼자 가고 동생은 스톡홀름에서 합류할 예정이었다. 성인 남동생과 한방에서 지내는 게 어색할 것 같아 헬싱키에서는 에어비앤비로 침실 2개가 있는 집을 빌렸는데 혼자 가게 되면서 큰 집보다는 호텔이 편할 것 같았다. 에어비앤비의 다양하고 아름다운 집들(특히 북유럽 인테리어로 무장한)은 엄청난 호기심을 자아내긴 하지만 아토피 때문에 청결에 민감한 나는 위생에 대한 기대가 확실한 곳, 즉 깨끗하지 않다면 컴플레인할 수 있는 곳이 편하다. 에어비앤비 호스트에게 장황하게 이유를 설명하고 ‘캔슬’했는데 호스트가 씹었다. 호텔이라면 형식적인 답장이라도 왔을 텐데. 난 에어비앤비랑은 인연이 없는 것 같다. 이미 예약한 항공편, 숙소 등을 취소하고 다시 계획을 짜야했다. 마리메코(Marimekko) [3] 어메니티를 준다는 핀에어를 캔슬하고 혼자 가는 위로 차원에서 루트프한자 비즈니스 클래스를 예약했다. (핀에어 비즈니스 클래스는 직항이라 너무 비쌌다.)


[3] 1951년 설립된 세계적인 핀란드 패션 브랜드. 독특하고 선명한 디자인의 홈퍼니싱, 텍스타일, 의류를 판매하며 재키 오나시스 등의 유명인사들이 착용했고 <Sex and the City>에도 등장하여 유명하다.


드디어 출발일! 루프트한자는 처음이었는데 출발부터 불쾌한 일이 생겼다. 온라인으로 미리 아시아나 마일리지를 적립하려 했지만 계속 에러가 났다. 공항 체크인 카운터에서 마일리지 적립을 부탁하였으나 공항에서는 불가능하다며 웹사이트에서 하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했다. 웹사이트에서 안된다고 재차 말해도 루프트한자 직원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웹사이트로 가라는 말뿐이었다. 화가 났지만 여행 시작부터 쓸데없는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 않아 참았다. 보딩패스까지 받고 체크인이 끝날 무렵, 갑자기 부치려는 짐 안에 전자담배가 들어있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가방 비밀번호가 생각나지 않는 것이다! 오랜 기간 쓴 적이 없는 가방을 가져왔더니 이런 일이… ‘0000’ 일 거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내가 슈트케이스와 씨름을 하자 루프트한자 직원은 ‘귀찮다는 듯’ 그냥 짐을 부치라고 했다. 황당했다. 규정상 안 된다면서? 어차피 엑스레이에서 걸릴 텐데 그냥 부치라는 게 무슨 말인가? 내가 무시하자 다른 매니저까지 나서서 짐을 부치라고 종용했다. 기다리고 있는 손님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전자담배는 부치면 안 된다고 하시고 그냥 부치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네요. 지금 안 열리면 여행 가서도 안 열릴 텐데, 그럼 제가 어차피 못 가거든요. 이런 경우가 전에도 있었을 텐데 도와주실 방법이 없나요?”

그들은 성의 없고 관심 없는 말투로 방법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공항에 가방 수리하는 곳은 없나요?”

“그런 건 모르겠습니다만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좀 알아봐 주실 수 없나요?”

그들은 서로 바라만 볼뿐 어떠한 도움도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비즈니스 클래스인데… 너무 화가 나서 짐을 들고 돌아섰다.

‘저들이 생각이 없으면 내가 스스로 도울 수밖에…’

“손님~ 잠시만요!”갑자기 다급하게 부르길래 도와주려는 줄 알았다. 착각이었다. 지금 짐을 부칠 게 아니면 보딩패스를 반환하란다. 다시 한번 루프트한자 직원의 배려심에 놀랬다.


보딩패스를 뺏기고 씩씩거리며 코너를 돌자 공항 인포메이션 데스크가 있었다. 가방 수리할 곳을 찾고 있다 하니 1층에 있다고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너무 쉽게 말해줘서 루프트한자 직원들이 더 원망스러웠다. 짐을 끌고 1층으로 향하는데 갑자기 번개라도 맞은 듯 비밀번호가 생각이 났다. 시도해 보니 바로 열리는 게 아닌가? 허무하기도 했지만 가방을 고치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에 서둘러 체크인 카운터로 돌아갔다.

“1층에 가방 수리하는 곳이 있답니다. 앞으로 이런 경우가 생기면 안내해 주시지요.”

보딩패스를 돌려받고 짐을 부치면서 나는 루프트한자 직원에게 최대한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그녀는 눈도 마주치지 않았고 알겠다는 대답도 없었다. 이 일은 꼭 고객센터에 항의해야겠다 생각하며 비행기에 올랐다. 그런데… 지상과 달리 독일 승무원들은 너무나 친절한 것이 아닌가? 방긋방긋 웃으며 무릎까지 꿇고 식사 주문을 받는데 감동해서 나는 물고기마냥 인천공항에서의 불쾌함은 잊어버렸다. 마리메코를 놓친 나를 위로하듯 어메니티 백은 질샌더였다. 인조가죽이긴 했지만 꽤 유용해 보여 심지어 루프트한자 타길 잘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Jil Sander 어메니티 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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