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양 떨다의 아양은 모자에서 온 것이다.
우리 모자의 종류는 4000가지나 되었다
우리는 모자 하면 서양에서 건너왔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모자를 아주 사랑한 엘리자베스 2세부터 야구, 골프, 테니스 등 외출 시에는 주로 서양의 스포츠 캡을 많이 쓰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모자의 원조는 우리라고 말할 정도로 우리 문화는 다양했다. 그것도 서양인이 충격을 받을 정도로 말이다. 1892년 한국을 방문했던 프랑스인 샤를르 바라는 남녀노소, 각 직업별, 직급별로 나눈 한국의 모자문화를 보고 "동방의 위대한 모자의 나라라고 조선을 소개했다. 동시에 모자의 종류가 무려 4천 가지나 된다고 놀라워했다.
1886년 고종의 손님으로 온 미국인 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l)의 서양인 최초의 조선 기행문인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Chosön: The Land of Morning Calm - A Sketch of Korea』>에서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같이 갓을 쓰고 다니는 조선인들의 갓을 보고 이런 표현을 한다.
외투와 신발은 벗어도 머리 위에 머무르니 평생을 붙어 다니는 영원한 검은 후광이다."
모자의 종류가 4000가지란 의미는?
모자가 4000종류나 된 이유는 이러한 모자가 신분을 나타내는 신분증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특히 조선의 모자는 신분 사회의 가치관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기에 조선 사회와 그 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가늠자가 되었다.
동시에 착용자와 용도에 따라 그 종류와 형태가 수백 종으로 불어나 분화해 나갔던 것이다. 특히 조선의 선비들은 의관정제(衣冠整齊)를 선비가 지켜야 할 금도로 여겼기 때문에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반드시 관모를 갖춰 써야 했다. 즉 모자 없이는 외출도 맘대로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일부 평민들은 자신들의 신분과 상관없는 고급모자를 쓰고 다니면서 양반행세를 하기도 했다. 요새말로 짝퉁명품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의 모자는 의복의 장식품과 장신구의 역할을 넘어 신분과 계급, 직업, 나이를 상징하고 분별하는 사회적 코드 역할을 한 것이다.
한국의 대표 모자는 '갓' 그것 말고는?
모자의 종류는 정말 다양하다. 유건, 사모, 흑립, 복건, 탕건, 면류관, 익선관, 전립, 패랭이, 초립, 상모, 전모, 너울, 남바위, 전립, 감투, 삿갓, 정자관, 족두리 등등 다 쓰지 못할 정도로 많다.
양반들이 쓰는 갓은 크기도 크고 대나무와 말총을 엮어서 만들었기 때문에 무게도 상당했다. 그래서 양반들은 사방관이라고 해서 실내전용 모자를 사용했다. 사면이 평평하고 네모난 형태라고 해서 사방건 이라고도 불렀고 갓에 비해서 아주 가볍고 작은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모자를 통해서 차별 정책을 시행했다. 평민들과 신분이 낮은 역졸(군인)이나 보부상에게는 패랭이 모자를 쓰게 했고 이것에도 디자인의 차이를 둬서 신분을 드러내게 했다. 역졸의 경우에는 겉면을 까맣게 칠한 것을 써야 했고 보부상은 양 옆에 목화송이를 단 디자인이 적용되었다.
그리고 천민들의 경우 흑립을 쓴 양반 앞에서는 패랭이를 벗고 고개를 숙여 절을 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것은 오늘날 어른 앞에서 모자를 벗고 인사하는 것이랑 같았다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서민이나 천민들에게는 신분을 표시하는 모자가 달갑지 않았다.
그래서 동학혁명 때 그들의 요구사항 중 하나는 "백정들이 쓰는 평량갓(패랭이)을 없앨 것"이 포함되었을 정도였다. 모자는 단순히 멋으로 쓰는 것 이상의 엄청난 권력과 차별의 상징이기도 했던 것이다.
모자를 벗어야 하는 상황은 어떻게 했나?
최대한 모자를 안 벗으려고 했고, 굳이 허용된다면 딱 세 번이 있었다. 급히 화장실을 가야 할 때, 침상에 들 때, 그리고 죄수가 되었을 때였다. 모자를 벗는 것은 자존심을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한 가지 일화가 있다. 조선말기의 관료로 을사늑약 체결 직후 자결 순국한 충정공 민영환과 관련된 이야기다.
고종의 각별한 신임을 받았던 민영환은 1896년 4월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특명 전권 공사로 임명되어 윤치호·김득련·김도일 등을 대동하고 러시아로 떠나게 되었다.
당시에는 비행기가 없어서 민영환 일행은 인천을 떠나 상해, 나가사키, 동경, 캐나다, 뉴욕, 런던, 네덜란드, 독일, 폴란드를 긴 여정 끝에 겨우 모스크바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배에서 보내면서 어렵게 가게 된 니콜라이 2세 러시아 황제의 대관식에 정작 민영환은 입장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당시 러시아는 대관식에 참석할 때 모자를 벗어야 하는 예법이 있었다. 러시아 측에서 "대한제국의 관모를 벗어야만 입장할 수 있다"라고 설득을 했는데 민영환 선생은 끝까지 "우리의 법도와 예의가 있거늘 결코 이 모자를 벗을 수는 없다." 하여 결국 대관식 본 행사장에 참석하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 친선대사로 함께 참석한 일행이었던 윤치호가 "여기까지 왔는데 모자 딱 한 번만 벗읍시다, 왕이 보냈는데 임무는 완수해야 한다"라고 설득했다는 후일담이 전해져 오지만, 이렇게 같이 간 대신들까지도 민영환을 끝까지 설득에 실패했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모자가 중요했던 것이다.
여성들도 모자에 목숨 걸었을까?
남자들은 신분의 상징, 여자들은 부의 상징으로 모자를 썼다. 그래서 크고 화려한 모자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화관이다. 족두리와 유사한 형태의 머리쓰개로 장식용 성격이 컸던 곳이 화관인데 여기에 잔뜩 장신구나 비녀를 꽂아서 치장을 했다. 서민들도 일생에 딱 한번 결혼식날 쓸 수 있는 모자가 바로 이 화관이었다.
'야양 떨다'의 아양은 모자에서 왔다.
아얌이라는 모자도 있다. 말 그대로 '이마를 가린다'라는 뜻으로 조선 시대 겨울에 부녀자들이 나들이할 때 춥지 않도록 머리에 쓰던 겨울 모자다. 그래서 겨울에도 멋을 낼 수 있는 모자였기 때문에 여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남에게 잘 보이려고 간사스럽게 굴다는 뜻으로 "'아양 떨다"라는 말이 이 모자에서 기원했다고 전해진다.
근대 모자 갤러리를 가보고 싶다면?
목포를 가야 한다. 목포 영해동에 가시면 우리나라 최초의 모자점 ‘갑자옥 모자점’에 가면 발견할 수 있다.
갑자옥(甲子屋) 모자점이 문을 연 것은 갑자년. 1924년이니 올해로 딱 100살이 된 모자 전문점이다. 그 시작은 갑자옥의 초대 대표였던 문두칠이란 인물이 조선에 단발령이 내려졌으므로 출입할 적이면 의관을 갖추어야 하는 조선 남정네들이 이제 갓 대신 서양식 모자를 쓰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은 들어맞았고 그야말로 초대박을 치면서 전국 팔도로 모자를 보내주는 모자점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의 손자 문공언의 사업 수완으로 광주·서울·대구·부산·청주 지역까지 진출, ‘조선인 최초의 체인점’으로 자리매김한 모자 전문점이 된 것이다.
단발령을 시작으로 한국의 근대문화를 상징하는 가치를 인정받아서 작년 5월 목포모자아트갤러리로 재단장을 했고, 모자를 주제로 한 다양한 전시 공간과 이색콘텐츠를 제공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조성이 되었다.
아쉬운 것은 이러한 한국의 전통 모자를 우리는 사극에서 밖에 못 본다는 것. 우리는 왜 이렇게 되었는가를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