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산업의 원조 대장주는 삼성도 하이닉스도 아니다.

수출 1조원 검은 반도체 '김' 연대기

by 조인선

검은 반도체 ‘김’, 600년 전 한 남자의 관찰에서 시작되다


식탁 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가장 친숙한 반찬 ‘김’에 담긴 인문학


우리의 식탁에서 김이 빠진 풍경을 상상하기란 어렵습니다. 갓 지은 따끈한 밥에 바삭한 김 한 장, 그리고 약간의 간장이나 소금. 그리고 빠질수 없는 들기름과 참기름. 이 단순한 조합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치트키' 같은 맛이죠. 최근에는 해외에서도 김은 seaweed, 'K-스낵'으로 불리며 전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익숙한 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단순히 '밥상의 조연' '바다에서 온 풀'이 아닌, 600년의 지혜와 치열한 기술 혁신이 담긴 '김'의 역사를 짚어봅니다.


1. ‘김’이라는 이름의 기원: 설화와 언어 사이


김은 예부터 해의(海衣, 바다의 옷), 자채(紫菜, 보라색 풀)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지역에 따라서는 '짐'이라고 부르기도 했죠. 흥미로운 점은 '김'이라는 이름의 유래입니다.


남 광양 태인도에는 **김여익(金汝翼)**이라는 인물의 설화가 전해 내려옵니다. 그가 처음으로 김 양식법을 고안해 널리 퍼뜨리자, 사람들이 그의 성을 따서 '김'이라 부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죠. 언어학적으로는 '짐'이 '김'으로 변했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이를 뒷받침 하는 근거는 김여익(1606~1660) 선생의 묘표(무덤 앞에 세우는 푯돌)에 적힌 글귀를 보면 ‘시식해의’(始殖海衣)와 ‘우발해의’(又發海衣)라는 글귀가 남아있는데요. “김을 처음 양식했고, 또 김 양식법을 창안했다”는 의미를 뜻하고 있습니다.

한 인물의 집념이 식재료의 이름이 되고 묘비에도 새겨졌다는 사실을 김에 담긴 우리 선조들의 자부심을 보여줍니다.


양식 김의 창시자로 전해지는 김여익 선생


2. 세계 최초의 양식, 기록이 말하는 자부심


흔히 김 양식의 종주국을 두고 논쟁이 있지만, 학계의 정설은 **"한국이 일본보다 최소 반세기 앞섰다"**는 것입니다.


결정적인 증거는 1420년대 세종실록 등 고문헌에 등장하는 기록들입니다. 조선 후기의 실용 지식서인 정약전의 **《자산어보》**에서도 김을 '자채'라 부르며 그 생태를 상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바위에 붙어 자라는 김의 특성을 관찰하고, "사람이 붙을 곳을 만들어주면 더 많이 얻을 수 있겠다"는 공학적 상상력을 발휘한 결과가 바로 오늘날의 양식 기술로 이어진 것입니다.


"김은 바위에 엉키듯 둘러싸며 색은 검보라빛이고 맛이 달다." — 정약전, 《자산어보(玆山魚譜)》 중에서



3. 나뭇가지 하나가 만든 혁명: 섶양식에서 그물까지


초기의 김 양식은 거창한 장비가 필요 없었습니다. 바다에 나뭇가지를 꽂아두면 김 포자가 저절로 달라붙어 자라는 방식, 이른바 **'섶양식'**이었죠.


이후 대나무를 활용한 '죽홍', 그리고 대량 생산을 가능케 한 '그물(망홍)' 방식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특히 여름이 지나 수온이 22도 아래로 떨어질 때 씨앗을 붙이는 '채묘' 기술의 발전은, 김을 '운 좋게 얻는 자연의 선물'에서 '계획적으로 생산하는 산업'으로 탈바꿈시켰습니다.


농사로 치면 채묘는 모를 심는 파종과도 비슷한 과정으로, 김을 양식할 때 굉장히 중요한 과정입니다.

자연채묘는 바다에서 자연스럽게 포자가 붙도록 기다리는 방식이고, 인공채묘는 포자가 방출되도록 환경을 조절해서 더 안정적으로 붙이는 방식으로 김을 생산하는데 있어 가장 핵심적인 과정입니다.


채묘방법은 굴 껍데기에서 10개월 정도 키운 김 포자를 수조에 넣은 뒤에 대형 물레에 채묘망을 씌워 돌리면 방출된 포자들이 그물에 붙습니다. 이후 적정한 시기에 그물을 바다에 넣으면 비로소 김으로 자라기 시작합니다.


김은 수온이 영상 5~15도일 때 잘 자랍니다. 여름이 지나 해수온도가 22도 이하로 떨어지면 김 채묘를 시작해야 하기때문에 바다 수온이 채묘에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는데요.

김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뜨거운 여름을 견디고 찬 바람이 불어오길 기다립니다.


4. 왜 '한국 김'일까? 일본 김과의 결정적 차이


일본 여행객들이 한국 마트에서 김을 싹쓸이하는 풍경, 이제는 익숙하시죠? 일본에도 김이 있는데 왜 굳이 한국 김일까요?


한국 김: 들기름과 참기름을 발라 소금을 뿌려 굽습니다. 얇고 바삭하며 입안에서 녹는 식감이 특징입니다. (조미김의 정석)


일본 김: 간장과 설탕 베이스의 소스를 발라 두껍고 촘촘하게 만듭니다. 주로 주먹밥(오니기리)이나 초밥용으로 쓰이며 빳빳한 식감을 가집니다.


일본인의 밥상에서 김이 조연이라면 한국인의 밥상에서의 김의 존재감은 주연급! 결국 밥반찬으로서의 '고소함'과 '바삭함'은 한국 김을 따라올 자가 없다는 것이 세계적인 평판입니다.

연간 1조원, 120여 개국 이상으로 수출되는 한국의 김


5. 한 장의 김, 그 이상의 문화 자산


이제 김은 단순히 밥반찬을 넘어 'K-푸드'의 선두 주자가 되었습니다. 해외에서는 저칼로리 건강 스낵으로, 비건들을 위한 최고의 단백질과 식이섬유 공급원으로 각광받고 있죠.


얇디얇은 김 한 장에는 요오드, 철분, 칼슘 등 우리 몸에 꼭 필요한 영양소가 가득합니다. 600년 전 선조들이 바다를 관찰하며 얻어낸 이 지혜로운 식재료는 이제 전 세계의 식탁을 연결하는 매개체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김을 '맛있는 반찬' 정도로만 생각하지만, 사실 김은 편의성, 활용성, 저장성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한국을 대표하는 식재료입니다. 600년 전 선조들이 바다를 세밀하게 관찰하며 일구어낸 이 작은 혁신은, 이제 전 세계인의 식탁에 올라간 '검은 반도체' 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문화 자산으로 우리의 '김'은 연일 '상한가'를 갱신하며 세계인의 식탁을 달구고 있습니다.



꼬불꼬불한 곱창을 닮았다고해서 지어진 곱창김과 김자반


*김 이야기에 대한 더 자세한 이야기는 조인선의 라디오 [선조들의 지혜는 국력]에서 확인하실수 있습니다.

1/16(금) 김경식의 오토쇼 으라차차 (이재근/길현우/강창훈/조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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