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보러 나갔다가 목격한 훈훈한 이야기
태풍 솔릭 대비
태풍 솔릭이 온다고 해서 긴장이 되었다. 6년 전 태풍이 오던 날, 아파트 11층에 살던 나는 가장 큰 창문이 깨질까 조마조마했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 높이 2.3미터에 가로가 4미터는 될 만큼 큰 유리창이 안쪽으로 2센티, 바깥쪽으로 2센티 정도 휘청거렸다. 그보다 더 심하거나 덜 심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아파트 한 동이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어지럽기도 했다. 친구네 동네에서는 아침에 출근하던 남편이 쓰러진 나무 때문에 세상을 떠나는 비극도 있었다.
그보다 더 강한 태풍이 온다는데 나는 무엇을 하면 좋을까. 우선 새로 심은 살구나무의 안위가 가장 걱정이다. 뿌리가 채 내리기 전에 나무가 흔들리면 수명에 지장이 있다. 아쉬운 대로 지주대를 세워 줘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먹거리를 채워야 한다. 태풍이 지나가면 푸성귀와 과일의 가격이 폭등한다. 게다가 비가 많이 온 후의 과일은 맛도 덜하다. 그 참에 떨어진 장조림도 좀 만들고, 빵과 주전부리도 좀 사다 놓아야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며 장바구니를 챙겨 나섰다.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지 않은지 좀 오래되었다. 그곳에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소비재들이 있지만, 덕분에 나는 쇼핑에 오랜 시간과 에너지를 써야 한다. 공산품이 떨어지면 가끔 가긴 하지만, 횟수를 많이 줄였다. 원하는 것을 하려면 시간은 아끼고 또 아껴 써야 한다. 고기, 빵, 과일, 야채 같은 식품은 동네 소상공인의 가게를 이용하고 있다. 단골가게에서는 내 취향대로 고기를 썰어 주시고, 달지 않은 빵을 살 수 있고, 포장재를 최소화할 수 있다. 무엇보다 우리 동네 경제를 위해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있다는 자부심도 보너스다.
태풍 덕분에 하늘은 새파랗다. 차에 오르니 여전히 뜨겁다. 시동을 켠 차에서는 숨이 막힐 것 같은 뜨거운 바람이 나온다. 여름이 가기 섭섭하구나. 마지막 발버둥처럼 느껴진다. 차를 돌려 나가는 모퉁이 텃밭은 수확이 끝난 옥수숫대가 메주콩 색으로 말랐다. 그래도 여전히 텃밭은 다른 야채로 푸르다. 태풍이 지나가면 텃밭은 어떻게 될까.
불난 차
제일 먼저 정육점에 들렀다.
"홍두깨살 2킬로 주세요."
"오늘 홍두깨가 오후에 들어오는데요."
"그럼 그건 배달해 주실 수 있나요?"
"네. 해 드릴게요."
"고맙습니다. 목살 한 근도 함께 부탁드려요."
오늘 저녁은 돼지고기 숙주볶음으로 정했다. 그리고, 바로 생협으로 가 야채들을 구입했다. 한참 장바구니에 담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린다.
"홍두깨가 내일 들어온다는데요."
"아고.. 그럼 오늘은 목살만 할게요."
단골이 아닌 옆 고깃집에 갔는데, 그곳에서 역시 홍두깨는 없다. 장조림용으로 더 좋다고 추천해 주시는 윗 양지로 골라, 2킬로를 샀다. 홍두깨가 아닌 걸로 장조림을 하면 늘 후회한다 말했더니, 100% 환불을 해 주겠다고 큰 소리를 친다. 그 말에 또 넘어가 구입하고 만다. 나는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는데 기여하는 주민이니까.
그리고, 과일가게로 옮겨 갔다. 어떤 여성이 하얗고 조그만 강아지를 안고, 다정하게 얼굴을 부비며, 남편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면서 과일을 고르고 있다. 기다릴 시간이 없어서 떡집과 빵집에 들러 먼저 구입하고, 다시 왔다. gi지수가 낮은 골드 키위를 구입하고, 남편이 좋아하는 알이 작은 켐벨 포도와 내가 좋아하는 복숭아를 고르는데 긴 단발머리의 총각이 "어. 어? 저기 불이 난 거 같은데." 한다.
그 손을 따라가 보니, 마을버스에서 서두르며 여성 한 분과 마을버스 기사님이 내린다. 아, 알고 조치를 취하시려고 내리셨나 보다. 생각했다. 아니, 마을버스 기사님이 나이가 지긋하신 여성분이시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당황해서 발을 동동 구르시는 모습이 보이면서, 119에 신고를 해야지 하고 전화기를 꺼내는 순간, 눈앞의 그 총각이 소화기를 들고 4차선 도로를 건너 마을버스로 뛰어간다. 가자마자 소화기로 분말을 뿜어 대는데, 슈퍼맨이다! 하는 목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나는 물개 박수를 치고 싶었다. 이렇게 훈훈한 마무리를 본 사람이 별로 없어서 아쉽다. 아니, 거의 아무도 보지 못했다.
대단지 아파트 정문 앞에서 마을버스에 불이 활활 타 오르는 것은 아찔하게 무섭다. 마침 시간도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들이 하교할 12시 30분에서 1시 정도였다. 만약 수퍼맨이 소화기를 들고 나타나지 않았다면 자칫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천만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남의 일이라고 나몰라라 하는 사람들만 있었다면 어땠을까. 사고가 난 후에 재산 피해, 인명 피해는 돌이킬 수 없다.
남의 일을 내 일처럼 소화기를 들고 뛰는 이웃이 있는 세상에 살고 있어 다행이다. 나는 앞으로도 그 과일가게를 애용하면서, 오늘 있었던 일을 동네 방네 소문을 낼 생각이다. 좋은 이웃이 오래오래 곁에 있도록 소상공인이 하시는 작은 점포들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리고, 차안에 작은 소화기를 갖고 다니는 운동이 일어나면 좋겠다. 오늘처럼 초기에 빨리 대응하면 소중한 많은 것들을 지킬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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