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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경 Oct 17. 2018

자기만의 콘텐츠

기록하지 않은 하루는 바람이 되어 허공으로 날아간다.

아들의 일기


아들의 일기를 읽고 나니 이거 정말 어쩌면 좋아. 하는 생각이 든다. '숙제를 했다. 게임을 했다. 재밌었다. 행복했다.' 저 단어를 걷어내면 남는 게 없다. 일주일 내내 저런 일기를 쓰는 본인은 얼마나 재미없을까. 그래도 늘 행복하다니 다행인 건가. 처음엔 게임을 하려고 대충 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리 뭐라 해도 나아지지 않는다. 혹시 방법을 모르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그럴 수도 있겠다. 학원도 안 가는데, 가르쳐줘야겠네.


"준서야 옆에 앉아 봐 봐. 일기를 쓸 때는 일단 기승전결 4 단락을 나눠 봐봐. 4줄씩 쓰는 거야. 그럼 그게 원고지 한 장이야. 다 쓰면 그럼 16줄이 되지? 그럼 원고지가 4장이니까 800자 정도 되는 거야."

(무슨 말인지 모르는 표정)

"자. 그럼 우리 오늘 무슨 얘기를 쓸까?"

"지후가 놀러 온 얘기."

"걔가 어떻게 놀러 왔어?"

"전화를 해서 놀러 가도 되냐고 물었어."

"그래 그럼 그걸 써. 그때 니 기분이 어땠어?"

"좋았어."

"좋았다는 거 말고 그 기분을 묘사해 봐."

"하늘을 날아갈 것 같이 좋았어."

"그래 그럼 그걸 써."

"지후는 우리 집에 어떻게 왔어? 뛰어 왔어?"

"아니 자전거를 타고 왔어."

"그럼 그것도 써."

"지후가 우리 집에 오게 된 얘기를 쓴 거야. 4줄이 되지?"

"그다음엔 와서 뭘 하고 놀았어?"

"게임을 했어."

"무슨 게임을 했어? 게임을 할 때 기분이 어땠어?"

"양보를 잘 하는 좋은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어."

"어떤 양보를 했는데?"

"내가 하고 싶은 캐릭터를 양보해 줬어."

"어떤 캐릭터인데? 걔네들 모습은 어떻게 생겼어?"

"그래 그럼 그걸 써."

"그럼 오늘의 플레이에 대해서 좀 더 묘사를 해 봐. 어떨 때 재미있었는지, 오늘의 최고 플레이는 뭐였는지. 그리고 하루 종일 게임을 했어?"

"아니 두 시간."

"그래 그럼 그 얘기도 써. 그래서 기분이 어땠어?"

"좋았어. 아니 그렇게 말고 어떤 점이 좋았어?"

"친구랑 같이 앉아서 게임을 하는 게 좋았어."

"그래 그럼 그렇게 써."

"아! 이렇게 하니까 금방 16줄이 되네? 어떻게 쓰는지 알겠어."

평소보다 훨씬, 아주 훠얼씬 더 빨리 일기를 쓴다. 30% 정도의 시간이 걸린 것 같다. 몰라서 그런 게 맞구나. 그래도 열두 살이면 이제 그쯤은 척척 잘 해야 하지 않나? 사람마다 꽃피는 시기가 다 다르니, 신경 쓰지 말자고 마음을 또 평평하게 잡아당긴다. 일기는 하루에 있었던 일을 쓴다기 보다, 매일 쓰기 때문에 일기인 거라고 잔소리한다. 아들, 기록으로 남기지 않으면 모든 생각은 바람이 되어 허공으로 날아간다.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없어.


자기 콘텐츠


책을 한 권 쓰고 나니 자기 콘텐츠가 있어 좋겠다는 이야기를 가끔 듣는다. 그래서 좋다기보다는, 나의 경험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에 감동했다. 반면, 겉으로는 백조처럼 우아해 보일지라도 실상은 협업이 어려운 일의 특성상 매우 외로운 일이란 걸 배우고 있다. 그래도 책을 한 권만 낸 작가보다는 두 권이나 세 권 쓴 작가가 되고 싶어서 열심히 수련하고 있다. 그런데, 나도, 친구들도, 독자분들도 모두 자신만의 삶을 고유의 속도로 달리며 독창적 콘텐츠를 쌓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회사만 다니는 본인은 자기만의 콘텐츠가 없다고 말하는 친구들도 있다. 그런데, 아이를 둘셋 키우며 일하는 엄마에겐 분명히 더 짙은 삶의 노하우가 있을 것 같다. 살림의 솜씨가 암팡진 프로주부일수록 할 줄 아는 게 없다며 겸손하지만, 그 노하우는 금은보화와 같다. 과일가게 사장님도, 구두가게 사장님도 우리 모두 삶의 바퀴를 잘 굴리기 위한 자기만의 노하우가 있다.


삶에 더 귀하고 덜 귀함이 있던가. 더 소중한 삶과 덜 소중한 삶이 있던가. 모든 이들의 삶은 농밀하다. 구두굽을 고치러 들어간 구두가게에서 눈부시게 흰 셔츠를 입고 일하시던 사장님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분의 삶이 궁금해 나도 모르게 이것저것 여쭈었다. 컴컴한 구둣가게에서 30년 청춘을 보냈지만 삼 남매를 모두 대학교육시켰노라 말씀하시는 그 순간, 사장님의 눈빛은 세상 만물을 품는 봄햇살처럼 따뜻했다. 모든 이들의 삶은 자기만의 콘텐츠가 있다.


아트스피치로 유명한 김미경 원장님의 유튜브 채널엔 '네 자매 의상실'이 있다. 모두 50대가 된 김미경 선생님의 네 자매가 자신만의 삶을 풀어내는데, 살만큼 살아본 언니들의 방송은 진정성 있는 콘텐츠가 되어 사람들을 끌어당긴다. 실제로 40~50대의 뷰티 노하우를 다룬 유튜브에 등장한 화장품은 거의 품절이 되었다. 누구에게나 자기 삶이 있고, 자기만의 콘텐츠가 있다. 혹시 다른 점이 있다면 기록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겠다.


 기록하는 법은 수련이  필요한  같다. 다행히 매일매일 기록하다 보면 조금씩 나아진다. 의식과 무의식이 부딪히며 전투를 벌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좋아질 거라 믿는다. 신구 선생님께서도 최고의 연기자는 최고의 성실을 가진 거라며, 재능은 별로 차이가 없다고 말씀하셨다. 재능만 믿고 설치다 사라진 수많은 사람들을 보았다시며. 그래, 차라리 재능 같은  없다고 생각하며 그저 매일매일 노력하는 거다. 행동은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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