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동물 고양이와 이 주일
“엄마, 나 고양이 키우고 싶어.”
“고양이는 무슨 고양이. 엄마는 식물 200개로 벅찬데.”
“너무 외로워. 동생을 하나 낳아줬어야지! 엄마는 왜 나 하나만 낳아가지고.”
“그러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그러니까 고양이를 키우게 해 줘.”
“어차피 또 엄마 차지가 될 텐데, 정말 시간이 없어. 네가 다 돌볼 자신이 있는지 먼저 생각해 봐.”
이런 실랑이가 오간 지 한참 되었다. 육 학년이 들어 하루가 멀다고 고양이나 강아지를 키우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집 안에서 동물과 지내는 걸 상상해 본 적이 없다. 살아 있는 생명을 품는다는 것은, 그 삶이 끝날 때까지 함께 하겠다는 약속이기도 하다. 그 책임이 무거웠는지도 모르겠다.
처음에는 단호하게 거절하던 남편도, 아들의 끈질긴 요구에 서서히 무게 중심이 기울기 시작했다. 아들과 남편은 틈만 나면 고양이 종류와 특성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말은 안 했지만, 몰래 고양이를 보고 오는 눈치였다. 나는 꿈틀거리는 털에는 손도 대고 싶지 않았다.
“여보, 준서야. 나는 고양이 절대 싫어.”
<미래의 교육>이라는 책에서, 창의적인 사람들은 식물을 좋아하고, 고양이를 키운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글을 읽었다. 고양이를 키워볼까? 마음이 1도쯤 기운다. 가족 누군가가 원한다면 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을 생각해 봐야 하는 게 아닐까. 내가 식물을 잔뜩 데려올 때도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 주었던 가족이 아닌가. 머리로는 나도 무게추가 조금씩 기울고 있다.
“여보, 고양이는 냄새도 거의 안 나고, 소리도 거의 안 난대. 키워보자. 키워보면 또 좋을 수도 있잖아.”
어니스트 헤밍웨이, 헤르만 헤세, 박경리, 무라카미 하루키, 나쓰메 소세키 등의 작가님들께서 고양이를 키웠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내 마음의 시소는 완전히 기울었다. 그런 분들이 좋아하셨다면 혹시 나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기왕이면 좋은 영감을 주는 고양이를 만나고 싶었다. 그런 고양이를 어디서 어떻게 만나나.
혹시나 싶어 남편과 아들을 따라 고양이를 만나러 나섰다. 두 어 번 따라갔지만, 나는 그 의사 결정엔 참여하지 않기로 했다. 잘 모르면 나서지 않는 편이 낫다. 그냥 남편과 아들에게 일임했다. 추석 전날, 구경만 하러 간다던 두 사람이 한참이 지나도 오지 않는다. 정말로 데리고 오면 어쩌나. 불안하다. 아이를 만나던 날과 비슷하다.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 만나게 되는 생명이라니.
띠띠디딕. 번호키를 누르는 소리가 들리고, 보통은 그 다음으로 들리는 아들의 힘찬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뭔가 변화가 감지된다.
“엄마아, 엄마아아?”
“엄마, 고양이 왔어.”
아들의 두 손 위엔, 신줏단지처럼 들어 올린 가방이 있다. 가방 안에서 동그란 눈 두 개가 빼꼼히 나를 보고 있다. 생각보다 싫지 않다.
“고양이 왔구나.”
“엄마, 고양이는 큰 소리를 싫어한대.”
목청 큰 두 사람의 목소리가 잠잠해졌다. 내가 그렇게 잔소리를 해도 못 해낸 일을 고양이는 단 몇 시간 만에 해냈다. 고양이가 나와 같은 종족인 느낌이 들면서, 무조건 좋아진다. 미야아아옹, 미야아아옹. 난 이제부터 무조건 고양이 편이다.
녀석은 경계 없이 내 곁에 와 부비 대고, 잘 먹고 잘 잔다. 발코니 문 앞에 앉아 바람을 맞으며 꾸벅꾸벅 졸고 있는 녀석.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평화롭다. 낮잠 자는 내 옆에 누워, 자기도 배를 드러내고 쿨쿨 잔다. 나는 우리 집에 온 첫 번째 고양이에게 ‘별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길에서 우연히 만난 강아지가 입을 벌리고, 뾰족한 이빨을 드려내고, 긴 혀로 입 주변을 핥는 모습을 보았다. 그 모습에서 별이가 떠올랐다. ‘어, 개는 고양이보다 혀가 길고, 이빨이 더 날카롭구나.’ 처음으로 강아지가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경험은 낙숫물처럼 천천히 사람을 조금씩 바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