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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경 Oct 30. 2019

아름다움 vs 편리함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

주방


  음식을 조리하고, 먹는 공간으로서의 주방 공간을 디자인할 때는 고려해야 할 요소가 요리의 수만큼 많아진다. 중국 요리를 즐기는 사람에겐 성능이 좋은 후드가 필요하고, 베이킹을 즐기는 사람에게는 용량이 넉넉한 오븐을 위해 전기 배선을 따로 빼는 작업이 필요하다. 집에서 고기 구워 먹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실내 공간과 주방을 분리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라이프스타일을 분석해 주방에서 필요한 요소들을 정리한 다음, 공간 디자인에 들어간다. 주방에서 싱크대는 가장 큰 덩어리로, 제품의 사이즈 하나하나 마다 세심하게 디테일을 확인해야 한다. 잠깐 놓친 1mm 차이로, 가전제품의 설치가 불가능해지는 경우도 빈번하다. 실제로, 그런 일이 얼마나 많으면, 우리 현장에 오셨던 식기세척기 설치 기사님은 먼저 시공 장소를 확인한 다음 제품의 발주를 넣으신다고 했다.


  싱크대에서 가전제품의 위치와 동선을 잡았다고 해도, 아직 넘어야 할 산은 서너 개쯤 남았다. 싱크대는 보통 '속통'이라 불리는 네모들을 조합해 무게를 지탱한다. 그중 머리 위쪽으로 붙이는 상부장은 보조목을 앙카로 콘크리트 벽에 박고, 그 위에 속통을 얹어 다시 피스로 튼튼하게 고정한다. 하부장은 다리를 세우고, 경첩을 박은 후 문을 설치한다. 최종적으로 하부장 위에 상판을 얹는다.


  속통에 쓰이는 보드만 해도 E2 등급부터, E1, E0, LPM, 원목까지 다양한 등급과 소재가 있고, 문짝은 마감재에 따라 PET, 무늬목, 도장을 한다. 원목에 도장을 입히는 경우도 있고, 거울 문을 쓰는 경우도 있다. 속통과 문을 연결하는 철물에도 브랜드가 있고, 대체적으로 가격이 높을수록 경첩과 쇼바의 고장이 적다. 수전과 대리석, 서랍이냐 문이냐 같은 퍼즐을 맞추다 보면, 뇌를 쥐어짜, 즙을 내는 기분이 든다.

 

  그래도, 이 모든 요소를 조합해 세상에 하나뿐인 주방을 만들어 내면 이야기가 생긴다. 나와 우리 가족에게 특화된 주방은, 동선을 정리해 시간과 에너지를 아껴주고, 심미적 만족감을 준다. 볼 때마다 기분 좋은 주방. 먹고사는 일이 귀찮은 일이 아니게 되는, 자꾸 뭔가를 하게 되는 부엌. 우리 풍토에서 나고 얻은 재료로 만든 음식을 하루하루 먹고사는 것이 곧 인문학이라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형태가 기능에 우선 할 때 생기는 일들

 

  우리 집의 싱크대는 까만색 거울로 만들어져 있다. 굳이 '만들어져'라고 기술하는 이유는 이 싱크대의 디자인 작업에 내가 전혀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엔, 싱크대 상부장과 하부장의 가로 라인과 세로 라인이 딱딱 맞아 시선이 흐르는 데서 오는 만족감을 느꼈다. 일반적으로 싱크 하부장엔 식기세척기, 개수대, 전자레인지 같은 가전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이렇게 맞추는 것은 기하학에 가깝다.


   이 디테일의 비결은 냉장고, 김치냉장고, 전자레인지 같은 대부분의 가전이 아일랜드 너머 벽에 위치를 잡았기 때문이다. 그 얘기는 아름다움을 위해 긴 동선을 감수하겠다는 의사 표현이다. 형태가 기능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탐미주의자들이 내릴 수 있는 결정이다. 그 덕에, 싱크대 하부 라인에 들어가는 가전은 개수대 옆 식기세척기가 유일하다.


  하부장에 들어가는 가전은 대부분 가로 폭이 60센티미터 안팎이다. 그 라인을 따라 수직과 수평이 딱딱 맞았다는 이야기는 상부장의 문짝도 60센티미터 정도라는 이야기가 된다. 처음엔 상부장의 문짝이 크고 시원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부장의 문짝이 크니, 싱크대 앞에 사람이 서서 문을 열면 머리를 덮고 있다. 옆에서 보면 머리가 없는 사람이 된다. 문에 머리를 부딪힐까 봐, 긴장을 풀지 못 하고 눈을 부릅뜨고, 고개를 숙여가며 지나야 한다.  


  한 번은 식기세척기에서 그릇을 꺼내다, 이마가 문 모서리에 있는 힘껏 부딪혔다. 강도 높은 유리문에 머리를 부딪히니, 이마에 밤톨만 한 혹이 났다. 그때 치밀어 오르는 분노! 그런 일이 종종 생기니, 주방에서 일을 할 때에는 몸짓에 브레이크가 걸린다. 한 번에 할 일을, 몸을 서너 번 움직여 머리 위를 확인한 후 움직이게 된다. 그때 즈음부터 싱크대가 멋진 슈트를 빼입은 폭력배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들이 키가 자라, 싱크대에 손이 닿으니 문에 계속 손자국이 남는다.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손자국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흑경이라는 소재는 우리 가족의 일상에는 피로도를 높이는 소재이다. 머리를 부딪혀 혹이 나고, 손자국이 나도 아름다움을 위해 감수해야 하는가. 아름다움인가. 편리함인가. 포기할 수 없는 두 가치가 대립하는 순간이 온다. 그럴 땐 나는 편리함 쪽에 손가락 하나를 살짝 얹고 싶다. 그러면서도 한쪽으로 기울지 않도록, 기어이 아름다움과 편리함 사이에 균형을 잡아 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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