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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경 Mar 25. 2020

스크루지와 26만 명

기억에 남는 이야기들


  감수성이 말랑말랑한 마쉬멜로우였던 어린 시절, 그때 읽었던 책들 중 유난히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몇 가지 있습니다. 구리 료헤이의 <<우동 한 그릇>>,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입니다.

  <<우동 한 그릇>>은 남루한 행색의 두 아들과 엄마가 섣달 그믐날 우동집 북해정을 찾아, 우동 한 그릇을 주문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안쓰러운 우동집 주인은 일 인분 반을 끓입니다. 세 모자는 그다음 해에도 섣달 그믐날 한 그릇만 주문하고, 우동집 주인은 또 일 인분 반을 끓입니다. 그다음 해엔 두 그릇. 그리고 한동안 우동집 주인은 세 모자를 볼 수 없었습니다.

  10년 후 섣달 그믐날, 세 모자는 다시 우동집을 찾습니다. 그동안 큰 아들은 의사가 되고, 둘째 아들은 은행원이 되었습니다. 우동 일 인분을 주문했을 뿐인데도, 감사하다고 인사하는  힘을 내 살 수 있었다며, 세 모자는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그리고, 우동 삼인분을 주문합니다. 우동 한 그릇, 따뜻한 말 한마디가 주는 여운이 긴, 짧은 이야기입니다.

<<마지막 잎새>>는 그리니치 빌리지의 예술가 거리에 살고 있는 조그마한 여자 존시가 11월 폐렴에 걸려 침대에 누워 옴짝달싹 못 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존시가 회복할 가능성은 열에 하나 정도입니다. 담쟁이덩굴의 잎이 모두 떨어지면 자기도 같이 생명이 떠날 거라 생각하며, 회복의 의지가 전혀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아래층의 실패한 화가, 베어먼 노인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경멸과 조롱의 말을 마구 퍼붓습니다. 비바람이 몰아치던 온밤이 지나고, 차양을 걷었을 을 때 떨어지지 않은 마지막 잎새가 보입니다. 그 잎을 보고, 존시는 다시 삶의 의지를 되찾습니다. 그 밤 동안 베어먼은 비를 쫄딱 맞으며 담쟁이 잎을 그려 넣었고, 덕분에 폐렴에 걸려, 생명의 불빛이 꺼져갑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크리스마스 캐럴>>은 돈만 아는 스크루지 영감이 등장합니다. 세상 누구에게도 경멸과 조롱하는 말만 내뱉고 돈을 우상처럼 여기는 스크루지. 먼저 세상을 떠난 동료 말리가 크리스마스이브에 유령을 보내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스크루지는 아픈 사람을 보면 “어차피 죽을 아이라면 죽는 게 낫겠지. 그러면 인구 과잉도 줄일 수 있을 테고 말이야.”라고 말하는 소시오패스입니다. 스크루지의 약혼녀는 스크루지에게 “스쿠르지가 변해, 황금을 우상으로 삼고, 모든 것의 가치를 돈으로 잰다”며 떠나갑니다. 하지만, 스크루지에게는 터닝포인트가 있었습니다. 세 유령들과 함께 보낸 밤이 터닝 포인트가 되어 개과천선합니다.


 n번 방의 스크루지


  뉴스에서 믿을 수 없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미성년자를 성적으로 학대하는 영상을 제작하고, 돈을 받고 유포하는 n번방이 있고, 연루된 사람이 자그마치 26만 명이라고 합니다.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눈을 동그랗게 다시 뜨고 읽으며, 모든 것의 가치를 돈으로 재는, 돈이라면 영혼도 팔 스크루지가 떠올랐습니다. 어쩌다 돌연변이라 하기엔 26만 명이라는 숫자가 참담합니다.

  트라우마는 무의식에 남아, 오랫동안 우리를 괴롭힙니다. 안락사를 허용하는 네덜란드에서는 5살 때부터 15살까지 성폭행을 당한 20대 여성이 거식증, 우울증, 환각, 자해 증상 등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었고, 참을 수 없는 고통과 싸우다 결국은 안락사를 선택한 일이 있습니다. 2016년 네덜란드 안락사심의위원회는 이 여성에게 안락사를 허용했습니다. 사는 고통보다 죽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26만 명이 본 그 영상은 한 사람의 인생을 난도질하는 칼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 사회의 성범죄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에 대한 논란도 점화되고 있습니다. 잘잘못을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 양심에게 묻는 것입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고, 누가 볼까 무서워 화면을 가리고 몰래 봤다면, 두 손에 땀이 차 연신 손을 닦았다면 잘못일까요, 아닐까요?

  감수성이 마쉬멜로우 같은 어린이들에게 일어난 말도 안 되는 학대에 어른으로 책임감을 느낍니다. 어린이들은 안전에 대해서, 생존에 대해서 위협받아서는 안 됩니다. 어른들은 세상의 모든 어린이들이 안전하고, 건강하게 자라도록 지켜야 합니다. 그게 마땅히 어른이, 사회가 해야 할 일인 줄 압니다. n번 방 유령이 비뚤어진 것들을 바로 잡는 터닝포인트가 되길 바랍니다.

  갓 태어난 병아리처럼 보드랍고 연약한 아이들이 입은 상처를 보듬어, 어서 빨리 전문가의 손길이 닿길 기도합니다. 나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빅터 프랭클 박사는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에서, ‘인간은 어떤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은 생각보다 아주 많이 강한 존재입니다. 아픔을 이겨내고 우뚝 선 작가 마야 안젤루나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도 계십니다. 용기를 잃지 마세요. 정말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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