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비가 무섭게 쏟아졌다. 평소대로라면 빗물이 하수관으로 똑똑 떨어지지만, 오늘은 폭포수 소리로 들린다. 이렇게 쏟아지는 비를 머금은 땅은 중량이 몇 배나 될까. 창밖으로 들리는 빗소리를 ASMR로 삼아, <무조건 당신 편>을 백 페이지쯤 읽었다.
고려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인 저자 한창수는 스님과 함께 했던 일화를 소개한다.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여쭈었더니, 대답 대신 스님이 계신 절의 큰스님 말씀을 전하셨다고 한다. "세상에 나고 죽는 건 내가 정한 것도 아니고, 다른 동물이나 식물 들처럼 그냥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삶인데, 자꾸 의미를 찾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고.
쏟아지는 비를 핑계로 달릴까, 말까 하는 마음을 들킨 것 같다. 그냥 열심히 사는 거다.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모자를 쓰고, 에어 팟 프로를 귀에 끼운 다음, 스마트워치를 착용하고, 암밴드를 묶고 운동화를 신는다. 이게 정말 다 필요한 걸까? 우산을 갖고 갈까 잠시 망설이다, 그냥 담대하게 내리는 비를 맞기로 한다.
달리기 전엔 몰랐다. 비가 포슬포슬하게 내릴 때 즈음 달리는 것이 가장 기분이 좋다는 걸. 비가 딱 안개처럼 내린다. 선물처럼.
집에서 30미터쯤만 달리면 운중천 산책로로 연결된다. 이 길로 쭉 따라 달리면 운중천을 기준으로 왼쪽 길과 오른쪽 길로 나뉜다. 보통은 물소리가 더 잘 들리는 냇가를 따라 달리지만, 오늘은 도로를 따라 달리는 오른쪽 길을 택한다. 경사도가 낮아 내딛는 발걸음이 부드럽다.
비 내리는 일요일 새벽, 소매 없는 러닝복을 입고, 비 맞으며 달리는 아줌마라니. 360도 반경 안에 사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지나다니는 차들이 몇 대 있다. 건널목에 멈춰 서니, 하필이면 곁에 버스가 서 있다. 모습이 흉해 시각적 스트레스가 될까 신경이 쓰인다.
나무가 빽빽한 산책로를 달려, 운중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넌다. 왕벚나무가 나오는 새로운 코스. 능수버들에게 팔을 뻗어 잎을 쓰다듬으며 길을 지난다. 그래도 소나무한테까지는 인사하고 와야지. 물을 잔뜩 머금은 소나무 잎을 손으로 어루만지면, 이태리 산 최고급 가죽 못지않게 부드럽다. 숨겨 둔 보물찾기 쪽지처럼, 나만 아는 은밀한 기쁨.
안개비 속을 달리는 건 역시 좋아. 가장 좋아하는 순간을 꼽는다면, 두 번째쯤 될 것이다. 빗줄기가 드세진다. 빗물이 앞을 가려, 얼굴을 훔쳐야 앞이 보인다. 마음이 바빠진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속도도 빨라진다. 저 멀리 건널목 파란 불이 25초를 나타내며 깜박거린다. 건널까, 말까.
포기할까 말까. 달릴 수 있지 않을까? 속도를 올려 본다. 25초, 24초, 23초, 15초, 더 실컷 내질러본다. 6초에 건널목에 다 달아, 가속도가 붙은 채 건널목을 건넜다. 5,4,3,2,1. 이쪽 편으로 건너 오니, 0초가 되었다. 신난다. 달리기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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