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어주는 것

새로 디자인한 화분에서 바람결에 따라 은은하게 들리는 종소리가 듣고 싶었다. 어떤 방법이 있을까. 갑자기 동대문 종합시장이 떠올랐다.

엄마 뒤꽁무니를 종종 쫒아 동대문 시장에 가면, 길 양쪽으로 나무판자에 둘둘 말린 천이 내 키보다 높이 쌓여 있었다. 엄마는 죽마에 올라탄 어릿광대처럼 성큼성큼 걸었고, 자칫 방심하면 놓치기 일쑤라 정신을 바짝 차리고 따라가야 했다. 엄마는 포목들 사이에 서 있는 사장님들을 향해 마치 암호문처럼 “경방 있어요?”를 물었다.

“엄마, 그게 뭐예요?”
“회사 이름. 경성방직”
“근데, 왜 그게 좋아요?”
“거기가 잘 만들어.”

한참을 발품 팔아 기어이 찾아낸 엄마에게선 광선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원단 가장자리엔 무늬가 없는 흰색 띠가 있고, ‘경방’이라고 한자와 한글이 번갈아 가며 쓰여 있었다. 어린 눈에도 경방은 괜찮아 보였다. 엄마는 민트 색 바탕에 큰 조개 그림이 그려진 경방 원단을 골라, 퍼프소매에, 360도 퍼지는 플레어스커트를 만들어 입었다.

재봉틀 하던 엄마 옆에 앉아, 가위와 실밥을 가지고 놀고, 단추를 달고, 쪽가위로 실밥을 자르기도 했다. 원기둥형 실패와 원추형 실패 사이에서 실 색깔과 단추 색깔을 맞추며 놀다 보면 어느새 해가 져 바탕색이 까매졌다. 색깔이 모두 흑백으로 보일 때 즈음되면, 엄마가 저녁을 먹으라 부르곤 했다.

엄마 곁에서 일본 패턴 책을 보며, 앞부분에 있는 컬러 사진을 보고, 보고, 또 보았다. 책 속 모델의 몸이 내 몸보다 작아지면서, 브렌따노와 언더우드의 흘러내리는 듯한 라운드 티셔츠가 대유행하면서, 일상에서 면 소재 빳빳한 옷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냥 가야겠다. 네비를 찍어 보니, 45분 정도 걸린다. 주차장 앞에서 한참을 기다렸다. 겨우 내 차례가 되어 진입해 보니, 엘리베이터 형 주차장이다. 아차, 이 주차장이 힘들었지! 뒤로 돌려 다시 가고 싶지만, 바로 뒤 기다리는 차들이 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SUV는 엘리베이터에 못 들어가니까, 아마도 밖에 세우라고 하시겠지? 하며 앞차를 보니 무려 승합차이다. 어쩔 수 없이 엘리베이터에 타야 하는 거구나. 반쯤 포기하는 심정이 된다. 겨드랑이에서 식은땀이 차올라 뚝뚝 떨어지는데, 이리 오라 손짓하는 안내요원의 표정은 아무렇지도 않다. 그분들의 경험을 믿는 수밖에.

벌써부터 센서는 삐삐삐 삑 경보음을 울려댄다. 마음을 급하게 하는 소리. 기계음을 애써 외면하고, 요원의 목소리에 집중한다. “오른쪽으로 핸들을 조금만 아주 조금만, 됐어요. 그대로 핸들 풀고 쭉 들어가세요.” 사이드 미러도 보지 않은 채, 지령에 집중한다.

“됐어요!”
“아휴, 너무 어려웠어요! 혼자서는 못 할 텐데,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창문을 올리는데, “아직 창문을 올리면 안 돼요. 거기 P버튼을 누르고 창문을 닫으세요.” 하신다. 씩씩하게, “네!”라고 대답하며, 벽과 차 사이의 공간을 보니 겨우 주먹 한 개만큼의 여백이 있다. 보기에도 아찔하다.

삐삐삐 삑 들리는 기계음을 믿었다면, 절대 엘리베이터식 주차장을 이용할 순 없을 것이다. 오랜 기간 쌓인, 여러 번의 경험이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 직관. 하지만, 아무리 바른 길을 제시한다 할지라도, 용기를 내 그를 믿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다.

나이키 러닝 앱에서 아이린 코치와 함께 Go Better 섹션을 달렸다. 에어 팟을 통해 코치 목소리가 들린다. “코치란, 여러분이 할 수 있다고 믿어 주는 사람이니까요.”라고. 안전요원을 100% 믿고 따르는 나를 만났다. 누군가를 완전하게 믿는 것. 나도 이젠 누군가를 할 수 있다고 믿어주는, 그런 코치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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