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핸 코로나로 스트레이트를 날리더니, 폭우로 라이트 훅을 날리고, 홍수로 레프트훅을, 태풍으로 어퍼컷을 날린다. 정신을 차릴 틈이 없는 2020년. 밤새 이렇게 비가 와도 괜찮을까 싶을 만큼 비가 왔고, 형광 오렌지 색 3M 귀마개로 귀를 꽁꽁 틀어막았어도 빗소리에 잠을 설쳤다. 범람한 섬진강 하류 사진을 보고 있으니, 마음에도 습이 올라 무거워진다. 마음에서 몸까지는 광속으로 움직이니, 바로 몸도 무겁다.
주말엔 모처럼 마음 놓고 달리는 날인데,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내리는 비는 내 계획을 작정하고 방해하는 모양새다. 뭔가 빼앗긴 기분. 하지만, 잠시 피해 있기로 한다. 맞서기보다, 유연하게.
쌓아둔 책을 꺼낸다. 무엇부터 읽을까. 하라 켄야의 『내일의 디자인』이 눈에 들어온다. 하라 켄야는 무인양품의 디자인 디렉터로, 여러 권의 저서를 남겼다. 『디자인의 디자인』, 『마카로니 구멍의 비밀』, 『포스터를 훔쳐라』, 『백』. 디자이너 고유한 시각과 프로젝트에 임하는 자세와 뒷 이야기들을 촘촘히 기록했다. 글도 간결하고, 명료해 읽기 쉽다.
『내일의 디자인』은 2014년 출간된 책이다. ‘경험의 디자인’이라는 표현이 가슴속을 후비고 든다. 얼마나 디테일하게 경험을 디자인했나. 혹시, 본질에만 충실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던 것은 아닌지. 어떤 서비스나 제품을 만나게 될 상대방 입장에서도 섬세하게 배려했는지 나에게 묻는다. 부끄러운 순간들이 두더지처럼 튀어나온다.
마음가짐은 어떻게든 그 사람의 말과 태도에 묻어난다. 도서관에서 체크무늬 슈트를 입은 남성이 계속 귀를 후벼 바지에 문지르는 것을 보았다. 처음엔 가려운가 보다 생각했지만, 그 행동은 계속 반복되었다. 오른쪽 귀에서 내용물이 나오지 않자, 이젠 왼쪽 귀를 후비기 시작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는 하이드를 알고 있을까?
우리의 뇌는 에너지를 많이 사용하는 기관이기 때문에, 정보는 무의식에서 먼저 처리하는 경향이 있다. 우린 늘 의식하고 있다 생각하지만, 사실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들이 더 많다. 그래서 아예 습관으로 만들어 두는 편이 낫다. 그래야, 의식하지 않아도 늘 같은 태도를 지닐 수 있다.
일에서도, 일상에서도 가다듬을 일들이 죽 떠오른다. 이럴 줄 알았다. 책 읽을 땐 항상 포스트잇과 메모패드, 2B 심을 끼운 9mm 샤프를 곁에 두고 읽는다. 떠오르는 생각들을 촘촘히 적어, 계획에 반영한다. 물론 100% 다 되진 않는다. 그래도, 하다 보면 점점 더 나아지는 건 분명하다.
내친김에 『윌리엄 모리슨 평전』을 꺼낸다. ‘르네상스적인 삶’이라는 글에, 국민대학교 금속공예과 전용일 교수님께서 박홍규 교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시라며, 그분이 쓰신 책 『윌리엄 모리슨 평전』을 추천하셨다. 절판되어 중고서점을 뒤져 구입했다.
윌리엄 모리슨은 19세기 후반의 인물로, 시인, 소설가, 극작가, 수필가, 번역가, 건축사 상가, 공예가, 디자이너, 정치가, 사회주의자, 사회개혁가, 낭만주의자, 생태주의자, 환경보호 운동가, 문화유산 보존운동가, 아나키스트, 유토피아 주의자, 정치평론가, 교육사상가 등으로 활동했던 르네상스적 인물이다. 1834년에 태어난 윌리엄 모리슨. 두 세기 전에 저렇게 넓은 영역의 업무가 가능했다는 게 놀랍다.
반쯤 읽었는데, 비가 그치는 듯하다. 단호하게 책을 덮고, 달려 나간다. 산책로엔 나처럼 타이밍을 보고 있던 동네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나의 왕벚나무는 수액과 먼지가 엉켜 있던 상처가 폭우에 깨끗하게 씻겼다. 소나무는 솔잎마다 물방울을 머금고 있다. 물살은 세차게 흘러 어지럽다. 까치가 풀숲에서 먹을 걸 찾는다. 벌레도 다 씻겨 내려갔나. 그리고 보니, 몸이 조금 말라 보인다. 힘들 땐 조금 마를 지라도, 우린 유연하게 견딜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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