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엔 수박이지. 8킬로그램 정도의 수박을 골라, 찌글찌글한 진초록 무늬를 따라 꽁지부터 꼭지까지 세로 결로 반을 가른다. 도마 위에 평평한 면을 엎고, 다시 반을 가르면 반달을 닮은 1/4쪽이 된다. 그 상태로 꽁지 쪽을 수직으로 문텅 자르고, 꼭지 쪽도 수직으로 뭉텅 자른 다음, 껍질을 베어 나간다. 동시에, 5리터짜리 노란 종량제 봉투에 담는다.
빨간 과육만 남으면, 가로로 4 등분하고, 그 폭만큼 깍둑썰기 한다. 그럼 한 입에 먹기 좋은 크기가 된다. 마땅한 통이 없어 손잡이가 위로 달린 2리터짜리 회색 통에 차곡차곡 담는다. 모양은 좀 덜 예쁘지만, 여름 냉장고 속에서 부피를 차지하지 않고 수납할 수 있다. 그럼 아들은 2리터짜리 한 통을 들고, 순식간에 먹어 치운다. 그 속도와 양을 보면 메뚜기가 떠오른다.
남편과 둘이 살 땐, 수박 한 통을 사면 다 먹지 못 해 버렸다. 수박 껍질 자르는 것도 일인데, 애써 자른 조각들을 종량제 봉투에 넣으면 속이 상하니, 점점 빈도수가 줄었다. 어떤 해엔 수박 한 번 먹지 못 하고 여름이 가거나, 복숭아 한 알 먹지 못 하고 가을이 되기도 했다. 그럼, 도대체 나는 뭐하느라 여름 과일 한쪽 먹지 못 하나, 하는 자괴감이 들며 슬펐다.
그 시기엔, 일하며, 아기 키우며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겨우 하나 키우면서도, 그마저도 시어머니께서 돌봐주시는 데에도 힘에 부쳐 몸이 비쩍 말랐다. 바람이 불면 이대로 날아가진 않을까 싶기도 했고, 부서져 가루가 되는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한 달에 한두 번 씩 수액 맞아가며 살았다. 늘 뭔가에 쫓기는 것 같았고, 기분은 비를 머금은 구름처럼 무거웠다.
사실 생각해 보면, 그때에도 힘들기만 했던 건 아니다. 아이가 태어나 자라는 것만으로도 큰 기쁨이 되었다. 아장아장 걸어 내 허벅지를 안으며 받침 없는 발음으로 “엄마, 사양해.”하며 얼굴을 비비던 그 날의 기억 같은 것. 열심히 일해 집도 마련했고, 살림살이도 조금씩 불어나는 재미도 있었다.
아이는 수박을 좋아한다. 그래서, 다시 자르기 시작했다. 이젠, 버리는 일은 거의 없다.
요즘 30대 동생들을 만날 일이 종종 있었다. 깍둑 썰기한 수박을 내놓으니 혼잣말처럼 올해 첫 수박이라 한다. 아니, 7월 말 8월 초인데... 구성원이 다른 만남인데, 두 번이나 그랬다. 아니, 이 동생들은 지금까지 뭘 하느라 수박 한 번 못 먹었나 싶어 안쓰럽다. 큰 접시에 2리터짜리 수박 한 통을 모두 쏟아부었다.
한편으론, 그렇게 몰입해 열정을 불태우며 일할 수 있는 동생들이 부럽다. 힘든 시기라도, 분명 좋은 점도 있을 것이다. 세상 모든 일 엔, 장점과 단점이 있으니까. 하지만, 폭풍우 한가운데 있을 땐 보이지 않는다. 그런 비바람이 몰아친 다음, 나무는 확실히 쑥 더 자라 있다.
뭘 잘못 먹었나, 어제저녁부터 속이 얹힌 듯 불편하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몸을 일으켜 세워 천천히 걸으며 생각한다. 너무 잘하려 하지 말라고. 인생은 뛰기도 걷기도 하며, 그냥 가는 것이라고. 어떻게 사람이 매번 100% 잘하겠어. 욕심부리지 말고, 늘 한결 같이 80~90% 정도로 해도 훌륭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