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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경 Sep 06. 2020

비눗방울처럼 여리고 사소한 도전

  어디선가 “자기 한계에 도전하라.” 는 말을 들으면 ‘아 그래, 열심히 한계에 도전해야지.’라 생각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떨 땐 ‘너나 하세요. 저는 지금도 최선을 다하고 있거든요?’라 혼잣말하거나,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한 번 돌려 시선을 한 번 마주치고 무심하게 앞을 다시 볼 때도 있었어요. 그런데, 그 ‘한계’가 제가 생각하듯 에베레스트 산 등정을 하거나, 마라톤을 완주하는 것 같은 그런 한계가 아닐 수도 있겠어요.

  오늘도 여느 날처럼 재미있고 유익한 달리기를 위해 운동화를 신고 달려 나갔습니다. 어제 많이 먹었고, 잠을 잘 못 잤고, 피로가 누적되었고, 아침엔 미세먼지도 좀 있고 해서 그런지 달리는데 몸이 물 먹은 스펀지처럼 묵직했습니다. 그런 날은 또 나름대로 달리거나 그것도 안 되면 그냥 걸으면 됩니다.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정도의 포지션으로 그냥 하는 것. 그럴 때 계속할 수 있습니다.

  달리는데, 냇가로 들어가는 길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곳은 운중천 하류로, 크고 작은 돌멩이들이 뒹굴고 있어 물살의 흐름이 느려지는 곳입니다. 냇가의 폭이 넓고 수심이 얕아요. 그렇잖아도 그 부근을 흐르는 물을 만져보고 싶었거든요. 신나게 계단을 내려갔습니다.

  물가로 가려면 좁은 계단을 한 번 더 내려가야 합니다. 그런데, 발길이 딱 멈춥니다. 풀숲이 계단을 덮고 있었거든요. 최근 운중천엔 뱀이 나타난다는 안내문을 보았고, 동네 단톡 방에서도 뱀 사진을 보았기 때문에 머릿속에 뱀 이미지가 말풍선처럼 그려집니다. 이 상황에서 뱀을 맞닥뜨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 무서워.’
‘그냥 갈까? 그래도 가보고 싶은데?’
‘어쩌지? 그냥 포기할까?’
‘그냥 가보자. 뱀이 없을 수도 있잖아.’
‘그냥 포기하자! 뱀이 있을 수도 있잖아.’

  한참을 망설였습니다. 보이지 않은 두려움에 용기를 내지 못하는 지금 이 순간. 이 한계를 넘어 볼 것인가, 그냥 갈 것인가. 이대로 포기하고 싶진 않습니다. 먼저 발길로 풀을 탁탁 차 뱀에게 인기척을 보냅니다. 또르르 귀뚜라미 소리도 숨 죽은 조용한 풀숲. 한 번 더 풀잎을 탁탁 차 봅니다. 나름대로 뱀이 없는 걸 확인하고, 에라 모르겠다, 발을 내디뎌 계단을 후다닥 뛰어 내려갑니다.

  물이 천천히 흐르는 하류엔 저 말고도 시간을 보내고 간 흔적이 있었습니다. 물가에 쪼그리고 앉아 흐르는 물속에 손을 넣어 봅니다. 손가락이 다 들여다 보이는 투명한 냇물. 강원도 산골에서 만났던 맑고 시원한 물입니다. 야무지게 연결한 징검다리도 보입니다. 물이 흐르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어쩐지 가슴이 후련해집니다. 올라오는 길엔 망설임 없이 계단을 디딥니다.

  에베레스트 산 등정이나 마라톤 풀코스 완주 같은 어마어마한 노력으로 도전하는 자기 한계도 있겠지만, 이렇게 냇가에 다가가는 데에도 망설이는 사소한 경우도 있습니다. 일상에서 만나는 ‘자기 한계’란 오히려 비눗방울처럼 여리고 사소한 게 아닐까요. 저는 풀숲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던 그 순간을 기억합니다.

  한 번도 하지 않은 일을 해 보는 도전. 그래서 얻어지는 건 비눗방울이 터질 때 정도의 개운 함이겠지만, 일탈의 해방감을 느끼기에 충분합니다. ‘자기 한계’라고 표현하니 어렵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마음속에서 나를 가로막는 어떤 소리에 저항하는 것이라 표현해 볼까요.

  돌아오는 길엔 솔잎 하나를 따 입안에 넣고 씹어 봅니다. 입안 가득 풍기는 솔잎의 향. 오늘 제 작고 사소한 도전을 축하하는 소나무의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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