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재경 Nov 04. 2021

그리움이 짙어질 때, 살구나무

반려식물 처방, 월간 샘터 기고글

글 정재경(식물에세이스트) | 그림 김예빈


  우리 집 정원은 앞집과 맞닿아 있었다. 주차장 경계석을 기준으로 반반씩 소유하고 있는 공동정원인 셈이었는데 앞집에서 바라보는 정원의 방향은 북쪽이고, 우리 집에서 보면 남쪽이었다. 동쪽에 위치한 보행자 도로 쪽 언덕은 잔디를 깔고 위로 삐쭉 자란 소나무가 3m 간격으로 심어져 있었다.

앞집 정원에는 사철나무와 철쭉, 그리고 연두색 잎부터 새빨간 잎까지 사계절의 변화를 색으로 보여주는 단풍나무도 있었다. 정원다운 정원이었다. 우리 마당엔 그저 들잔디만 있었다. 누군가의 취향이 반영됐을 테지만 이렇게 간소한 정원은 주로 예산이 부족해 준공 검사용으로 조성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잔디는 큰 기쁨을 주었다. 잔디 잎새가 ‘개구쟁이 푸무클’의 머리카락처럼 들쭉날쭉 자라면 잔디 깎는 기계로 하단부를 4~5cm 정도 남기고 잘라주었다. 칼날에 잔머리가 잘려 나가는 두둑두둑 소리와 함께 싱그러운 풀 향이 바람을 타고 코끝에 밀려들어왔다. 그 풀 냄새가 참 좋았다. 잔디 깎는 날엔 창문을 활짝 열고 집안 가득 잔디 향을 채워 넣었다. 창 앞에 서서 코를 킁킁 거리며 향기를 들이마셨다. 세포 끝까지 저장해 두고 싶은 향. 가능하다면 그 공기를 햇빛에 말려 생각날 때마다 우려 마시고 싶었다.


  남편은 창문 밖으로 보이는 마당 조경을 영 못마땅해 했다. 정원 공사를 다시 하자고 내게 여러번 말했고, 굳이 이 일에 비용과 시간을 투입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못 들은 척 외면했다. 앞집에서 정원 리모델링을 준비한다는 걸 알게 된 남편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더욱 집요하게 물었다. 내키지 않았지만 큰 나무 한 그루 심는 조건으로 마지못해 승낙했다. 초화나 야생화는 그때그때 마음에 드는 걸 반영할 수 있지만 나무는 한 번 심으면 다시 뽑고 심기 어렵다. 그래서 나무만큼은 꼭 내 마음에 드는 종으로 고르고 싶었다.


  조경 업체에선 계수나무를 권했다. 비가 오면 나무에서 초콜릿 향이 풍기고 잎의 모양이 하트라 식재하는 곳마다 반응이 좋았다고 했다. 그 나무를 심을까, 옛날 궁궐이나 양반 댁에 많이 심었던 회화나무를 심을까, 열매를 따 먹을 수 있는 사과나무를 심을까 고민되었다. 나무 한 그루에서 여러 꿈이 가지처럼 펼쳐졌다. 마음 같아선 대추나무도, 감나무도, 배나무도 심고 싶었지만 우리에겐 딱 한 그루 심을 만큼의 공간만 허락된 상황이었다


  나무를 직접 보고 결정하기로 했다. 살아 있는 생명체는 고유의 주파수를 내뿜는다. 그게 내가 가진 에너지와 맞는지, 그렇지 않은지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어느 주말, 조경 업체의 농장에 들러 나무를 보았다. 계수나무는 잎의 색이 푸른 기가 도는 초록이었다. 어쩐지 차갑게 느껴지며 몸서리가 쳐졌다. 알프스 사과나무도 잎 모양이 귀여웠지만 사과나무는 집에 심지 않는다고 한다. 우린 뜻밖에도 처음 보는 어떤 나무에서 좋은 기운을 느꼈다. 이름을 물으니 살구나무라 했다. 살, 구, 나, 무!

월간 샘터 5월호, 글 정재경 그림 김예빈


  마침 박완서 선생의 산문집 《호미》를 읽으며 살구나무를 키우는 작가가 부러웠던 참이었다. 가지마다 탐스러운 분홍꽃을 팡팡 틔워 봄을 알리고 여름엔 열매를 맺어 떨어뜨리는 살구나무. 선생은 그 살구를 주워 잼을 만들어 주변 지인들과 나누었다. 그 맛과 향이 궁금해 발을 동동 구를 지경이었다. 살아 계시다면 대문 앞에서 하루 종일 기다리며 한 입만 맛보게 해 달라 떼썼을지도 모른다. 그 살구나무 모습을 김점선 작가의 자서전 《점선뎐》에서 사진으로 발견했을 때의 반가움은 35년 만에 옛날 집을 찾았을 때와 같았다. 사전 지식 없이 오로지 내 무의식이 직감적으로 살구나무를 골라냈다는 사실이 뛸 듯이 기뻤다. 농장의 다른 나무는 이제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우린 남쪽 창가 앞에 살구나무를 심었다. 늦여름에 옮겨 심고 그 다음 해부터 열매가 맺길 기다렸지만 나무는 우리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속도를 지켰다. 옮긴 다음 해엔 몸살을 앓았는지 꽃을 피우는 둥 마는 둥 했고, 겨우 세 알의 열매만 보여주었다. “애걔, 겨우 이 만큼이야?”란 소리가 절로 나왔지만 기다리는 것 말곤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다음 해엔 꽃다운 꽃을 피웠고 열매를 맺었다. 우리 살구나무가 낳은 살구는 어딘가 귀하게 느껴져 엄지, 검지, 중지 세 손가락으로 아기 손을 잡듯 살살 잡아 양푼에 주워 담았다. 씨를 제거하고 에리스리톨과 설탕, 소금을 조금 넣고 졸여 살구 잼을 만들었다. 100ml 유리병을 끓는 물에 소독해 나누어 담으니 열 병이나 나왔다. 나처럼 귀하게 여겨줄 지인께 선물해 나누어 먹었다.


  올봄에도 살구나무는 풍성하게 꽃을 피웠다. 하지만 올해에는 살구를 맛볼 수 없다. 남편과 나는 사과나무, 감나무, 대추나무도 심을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을 준비하며 잠시 살구나무를 떠나있기로 했다. 잠깐의 이별이 영원한 헤어짐이 될 수도 있을까? 바람에 살랑거리는 살구나무 잎을 보며 헤어짐을 상상하다 아이처럼 울음보를 터뜨렸다. 양손으로 눈물을 훔치며 엉엉 울었다. 그건 안 되겠다 싶었다.


  이사 나오며 살구나무를 안고 볼을 부비며 다시 만날 때까지 잘 있으라고 우리만의 인사를 나누었다. 살구나무는 늠름하게 서서 나를 그림자로 안아 주었다. 잎사귀를 흔들며 잘 다녀오라 말했다. 줄기에 귀를 대고 수액이 흐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 정도 이별의 시간은 견딜만할 거라고, 하고 싶은 일 실컷 하다 돌아오라고, 다 잘될 거라고 나를 토닥이는 소리였다.


살구나무 관리법
· 꽃 피기 전 가장귀를 잘라준다.
· 한 달에 한 번 정도 방제한다.
· 뿌리가 얕게 자라므로 나무 근처를 밟지 않도록 주의한다



2021년 5월 <월간샘터> '반려식물 처방'에 쓴 글입니다. 식물과 함께 하는 삶이 마음을 채워줄 거라 믿어요. 식물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고, 그 이야기를 씁니다. 



작가의 이전글 200자 원고지 3,650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