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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경 Sep 30. 2021

200자 원고지 3,650장

매일 아침 에세이 한 편, 일간 정재경 프로젝트 1년

  프로라면 디카프리오나 고현정처럼 입금되면 일을 시작하는 거라 생각했다. 프로 작가도 입금이 되면 글을 쓰는 거라 정의했다. 문제는 입금이 될 일이 많지 않는다는 것. 베스트셀러 작가도 아니고, 신춘문예 등단한 것도 아닌, 이제 겨우 포트폴리오를 쌓아가기 시작하는 작가에게 출간 계약서가 쇄도할 리 없다. '프로'라는 말은 그 일로 생계를 해결할 수 있는 걸 의미한다. 작가로서는 아직 프로가 아닌 셈이다. 그럼 가끔씩 글을 써도 실력이 나아질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무슨 일이든 매일, 열심히 해야 실력이 자란다. 어떤 경우는 매일 해도 실력이 자라지 않을 수 있다. 화분에 싹만 틔우고 자라지 않는 식물이 얼마나 많은 지! 혹시 나도 그러면 어쩌나 걱정스러웠다. 조금이라도 나아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열심히' '매일' '꾸준히' 해야 한다. 그 '열심히'의 기준이라는 건 도저히 못 할 것 같아 심장에 압박이 느껴지는 어떤 일을, 체력의 한계가 느껴질 만큼 도전할 때를 기준으로 한다.


  동네 산책로를 달리며 느꼈다. 매일 가볍게 달리면 계속 가볍게 달릴 수만 있다. 실력이 나아지지 않는다. 조금 더 빠른 속도로 달리고 싶다면 무릎과 다리의 근력 운동도 하고, 고관절 강화 운동도 하고, 체중도 가볍게 유지해야 한다. 마음이 편하고 신경 쓸 일이 없을 때엔 기록도 더 좋아진다. 그런데 프로 선수가 될 만큼 잘 달리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달리기의 포지션은 글 쓰기에 도움이 될 정도의 비중이면 족하다. 세상 모든 일에 '열심히' 시간과 에너지를 쓸 순 없다. '잘하고 싶은 일'을 '매일매일' '열심히' 하는 쪽으로 기운다.


  글을 잘 쓰고 싶으면 매일매일 열심히 글을 써야 할 것이다. 과연 내가 매일 쓸 수 있을까. 마음 저 깊은 곳에선 늘 그렇게 스스로를 믿지 못했다. 자기부정. 나를 믿을 수 없는 나는 매일 마감을 두기로 했다. 매일 200자 원고지 10장을 써 보자. 읽어 주실 독자를 모셔보자! 그렇게 작년 10월 1일 '일간 정재경'을 시작했다.

  처음엔 약속을 지키지 못할까 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글을 미리 써 두고 잠들기도 했고, 새벽에 일어나 글을 마무리할 때도 있었다. 하루 종일 그 생각을 해도 결국 아무 생각도 나지 않은 날엔 새하얀 사절 도화지를 보는 것처럼 두려움이 밀려왔다. 약속을 했으니 쓸 수밖에 없다. 어떻게든 쓴다. 매일 100%의 완성도를 바라보며 글을 썼지만 솔직하게 마음에 드는 날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계속하게 된다. 불완전함의 긍정 효과랄까.  


  일상도 재편하게 되었다. 잘하고 싶은 일이 있으니 다른 일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산책을 하거나 등산, 달리기 같이 자연을 더 가까이에서 관찰하고, 책을 더 많이 읽으며, 에너지를 채우는 일에 시간을 더 사용하게 되었다. 일상도 간소하게 가다듬었다. 밥 먹는 데 사용하는 시간도 줄였다.


  새롭게 알게 된 점은 '글을 쓴다'는 것은 뇌의 활동과 육체노동이 결합하는 형태라는 것. 글을 쓰는 행위 자체는 책상 앞에서 이루어지지만 글감을 채집하는 것은 24시간 아무 때나 할 수 있었다. 자다가 떠오르는 생각도 있고, 달리며 생각나는 일도 있다. 심장이 빨리 뛸 때, 졸릴 때, 설거지할 때, 샤워할 때,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을 흐르고 그걸 바로바로 기록해두면 쓰기 수월했다. 머리와 몸 사용하는 방법을 새로 익히고 있다.


  그렇게 훈련하는 동안 속도도 조금씩 빨라졌다. 처음엔 2시간 가까이 걸렸던 원고지 10장이 이젠  시간  정도 걸린다. 원고 청탁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 가장 긍정적인 변화는 스스로를 믿게 되었다는 . 이제 잠을 설치지 않는다. 스스로 어떻게든   거라는  알고 있다. 그래도 혹시 모를 인생사를 위해 여유분의 원고를 미리  두고 싶은데 아직 요원하다. 스누피의 아버지 챨스 M. 슐츠는 50 년의 연재 동안   번도 펑크를 내지 않았는데,  비밀은   분의 여유 원고에 있었다. 약간의 여유분을 비축해 고 싶다.


   오늘로 1년이 되었다. 이메일을 열어 읽어 주시는 분들 덕분에 365일 원고지 10장을 써 3,650장의 원고가 모였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3,650장은 가을 낙엽처럼 허공으로 날아가 부스러졌을 것이다. 식물은 서로에게 좋은 물질을 뿜어 주며 함께 성장한다. 우리도 성장하고 함께 있다고 믿는다.


  10월부터는 일주일에 한 편씩 소설을 보내드리고 싶다. 초고는 벌써 써 두었지만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 용기를 내 한 자 씩 한 문장 씩 실타래를 풀어 보려 한다. 무엇이든 시작은 두렵다. 그런데 하다 보면 나아진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지금 당장 시작하자.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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