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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의 촌티 굿바이! 그 증거를 댑니다

촌놈이었을 때가 그립습니다만

by 박민우

1. 비행기 창가 자리 됐고요. 복도석으로 주세요


창가 풍경도 처음이나 놀랍지 자기 바빠요. 화장실 가기 편한 복도석이 최고죠. 비행기 뜨면, 빈자리로 재빨리 옮기기도 좋고요. 옆자리 텅텅 비면, 비즈니스석 안 부러운 이코노미석이니까요. 인심이 흉흉해져서, 자리 못 옮기게 하는 항공사가 많아졌더라고요. 이코노미석 안에 또 등급을 나누기도 하고요(에어 아시아). 치사해서 이제는 남의 자리 안 탐하고, 내 자리에서 붙박이로 얌전히 있다가 내려요. 기내식도 귀찮아요. 귀찮다고 안 먹지는 않고요. 어떤 기내식이 나올까? 종이 상자를 열 때의 두근거림도 옛날 얘기죠. 돌이켜 보면 기억에 남을 만큼 맛있었던 기내식도 없었어요. 카타르 항공 정도? 더럽게 맛없었던 적은 있었네요. 중국 남방 항공.


2. 여행 짐이 적을수록, 촌놈 아닙니다. 맞죠?


저가 항공은 짐도 다 돈이죠. 태국에서 베트남이나 캄보디아 잠시 다녀올 때는 노트북 배낭에 속옷 몇 개만 넣어서 다녀와요. 다른 사람들 짐 기다리면서,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거북이처럼 목 빼고 있을 때, 당당하게 입국 수속을 밟죠. 호텔에서 짐 들어주겠다고 하면 어깨만 들썩. 노땡큐. 들어줄 짐이 있어야 말이죠.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으로 호텔 체크인까지 해요. 누가 보면 집 앞 마트에 라면 사러 간 줄 알겠어요. 정장에, 구두까지 챙겨 신고 체크인하면 뭐다? 출장 온 거죠. 세련됨은 당당함 아니겠습니까? 집에서 입던 옷 그대로, 출국하고 호텔까지 골인하면 진정한 힙스터 완성 아니겠습니까?


3. 쩝쩝 소리 안 내고도, 밥 잘 먹습니다. 오, 멋있어. 오, 섹시해


쩝쩝대지 말라는 소리 참 듣기 싫더라고요. 내 맘 아닌가요? 한국에선 단 한 번도 지적받은 일 없었어요. 저보다 여행 좀 많이 했다고, 친구가 잔소리를 하는 거예요. 쩝쩝 소리가 도대체 왜 문제란 걸까요? 입술을 접착제로 붙인 것처럼 꼭 다물고 어떻게 먹냐고요? 먹다가 질식사할 일 있나요? 나름 노력하다가 방심하면 또 쩝쩝대요. 친구 놈이 귀신처럼 지적질을 하는 거예요. 밥 숟가락 던지면서 싸울 뻔했다니까요. 해외에만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길들여지더군요. 이제는 쩝쩝대는 사람들을 보면, 아, 안 그랬으면 좋겠다. 옛날의 저를 보는 것 같아서 괴로워요. 이제 저는 쩝쩝 소리 안 내면서 얼마든지 잘 먹어요. 콧구멍으로 들숨 날숨 적절히 안배해 가면서요. 한국 사람들 면치기가 서커스처럼 신기해요. 그 뜨거운 면발을 어찌 그리 힘차게 빨아들이나요?


4. 저 팁 좀 주는 사람입니다만. 에헴


내 돈 주고 서비스 이용하는데, 왜 팁까지 더 줘야 되나요? 억울할 때가 많았죠. 주변 사람 닮아간다고, 왜 제 주위엔 정의롭고, 자비롭고, 손 큰 친구들만 있을까요? 태국에서 마사지받으면 팁은 무조건 백 밧(4천 원)이에요. 태국에선 적정 팁이란 게 없어요. 하지만 10%, 15%를 팁으로 주면 뒤에서 흉보더라고요. 그걸 목격하고 나서는, 그냥 백 밧을 기본으로 챙겨줘요. 진짜 저렴한 마사지 집은 두 시간에 200밧이에요. 백 밧 팁으로 주는 거 너무 크게 느껴지지 않나요? 백 밧 줘도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단 한 번도 본 적 없으니 그 정도 팁을 주는 게 맞나 봐요. 호텔 체크 아웃 안 하더라도, 청소해주는 분을 위해 베개에 2,3 달러는 놓고 나와요. 미국에선 5달러(하아, 제가 청소하는 분들보다 가난할 테지만) 놓고 나오고요. 팁도 습관이더라고요. 팁 아낀다고 제 삶이 풍족해지는 것도 아니에요. 순간적으로 아깝다는 생각이 들뿐이죠.


5. 메뉴판을 보면서 당황하지 않아요. 멋짐 폭발


좋은 식당에 가면 메뉴판 읽는 것도 쉽지 않죠. 도대체 뭘 골라야 할까요? 샐러드에 수프, 전채 요리, 메인 디시, 후식까지. 뭘 알아야 주문도 하죠. 웨이터와 눈을 마주치고, 당당하게 말해요. 추천해 주세요. 배가 불러서 샐러드와 전채 요리는 뺄게요(돈이 없어요), 음식은 조리되는 대로 그냥 가져오세요(뜨거운 게 최고). 이런 대사들이 척척 나오면 촌놈 아닌 거죠? 메뉴 설명 ㅂㅂ못 알아듣겠으면 천천히 설명해 달라고 해요. 가끔 테이블 매너 헷갈리면, 천천히 먹어요. 샐러드 나이프로 스테이크 좀 썰면 어때요? 천천히, 대화가 먼저인 듯 천천히 먹으면 알아서 뉴요커라고 오해해 줄 거예요. 밥보다 대화가 중요한, 멋짐 폭발 예술가 같으니라고. 사람들이 막 반하고 그러면, 활짝 웃으면서 마음만 주지 마세요. 촌스럽게 허겁지겁 오는 호감 다 받아먹으면 아니 되옵니다.


6. 어디서 눈을 그렇게 빤히 쳐다봐? 그게 맞는 거예요


외국 친구들과 대화를 할 때는 눈동자에 집중해야죠. 시선 자꾸 피하면, 숨기는 거 있나? 이 자리가 불편한가? 오해 사기 딱 좋아요. 그러니까 이글이글 상대방 눈동자를 노려봐 주세요. 저는 눈까지 작아서, 뚫어지게 쳐다봐도 몰라 주더라고요. 눈 좀 떠. 인종 차별적 농담엔 단호하게, 네 코는 알래스카 빙하처럼 뾰족하구나. 빙하는 녹을까 걱정인데, 너는 자꾸 커지네. 평화롭게 맞받아쳐야죠. 이런 농담은 물론 친한 친구들끼리만. 해외에서 칼부림당하고 싶으신 건 아니죠? 자존감의 가치를 굉장히 중요시해요. 당당하고, 외향적이면 가산점 듬뿍 받아요. 영어가 서툴다는 게 단점이 아니에요. 나 영어 더럽게 못한다. 내가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의 영어를 구사하는 언어 천재를 만나고 싶다. 이렇게 너스레를 떨면, 오히려 재밌다며 호감 획득할 수도 있어요.


7. 남의 나라 스타벅스에서 노트북을 툭탁거릴 때


하는 거라곤 드라마 보기, 페이스북 댓글 달기지만 그걸 남의 나라 스타벅스에서 합니다. 제가요. 텀블러도 필수템이죠. 내 소중한 텀블러에, 카페 라테를 담아요. 미국이라면 우유 대신 아몬드 밀크로 바꿔 달라고 하고요. 시선은 자기 노트북에 고정시켜야 해요. 절대로 흘깃대서는 안 돼요. 무심하고, 귀찮다는 표정을 꼭 지어 줘야 해요. 페이스북에 댓글 달 때도, 고뇌하는 표정 잊지 마시고요. 자의식 과잉 아니냐고요? 누가 당신에게 관심이나 있겠냐고요? 포인트 제대로 잡으시네요. 자의식 과잉이 좀 덜 쓸쓸해요. 홀로 떠도는 여행자에게, 그런 망상은 위로가 돼요. 너희들도 사실은 외롭지? 집중하는 척하는 거지? 그런 상상은, 섬처럼 뿔뿔이 흩어진 이들을 희미하게 연결해주는 것만 같아요. 눈치 안 보고 노트북 뚝딱일 수 있는 커피 프랜차이즈는 스벅이 최고예요. 아직까지는요.


PS 매일 글을 씁니다. 2020년이 2주 남았어요. 2주나 남았어요. 새롭게 또 365일이 더 생길 거고요. 생각 나름이겠죠. 2020년을 거의 쓴 게 아니라, 소중하게 잘 쓸 날들만 남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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