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이라고 하면 누구보다 이를 갈았던 사람이 저예요. 십 년도 더 되긴 했지만, 여전히 이가 갈려요. 구멍가게에선 잔돈을 아예 안 거슬러 주더군요. 표정도 없어요. 뭘 거지처럼 얼쩡대? 어서 꺼지지 않고. 딱 이 표정으로요. 여행사에서 기차표를 샀더니, 정가의 딱 두 배를 받더군요. 과일을 사건, 물건을 사건 가격부터 물어야 해요. 대충 이 정도 하겠지. 봉지에 담고 얼마냐고 하면, 덤터기 쓰기 딱 좋아요. 아무말도 안 했는데, 쌀국수에 국물을 더 부어줘서 감격했더니 국물 값을 더 내놓으라더군요. 현지인한테 천 원에 팔면, 외국인한테는 이천 원에 팔아요. 왜 그러냐고 따지면, 네가 잘못 봤다. 원래 이천 원 맞다. 현지인들도 한패가 되어서는 우리도 이천 원 냈다. 이런 식이에요. 사람 환장하죠. 중국에서 베트남으로 넘어온 거였는데, 중국이 너무나 그립더군요. 중국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일들이었어요. 중국에 사기꾼 넘친다고들 하는데, 막상 택시를 타도, 물건을 사도 눈알 굴리면서 바가지 씌우는 경우가 별로 없었어요. 베트남은 운이 좋아야 정직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정도였죠. 십 년 전에는 정말 그랬어요.
베트남을 방문하기 전까지, 베트남에 대한 기대가 컸었거든요. 세계 최고의 강대국 중국, 프랑스, 미국과 맞짱 떠서, 끝내 이긴 나라가 베트남이에요. 죽으면 죽었지, 항복을 모르는 나라예요. 그런 나라가 공산주의에서 자본주의로 탈바꿈한다면, 중국이 문제겠어요? 유태인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똑똑하고, 근성 있는 민족이 돈맛을 알면, 그 발전 속도가 얼마나 대단할까요? 지금까지 성적표만 봐서는 제 기대치에는 못 미쳐요. 중국은커녕 동남아시아에서도 태국이나 말레이시아에 밀리고 있으니까요. 속도가 더딜 뿐이지, 앞 일은 또 모르는 거죠. 지금 베트남의 성장 속도는 이웃 나라들보다 확실히 빨라지고 있어요.
많이 기대했던 나라여서, 실망이 더 컸어요.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사기꾼들 천지인 쓰레기 나라였죠. 그동안 우리가 외국 놈들에게 받은 피해가 얼만데, 이 정도 사기도 못 치냐? 어린 식이니, 정이 안 떨어질 수가 없죠. 베트남 쪽으로는 오줌도 안 누겠다. 치를 떨면서, 베트남 여행을 끝냈어요. 태국 방콕에 머물다 보니까, 어쩔 수 없이 가게 되더라고요. 비자 연장을 하기 딱 좋은 나라거든요. 관광 비자 90일이 만료되기 전에, 주변국을 다녀와야 하는데, 물가 싸고, 음식 맛있고, 비행기편도 저렴한, 베트남만 한 나라가 또 없더라고요. 그래서 몇 번 다녀왔는데 드라마틱하게 바뀌었더군요. 바가지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체감상 90% 이상 줄었어요. 아주아주 상식적인 세상이 되었더라고요. 한국인이라고 하면, 버선발로 반기더군요. 미국도, 프랑스도, 일본도 아니에요. 한국이 최고래요. 한국 사람, 한국 물건이 베트남에선 그냥 1등이에요. 동남아시아에 한류가 뜨거운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베트남이 유독 뜨겁더라고요. 정말 놀랐어요.
나의 사랑 달랏
'달랏'은 저에겐 역대급 여행지예요. 태국에 치앙마이가 있다면, 베트남엔 달랏이 있더라고요. 꽃과 카페의 도시예요. 깨끗한 산의 도시이기도 하죠. 오토바이 타고, 이름난 카페만 다녀도 후회하실 일 없어요. 여기가 천국이다. 꽃과 열대 과일이 만발한 정원을 거닐면서, 베트남 커피 한 잔 마셔 보세요. 그런 행복감은, 어디서나 느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물가도 관광지 치고는 상당히 저렴해요. 돈 걱정 없이 신나게 먹고, 마실 수 있는 도시이기도 하죠. 베트남 사람이 운영하는 Fungi Chingu라는 한식당이 있어요. 외국에서 한식 비싸잖아요. 여기는 저렴해요. 한인이 아니라, 현지인이 하는 거거든요. 물냉면을 시켰는데, 제대로 된 육수인 거예요. 이런 육수를 외국인이 어떻게 내지? 냉면 전문점도 아니고, 수십 가지 메뉴가 있는 식당 냉면 육수가 어찌나 완벽하던지요. 대학교 후배가 하노이의 한 대학교 교수인데, 스승을 부모님 이상으로 섬기더군요. 베트남은 돈만 밝히는 짐승이 첫인상이었다면, 두 번째 인상은 꼰대스럽기는 해도 동남아시아 유일의 유교 국가답다. 서열을 따지고, 예의도 확실히 챙기는 나라구나. 이런 인상을 받았어요.
어허, 그런데 코로나가 발발하면서, 한국은 또 상처를 받아요. 그래요. 큰 병 앞에 장사 없다고, 두려웠겠죠. 그래도 최소한의 예의는 보였어야 했어요. 미리 양해도 안 구하고, 이미 뜬 아시아나 비행기를 돌려보내죠. 한국 감독이 국가대표라고, 베트남 축구를 밤새 응원했던 한국인들은 입 안이 써요. 다낭을 국내 여행지보다 더 좋아했던, 일방적 사랑이 무안해요. 하, 이런 나라였구나. 의리 빼면 시체. 기분파 한국인은 사실 이때 오만정이 다 떨어져요.
물은 이미 엎질러졌어요. 베트남은 노력을 해야죠. 국가대 국가는 어린아이 놀이가 아니니까요. 절차와 경우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야죠. 베트남이 밉다, 밉다 해도, 코로나가 끝나면 여행 수요는 다시 회복될 거예요. 아예 그 맛을 모른다면 모를까, 이미 베트남의 매력을 너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으니까요. 우리 역시 빚이 있잖아요. 베트남 전쟁 때 무고한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요. 우리나라 군인은 미국 편에서, 베트남 사람들을 피눈물 나게 했잖아요. 한 번쯤은 기회를 줘야죠. 어쩌면 우리랑 굉장히 닮은 나라예요. 베트남 건국의 아버지 호찌민이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그렇게 감명 깊게 읽었다네요. 지금의 베트남 정신에는, 어쩌면 한국보다 더 한국적인 정서가 흐르고 있는지도 몰라요. 베트남과 한국은 영혼의 쌍둥이처럼 닮은 부분이 많아요. 이렇게 삐끗하는 순간들도 있어야죠. 더 깊은 관계로 가는 지렛대 역할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두 나라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죠. 주변국들과의 관계만큼이나, 저는 한국과 베트남의 관계가 참으로 궁금합니다. 이렇게 서서히 멀어지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랍니다.
PS 매일 글을 씁니다. 아주 작고 작은 것들이 소중합니다. 그런 것들을 놓치지 않는 방법이 있을까? 글을 쓰는 일은, 사금을 캐는 거와 같아요. 뜰채로 거르고, 걸러서 걸러지는 아주 작은 금가루가 글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 제 글이 금이라는 건 아니고요. 그런 글이 될 때까지 열심히 쓰겠습니다. 뜰 채로 열심히 뜨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