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번쩍. 4시 59분. 다섯 시에 알람을 맞춰놨다. 1분 전에 깼다. 몸이 성실한 건지, 불안에 찌들어서인지. 4시 59분에 눈이 떠지다니... 나는 인간 알람. 최근 일주일 최고의 잠이다. 역류성 식도염 통증 없이 자는 걸 해냈다. 대부분에게 당연한 게, 내게 당연하지 않다. 가까스로 평균의 잠을 이루었다. 뛰쳐나가서 보험 CF에 나오는 사람처럼 환하게 웃고 싶다. 감사하는 법을 알고 있으니, 더 괴롭히지 마시오. 나를 지배했던 고통에게 아양 떨고 싶다. 밤에 가려워서 지르텍을 한 알 먹은 건 불만이다. 식도염 때문일까? 봄 알레르기 때문일까? 봄마다 가려웠던 것도 아니고, 왜 2019년만 열심히 긁어대는 걸까? 의심이 시작되면, 내 몸은 늪이 된다. 곧 숨도 못 쉬게 된다. 죽게 된다. 지독하게 천천히 빨려 들어가니까, 예민하게 관찰해야 한다. 어떻게든 빠져나갈 궁리를 해야 한다. 늪이니까 늘 걱정해야 하고, 걱정은 바람직한 긴장감이다. 아프리카에서 항문으로 물을 먹던 초식동물이 떠오른다. 언제 물어뜯길 줄 몰라 물도 입으로 못 마신다. 항문으로 찔끔찔끔, 눈은 초롱초롱. 초롱초롱이 아니라 바들바들. 경련으로 늘 진동하는 안쓰러운 생명체. 몸에서 자유로워지려면 늘 죽을 준비를 해야 할까? 더 건강해져야 할까? 어떤 때는 몸뚱이가 답답하고, 어떤 때는 신기하다. 아니 몸뚱이와 동거하는 의식, 혹은 영혼이 신기하다. 어찌 이렇게 몸에 잘도 붙어 있을까? 하루아침에 사라질 법도 한데, 꼭 붙어있다. 매일 반복되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할 뿐이다. 신기하고, 기특하다. 영혼은 딱히 갈 곳도 없다. 그래서 붙어 있다. 자유일까? 감옥일까? 박민우에 꼭 달라붙은 영혼아, 너는 그래도 복 받은 줄 알아야지. 내가 너를 데리고 코카서스 3국으로 갈 거야. 네가 닦달을 해서, 내가 떠돌며 사는 거냐? 그렇다면 내 건강도 책임져야지. 혹시 코카커스 3국이 음이온으로 꽉꽉 채워진, 어디든 삼림욕인 지상 수목원인 거야? 온천에 몸 담그면, 가려움증은 그냥 사라지는?
방콕 맛집 책이 나온다. 못 참고 편집장에게 물었다. 이제 막 인쇄소를 빠져나왔다고 한다. 떠나기 전에 손에 쥘 수 있게 됐다. 원래는 책 들고 여기저기 인사드릴 참이었다. 사인회도 하고, 들썩들썩해야 책이 나간다. 얼굴을 보이면 그나마 책이 움직인다. 나는 코카서스로 떠나야 한다.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멀리서 내 책이 얼마나 팔리나 무기력하게 바라봐야 한다. 이 책은 백만 부가 팔릴 책이다. 그러니 나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확신은 기적을 만든다. 똑 부러지는 확신은 아니지만, 그래서 내 확신은 형편없지만, 엉성하고, 부족한 확신도 안 하는 것보다 나을 테니, 내 책은 백만 부가 팔릴 것이다. 내 수중에 억대의 돈이 생기게 된다. 코카서스 3국에서 일단 이탈리아 아말피 해변으로 넘어간다. 한 달을 더 묵는다. 월세 3,4백만 원짜리 소박한 방을 빌려서 매일 와인 반 병에 새우 듬뿍 감바스를 해 먹는다. 요가 학원을 끊고, 그물 침대도 하나 들여놓는다. 노인들과 섞여서 카드게임도 하고, 주거래 단골 빵집도 한두 개 뚫어놓는다. 백만 부가 팔리면 인생이 갑자기 너무 소중해져서, 비싼 병원에서 건강검진을 풀세트로 다시 하고, 욕심이 화를 부르니까 안 아까울 만큼 기부도 한다. 내 책은 백만 부 팔린다. 팔리고야 말 것이다.
어머니가 열심히 화투패를 맞추신다. 나는 규칙도 모른다. 어머니가 깜빡깜빡 흐릿한 눈으로 화투패를 맞추신다. 어머니의 치매 예방 운동이다. 어머니, 아버지는 아파도 당장 달려올 슈퍼맨 아들이 없다. 한 명은 아르헨티나에 살고, 한 명은 떠돈다. 기억이 깜빡깜빡, 하루가 다르게 멍해지는 어머니는 삼십 분 이상 공들여 화투패를 맞추신다. 당신의 몸보다, 당신의 몸 때문에 아들의 여행이 끝날까 봐, 늙어가는 뇌를 어떻게든 붙잡아 둔다. 내 배 아파서 낳은 새끼가, 나보다 더 크고, 내 전부보다 더 전부다. 말도 안 되는 사랑이다. 백만 부가 팔리면 어머니, 아버지와 터키 카파도키아에서 열기구를 타야겠다. 어이없는 장관에 입이 안 다물어지실 테지. 놀랍고, 두려운 풍경이 화투 패보다 열 배는 더 좋은 치매약이다. 이 몸뚱이에 꼭 붙어있기를 잘했어. 딱히 갈 곳도 없었던 영혼도 주인 잘 만나, 열기구에서 덩실덩실. 늘 날 수 있었던 영혼은 날지 않아도, 날게 되는 호사를 누린다. 영혼도, 몸뚱이도 그저 기쁜 순간이 된다. 그러니까 이 책은 백만 부 팔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