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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인상이 실망스러웠던 도시들

첫인상이 실망스럽다고만 했습니다만

by 박민우

어떤 여행지든 누구나 다 좋아할 수는 없죠. 그래서 여행이 더 짜릿한 거고요. 저 사람은 싫다는데, 나한테는 최고일 수도 있는 거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비행기 값과 시간이란 판돈을 걸고, 여행이란 도박을 해요. 나와의 합이 맞는 곳일까? 그걸 실험해 보는 거죠. 내 판돈 돌려줘. 첫인상이 영 아니어서, 돈 날렸다고 생각했던 곳들은 이런 곳이었어요.


1. 의외로 방콕, 에게게 이게 다야?

네, 저는 지금 태국 방콕에서 12년째 머물고 있어요. 하지만 첫인상은 진짜 뭐 없던데요? 첫인상이란 게 사실 좋기가 쉽지 않아요. 보통 공항은 도시 외곽에 짓죠. 고속도로를 타고 띄엄띄엄 건물을 보는 정도죠. 우리나라도 인천공항에서 판교까지 공항버스를 타고 가면서 우와 할만한 게 있기는 하나요? 방콕의 첫인상은 꾀죄죄했어요. 왕과 왕비의 사진이 어디에든 걸려 있어서 거부감이 들기도 했고요. 태국은 동남아시아의 북한인가? 길바닥에서 국수 그릇을 씻지 않나, 변변하게 걸을 만한 인도가 있기를 하나. 불교 사원은 웅장하지만 제 여행 우선순위가 아니었어요. 아, 웅장해서 유명한가 보다. 영혼 없이 둘러보고 돌아오곤 했죠. 지금 제가 여행 가이드가 된다면, 으리으리한 곳으로 먼저 데려갈 것 같아요. 시암 파라곤이나 딸랏 롯파이 야시장, 정원이 널찍한 카페와 로비가 근사한 호텔 등을 보여주면서 기를 죽여 놔야죠. 그렇게 호감을 사둔 후에, 동네 시장, 동네 골목을 천천히 보여주겠습니다. 어떻게 동선을 정하느냐에 따라 같은 도시도 천차만별의 여행이 되죠. 첫인상의 방콕은 정말 별로였어요.


2. 저는 치앙마이도 참 실망스럽더라고요


사람들이 그렇게 치앙마이, 치앙마이 했으면 대단한 게 있어야 할 거 아닌가요? 어딜 가나 여행자들은 우글우글한데, 막상 우글우글한 이유를 모르겠는 거예요. 카페 돌아다니고, 맛집 돌아다니다 보니 정이 붙기는 했지만, 치앙마이가 인생 여행지라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는 없었죠. 구시가지 안에 사원이야 엄청 많지만, 저처럼 무식한 사람은 한두 개의 사원을 보고 나면 지쳐 버려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시시한 걸, 소박하다고 하는가 보다. 저에게는 시시한 치앙마이라서, 기대를 접었죠. 오토바이를 타고 주변을 돌면서 전혀 다른 치앙마이를 보게 돼요. 이런 곳이 있었어? 꽃들로 가득 찬 식당, 치앙마이 대학교 안의 앙깨우 호수, 맥주 한 잔과 함께하는 재즈바의 느릿한 밤, 늘 친절한 치앙마이 사람들이 결국 저에게도 인생 여행지로 만들어 주더군요. 이삼일 머물면서 치앙마이를 기대하면 실망하실 거예요. 첫눈에 우와 할만한 건 많이, 아주 많이 부족한 편입니다.


3. 한 겨울의 파리, 나는 너를 더 알고 싶지가 않다


여행은 날씨가 80%는 먹고 들어가는 것 같아요. 런던에서 어학연수를 하면서, 크리스마스를 파리에서 보낼 생각을 왜 했을까요? 언뜻 재벌 2세 같지 않나요? 에휴, 유럽의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안다면 적어도 파리를 택해서는 안 되는 거였어요. 크리스마스에는 유령 도시가 된다고, 왜 아무도 이야길 안 해줬냔 말이죠. 춥기는 또 어찌나 춥던지요. 시베리아에 온 줄 알았다니까요. 런던이 제 눈엔 훨씬 더 예쁘더라고요. 런던의 아기자기함이 파리의 평지보다 훨씬 더 역동적이고 아름답게 보이더라고요. 이게 다 날씨 때문이에요. 5월의 파리를 거닐었다면, 전혀 다른 파리였겠죠. 원래부터 쌀쌀맞은 파리 사람들은, 추운 겨울이라 더, 더 공격적으로 불친절하더군요. 오줌 냄새 진동하는 지하철역, 반경 백 미터 안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소매치기들, 주머니 가벼운 배낭 여행자들은 꿈도 꿀 수 없는 맛집들. 그렇게 파리는 저에게 지긋지긋한 도시가 됐어요. 그때 재빨리 기차를 타고 남프랑스로 탈출했죠. 천국이 그곳에 있더군요. 날씨 때문일까요? 부티 철철 나는 모나코의 아름다움 때문이었을까요? 같은 나라 맞나 싶게 전혀 다른 분위기의 낭만과 여유가 그곳에 있더라고요. 여전히 파리는 그립거나, 궁금한 도시가 아니에요. 따뜻한 계절에 찾아가서, 깜짝 놀라 보고 싶기는 하네요.


4. 상하이의 미친듯한 화려함, So What?


중국의 빌딩 숲은 어마어마해요.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건물들이 많아서 더 강렬하죠. 상하이 정도면 젊은 뉴욕이라고 해도 되죠. 상하이 사람들은 중국에서도 콧대 높기로 유명해요. 나는 중국인 아니고, 상하이 사람이야. 그렇게 유난을 떨 정도로요. 그러고 보니, 그때도 겨울이었어요. 생각보다 엄청 춥지는 않더라고요. 으슬으슬한 정도였는데, 어디를 가도 입이 떡 벌어지지 않더라고요. 이건 분명히 취향 탓이에요. 제가 그런 고층건물에 시큰둥한 편인 거죠(뉴욕 타임스퀘어 주변은 어나더 레벨이라 제외). 상하이 푸동 지구는 그 어떤 도시와 비교해도, 더 화려하고 웅장해요. 12년 전이었고, 여기저기 공사가 많았어요. 대기 오염도 심각했고요. 빨래를 널었는데 수상해 보여서 다시 한번 물에 담가 봤어요. 구정물이 세탁을 끝낸 빨래에서 엄청 나오는 거예요. 그런 환경이었으니, 뭐든 좋게 보이겠어요? 화려함은 반복되면 둔해져요. 홍콩이나 도쿄에서 봤던 빌딩 숲이 상하이에서 드라마틱하게 더 대단해지지는 않더라고요. 개인적으로 그렇다는 거예요. 저는 중국의 서쪽을 좋아해요. 쓰촨 성의 청두를 좋아해요. 진짜 중국의 옛날이 그곳에 있죠. 대나무 숲과 마작, 차와 사원이 어디에나 있는 청두가 저에게는 가장 중국다운 도시네요.


5. 많은 분들이 이의를 제기하시겠지만, 도쿄도 그냥그냥이었어요


일본에 대한 기대가 남다른 사람이 저였어요. 우리 세대가 이중적이에요. 겉으로는 반일을 외치지만 뼛속 깊이 일본 짝사랑이 대단했죠. 당시엔 일본 노래를 듣는 것조차 금지였는데, 몰래몰래 불법 테이프로 일본 노래를 들어가며 환상을 키웠어요. 베스트셀러는 온통 일본 관련 서적이었어요. 일본을 따라 해야만 미래에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런 책들이었죠. 세뇌되다 시피한 저는, 이미 정신적 친일파였어요. 그런 제가 도쿄에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차분해져요. 너무 기대가 컸었나 봐요. 사람들은 일본의 깨끗한 골목에 반한다는데, 저는 심심하더군요. 예쁜 소품점이나 카페들이 많기는 한데, 우리나라에서 넘볼 수 없는 수준인가? 전혀 압도되지 않더라고요. 가깝고, 비교적 친절하고, 익숙한 메뉴들의 맛집이 많다. 이런 장점을 부인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도쿄 어디를 봐도, 서울이 넘볼 수 없는 그 무엇을 전혀 못 느끼겠더라고요. 쓰레기 하나 없는 깨끗함을 보라는데, 그 정도인가? 갸우뚱하게 되더라고요. 섬세하게 보는 능력이 제가 떨어지나 봐요. 나중에 두 나라 사이가 좋아진다면, 시골 마을들을 가보고 싶어요. 적당히 한적하고, 적당히 활력 있는 어촌 마을 같은 곳이 제 취향이 아닐까 해요.


PS 매일 글을 씁니다. 저의 작은 기록이, 아주 작은 의미로 세상에 남기를 바랍니다. 후회되지 않는 삶이 뭘까요? 지금 저에게는 오늘의 글을 쓰는 겁니다. 매일 후회 없이 살 수 있는 삶에 감사합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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