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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태국이란 나라를 좋아할까?

머물수록 치명적인 나라인 건 확실함

by 박민우

오래 살면 좋기만 하겠어요? 열불 터지는 일도 자주 있죠. 태국인으로 태어났다면, 거리로 뛰쳐나갔겠죠. 왕도 왕 나름이지, 난봉꾼을 왕으로 존경하라뇨? 햇수로 세어 보니까 제 인생 4분의 1을 태국에서 보냈더군요. 태국의 어떤 점이 그렇게나 좋았던 걸까요?


1. 시장, 시장,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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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은 시장의 나라예요. 평범한 주택가인데도, 여기저기 규모가 꽤 큰 재래시장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바다면 바다, 땅이면 땅. 수산물이며, 곡물이며, 과일이며 이렇게나 풍요로운 나라가 또 있을까 싶어요. 이런 풍요로움은 굉장히 특별한 거예요. 동남아시아가 기후가 비슷하니, 비슷할 것 같아도 태국이 독보적이에요. 크고 작은 가게들이 다 어찌 먹고사나 신기할 정도로요. 보릿고개나 겨울의 굶주림이 없는 나라의 위엄인가 싶기도 하고, 동남아시아에서 상대적으로 선진국이어서 그런가 싶기도 하고요. 시장마다 파는 물건들도 특색이 다 있어요. 태국의 시장만 돌아도 평생 꿀 떨어지는 여행 가능합니다. 시장의 매력에 빠지면 여행이 지루할 수가 없어요. 평생 듣도 보도 못한 과일도 드셔 보실 수 있어요. 기적의 신약을 풀떼기라며 반찬으로 팔고 있을 걸요? 농담 같죠? 태국의 재래시장은 우주보다 더 무한해요(좀, 너무 나갔나요?)


2. 부티, 부티, 부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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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티는 무슨? 태국 우리보다 못 살잖아.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요즘 여의도 더현대서울 백화점 때문에 난리라면서요? 실내가 그냥 공원 수준이라면서요? 서울에서 규모가 가장 큰 백화점이라죠? 더현대서울이 3만 평이 좀 안 돼요. 시암파라곤은 주차장만 3만 평이 넘어요. 총 4천 대의 차를 주차할 수 있어요. 식품매장 말고, 식품 매장 내 마트가 있어요. 그 마트가 우리나라 웬만한 백화점 식품 매장 크기예요. 백화점에서 슈퍼카를 팔아요. 라면 사러 가셔서 슈퍼카 부가티에도 한 번 앉아 보셔야죠. 시암 파라곤만 있는 게 아니에요. 센트럴 계열이 백화점 업계 부동의 1위인데, 작심하고 센트럴 엠버시를 열었어요. 우리로 치면 롯데백화점일 텐데, 그 롯데가 압구정 갤러리아를 누르려고 청담동에 초대형 롯데백화점을 연 셈이죠. 그게 센트럴 엠버시예요. 아주 그냥 돈을 쏟아부은 티가 건물 내에서 진동을 해요. 오성급 호텔에 꼭 안 머물러도 루프탑은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으니까요. 마음껏 다니세요. 가로수길 식당 가격이면 대부분 가능해요. 루프탑만 돌아다녀도, 매일 귀족 같은 여행을 할 수 있답니다. 백화점, 호텔, 강변의 식당들. 분위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이 고급스러워요. 저는 안 가죠. 돈 없어서 아닙니다만. 한두 번 가봤어야죠. 쳇!


3.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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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태국 음식이 맛있을 수는 없어요. 향신료에 질색하는 분들이라면, 떼돈을 줘도 손사래를 치겠죠. 넘치는 재료를 오래오래 누렸던 사람들이 추구하는 음식은 어떤 걸까요? 이런 시도, 저런 시도를 많이 할 수밖에 없죠. 게다가 화교가 천만 명이 살아요. 중국 음식까지 합쳐져서, 거대한 맛 세계관이 펼쳐져요. 그러니 말도 못 하게 다양한 음식들이 우리의 선택을 기다리죠. 한국에서 드시는 태국 음식은, 빙산의 팥빙수 수준이에요. 쌀국수 하나를 봐도, 베트남이랑 또 달라요. 고명이 심할 정도로 많아요. 어묵은 기본이고요. 고기로 만든 태국식 미트볼에, 생선 껍질 튀김, 무지 바삭한 밀가루 튀김, 각종 채소들, 부위별 고기들, 부속들이 올라가요. 이름이 같아도 식당마다 조금씩 달라요. 완벽하게 똑같은 레시피란 게 태국에는 없어요.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이렇게도 만들어보고, 저렇게도 만들어 봐요. 일단 태국 음식이 입에 맞는다면, 그때부턴 우주여행이 시작됐다고 보시면 돼요. 끝이 없으니까요. 우리가 미처 몰랐던 향과 맛의 신세계가 펼쳐져요. 낯선 음식을 먹는 게 뇌에 좋다고 강력히 주장해요. 몰랐던 자극을 해독하려는 몸부림이 뇌에서 일어나니까요. 그래서 일부러라도 도전해 보라고 권하고 싶어요. 그런 충돌도 있어야, 우리의 음식도 더 사랑하게 되는 거 아니겠어요?


4. 따뜻한 나라가 좋아요

20200120_092113.jpg 찬조 출연 치앙마이 어머니 아버지

날씨도 저에겐 중요해요. 유럽은 여행은 가도 살지는 못하겠더라고요. 봄과 여름만 일 년 내내라면, 유럽이 천국이죠. 그런데 가을과 겨울이 심하게 우중충하더군요. 난방이라는 것도 변변하게 없잖아요. 해는 네 시면 사라지고요. 우울하고, 억울한 날들이 으슬으슬한 추위와 함께 저를 압박하더라고요. 런던의 10월 말은, 세기말의 폐허 같은 느낌이었어요. 북유럽은 더 심하다는데, 어찌들 버티나 걱정이 다 되더라고요. 따뜻한 지중해성 기후인 스페인이나 남프랑스 같은 곳은 겨울도 좋아요. 태국이 다른 게 아무리 좋아도, 날씨가 추웠다면 이렇게 오래 머물지는 못했을 거예요. 제가 또 손발이 차요. 체질과도 상관있을 것 같아요. 한 겨울에 중국을 좀 다녀 봤는데, 방까지 추우니까 환장하겠더라고요. 그렇게 추운데 사람들이 식당 문도 휙휙 열어놓고 다니고, 나만 추위를 타나. 외롭고, 불쌍해지고, 집에 가고 싶고 그렇더라고요. 따뜻한 태국 날씨 사랑합니다. 찌는 듯한 더위 역시 사랑합니다.


5. 말도 안 되게 천진하고 낙천적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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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종교가 없어요. 그게 자랑은 아니지만, 숨길 일도 아니죠. 불교에 대해서 잘 아는 건 없지만, 타인이나 타 종교에 대한 배척이 상대적으로 약해요. 일단은 받아들이고 보죠. 일부러 똘레랑스라는 단어를 쓰면서 관용 정신을 강조하는 프랑스도 아름답지만, 태국은 굳이 그런 단어가 필요 없어요. 태국에는 무슬림들이 많이 살아요. 자신들만의 독립을 외치며 테러도 곧잘 일으켜요. 제가 12년간 뉴스를 보면서, 그런 무슬림을 해코지하는 보복 테러 뉴스를 못 봤어요. 사람 사는 곳이니, 저도 아예 없다고는 장담 못해요. 하지만 일어나도, 진즉에 일어났어야 하고, 빈도수도 많았어야 하는데 그런 움직임을 못 느끼겠더라고요. 시장이나 식당에서 무슬림들은 너무나 해맑게 장사 잘하면서 살아요. 길거리에서 기독교를 전파하러 온 사람들이 찬송가를 불러요. 너무나 천진한 얼굴로 그들을 보며 찬송가에 감동해요. 저 사람들은 개종이란 게 뭔지는 알고 있는 걸까? 보는 제 기분이 다 묘하더라고요. 누구든지 일단은 좋은 시선으로 바라봐요. 세상은 모두 자신들과 같다고 생각하니까요. 2차 세계 대전에서 피를 보지 않은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여서일까요? 그 말도 안 되는 낙천성이 어디에서 온 건지 몰라도, 저에게 없는 거라서 치명적으로 매력적이더라고요.


PS 매일 글을 씁니다. 글을 쓰면서 책임감도 느끼고 있나? 자문할 때가 있어요. 사실은 조금 더 맡겨두는 편이에요. 쓰고 싶은 걸 쓴다. 나오는 글을 받아들인다. 이 흐름을 책임지는 사람이어야겠죠. 평상시의 저를 단련하는 사람이고자 해요. 제 글이 공해가 되지 않으려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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